내가 예전에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의 책에서 ‘포틀래치’라는 풍습을 본 적이 있다. 북미 원주민 사회의 관습으로 소개되었던 것인데, 쉽게 말하면 대접과 증여를 통한 위신 경쟁이다.
상대보다 더 많이 베풀고, 더 융숭하게 대접하고, 더 많은 재산을 소모하는 쪽이 이기는 시합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용성이 아니다. 그 음식과 물건이 실제로 얼마나 필요한가, 그것을 쓰는 것이 경제적으로 합리적인가 하는 문제는 부차적이다. 핵심은 따로 있다.
“나는 이 정도를 써버려도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다.”
이 신호를 상대와 공동체에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포틀래치는 단순한 낭비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서열을 증명하기 위한 과시적 소모다. 더 많이 쓰고, 더 크게 베풀고, 더 화려하게 치르는 사람이 더 높은 위신을 얻는다. 반대로 그 경쟁에서 밀리는 사람은 단순히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체면을 잃은 사람, 위신을 빼앗긴 사람, 사회적 패배자가 된다.
그래서 포틀래치에서 지는 것은 큰 불명예가 된다.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해, 공동체 안에서 낮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자산을 털어서라도 더 크게 대접하려 한다. 심하면 재산을 다 날려먹으면서까지 그 경쟁에 뛰어든다.
얼핏 보면 이것은 북미 원주민 사회의 특수한 풍습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포틀래치는 특정 부족의 기이한 관습이 아니라, 인간 사회 곳곳에서 반복되는 보편적 구조에 가깝다.
동물 세계에서도 비슷한 사례는 많다. 공작의 꼬리를 생각해보면 된다. 공작의 화려한 꼬리는 생존에 그다지 유리하지 않다. 오히려 포식자에게 눈에 띄기 쉽고, 움직임도 불편하게 만든다. 그런데도 공작은 화려한 꼬리를 통해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한다. “나는 이렇게 쓸데없는 부담을 짊어지고도 살아남을 만큼 강하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인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은 문명화되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비슷한 신호 경쟁을 한다. 다만 꼬리깃털 대신 명품 가방, 외제차, 고급 아파트, 결혼식, 사교육, 학벌, 직장, 자녀 스펙을 사용한다.
나는 현대 한국 사회에도 이런 포틀래치가 매우 성행하고 있다고 본다.
물론 오늘날 한국에서 누군가가 대놓고 “내가 너보다 더 많이 낭비할 수 있으니 내가 더 위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현대 사회의 포틀래치는 훨씬 세련된 말로 포장된다. 그것은 예의, 정성, 효도, 사회생활, 부모의 사랑, 자기관리, 품격, 정상적인 삶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상당 부분은 위신 경쟁이다.
결혼식에 이 정도는 써야지.
돌잔치는 이 정도는 해야지.
장례식 조문은 이렇게 해야지.
명절 선물은 이 정도는 해야지.
부모님께 이 정도는 해드려야지.
애 학원은 이 정도는 보내야지.
남자가 차는 있어야지.
여자가 이 정도 관리는 해야지.
집은 이 정도는 되어야지.
남들 다 하는데 너만 안 하냐.
이 말들은 겉으로는 상식처럼 들린다. 그러나 사실은 사회적 압박이다. 개인이 자신의 필요와 형편에 맞춰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의 시선에 맞춰 지출하게 만드는 구조다.
문제는 소비 그 자체가 아니다. 누군가 명품을 사고, 좋은 차를 타고, 큰 결혼식을 하고, 자녀에게 비싼 교육을 시키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다. 자기 돈으로 자기 만족을 위해 쓰는 것은 개인의 자유다.
진짜 문제는 그것이 어느 순간부터 정상성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작게 살고 싶다.”
“나는 남들처럼 결혼식에 큰돈을 쓰고 싶지 않다.”
“나는 아이를 사교육 경쟁에 밀어넣고 싶지 않다.”
“나는 체면 때문에 차를 사고 싶지 않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나오면 한국 사회는 그 사람을 쉽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합리적인 사람으로 보기보다는 이상한 사람, 실패한 사람, 찌질한 사람, 무책임한 사람,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처럼 취급한다.
이 지점에서 한국식 포틀래치의 악질성이 드러난다.
그것은 자발적 소비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사회적 강제성을 띤다. 법으로 정해진 세금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를 통해 걷히는 비공식 세금이다. 나는 이것을 탈락 공포를 이용한 사회적 세금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본다.
한국 사회에서 포틀래치의 참가비는 너무 비싸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탈퇴 비용도 비싸다는 점이다. 경쟁에 참여하면 돈과 시간을 잃는다. 그러나 경쟁에서 빠지면 체면과 관계와 정상성의 지위를 잃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경기장에 들어간다.
결혼도 그렇다. 오늘날 한국에서 결혼은 두 사람이 함께 살겠다는 약속이라기보다 거대한 체면 의례가 되어버렸다. 예식장, 스드메, 신혼집, 혼수, 예물, 청첩장, 하객 수, 축의금, 부모 체면, 직장 동료의 시선까지 모든 것이 얽힌다.
출산과 육아는 더 심하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단순히 한 생명을 기르는 일이 아니다. 유모차, 육아용품, 어린이집, 영어유치원, 학군, 사교육, 체험학습, 자녀 스펙, 대학입시까지 이어지는 끝없는 위신 경쟁에 입장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이 “돈이 없어서 아이를 못 낳는다”고 말할 때, 그 돈은 단순한 분유값이나 기저귀값만을 뜻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남들 기준에 맞춰 정상적인 부모처럼 보이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까지 포함된 돈이다.
즉 한국에서 출산 비용은 생계비가 아니라 포틀래치 비용까지 포함한다.
이러니 사람들이 겁을 먹는 것이 당연하다. 아이를 낳는 순간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은 생명의 양육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강요하는 비교와 체면과 경쟁의 비용이기 때문이다.
사교육도 마찬가지다. 사교육은 단순히 아이의 학습을 도와주는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부모의 불안을 먹고 자라는 위신 경쟁이다.
“남들도 다 보내는데 우리 애만 안 보내면 뒤처지는 것 아닌가?”
“좋은 학군에 못 살면 아이에게 미안한 것 아닌가?”
“영어유치원을 안 보내면 출발선에서 밀리는 것 아닌가?”
“다른 집 아이는 벌써 이것까지 한다는데 우리 아이만 안 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이런 식의 불안이 사교육 시장을 키운다. 그 과정에서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돈을 쓴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상당 부분 사회적 공포에 끌려간다. 아이를 위한 선택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나도 정상적인 부모다”, “나도 뒤처지지 않았다”, “내 아이도 경쟁에서 밀리지 않는다”는 신호가 숨어 있다.
그러므로 사교육은 한국식 포틀래치의 핵심 무대 중 하나다.
주거도 마찬가지다. 집은 원래 사람이 사는 공간이다. 비바람을 피하고,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쉬는 곳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집은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계급 증명서다.
어느 동네에 사는가.
자가인가 전세인가 월세인가.
아파트인가 빌라인가.
몇 평인가.
브랜드 아파트인가.
학군은 어떤가.
역세권인가.
신축인가 구축인가.
이 모든 것이 사람의 등급을 판정하는 기준처럼 작동한다. 집이 삶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명찰이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리해서라도 더 좋은 동네, 더 좋은 아파트, 더 큰 평수, 더 번듯한 외관을 원한다. 그것이 실제 삶의 만족과 비례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다.
이것이 바로 포틀래치다.
한국 사회의 포틀래치는 전통적인 포틀래치보다 더 넓고 더 집요하다. 전통 포틀래치는 특정한 의례와 행사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국식 포틀래치는 일상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
입는 옷, 타는 차, 사는 동네, 다니는 직장, 나온 대학, 배우자의 조건, 자녀의 학교, 부모에게 하는 효도, 명절 선물, 친구 관계, 회식, 말투, 취미, 외모 관리까지 거의 모든 영역이 위신 경쟁의 무대가 된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검소함조차도 때때로 하나의 포틀래치가 된다. “나는 이렇게 아껴서 집 샀다”, “나는 이렇게 고생해서 성공했다”, “나는 이렇게 희생했다”는 식의 도덕적 위신 경쟁으로 바뀐다. 돈을 쓰는 과시만 포틀래치가 아니다. 고생을 과시하고, 희생을 과시하고, 인내를 과시하는 것도 포틀래치가 될 수 있다.
이 점에서 한국 사회는 매우 피곤하다.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단순히 잘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다. 남들 앞에서 실패자로 보이지 않기 위해 산다.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돈을 쓰고,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아이를 몰아붙이고, 남들에게 정상으로 보이기 위해 원하지 않는 선택을 한다.
삶이 자기만족의 과정이 아니라, 타인의 평가를 피하기 위한 방어전이 된다.
그래서 한국식 포틀래치는 개인을 이중으로 소모시킨다. 하나는 실제 돈의 소모다. 결혼식, 주거, 교육, 자동차, 선물, 외모 관리, 인간관계 유지비가 계속 들어간다. 다른 하나는 정신적 소모다. 비교, 불안, 수치심, 체면, 탈락 공포가 사람을 계속 갉아먹는다.
돈만 잃는 것이 아니다. 시간도 잃고, 자유도 잃고, 자존감도 잃고, 인간관계도 잃는다. 심하면 결혼 의욕과 출산 의욕까지 잃는다.
나는 한국의 저출산을 이야기할 때 이 부분을 빼놓으면 안 된다고 본다. 단순히 집값이 비싸서, 임금이 낮아서, 육아휴직이 부족해서만이 아니다. 물론 그것들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한국에서 정상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너무 비싼 의례가 되어버렸다”는 문제가 있다.
사람들은 아이 하나를 낳는 것이 아니라, 체면 경쟁의 입장권을 끊는다고 느낀다.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양가와 사회와 직장과 친구들에게 평가받는 무대 위에 올라간다고 느낀다. 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계급을 공개적으로 전시한다고 느낀다.
그러니 도망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현대 한국 사회의 비극은 많은 사람들이 이 구조를 싫어하면서도 동시에 유지한다는 점이다. 자기는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남에게는 똑같은 기준을 들이댄다. 자기는 체면 때문에 괴롭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체면 경쟁에서 빠지려 하면 무시한다.
“그래도 남들 하는 만큼은 해야지.”
“그래도 부모 체면이 있지.”
“그래도 애한테 그 정도는 해줘야지.”
“그래도 결혼식인데 너무 초라하면 안 되지.”
“그래도 남자가 그 정도는 있어야지.”
“그래도 여자가 그 정도 관리는 해야지.”
이런 말들이 포틀래치를 유지하는 주문이다.
결국 한국 사회는 서로가 서로를 경기장 안으로 밀어넣는다. 모두가 힘들다고 하면서도, 모두가 심판이 되고 관객이 되고 경쟁자가 된다. 그래서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데 경쟁은 끝나지 않는다.
나는 이 구조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고 본다.
한국 사회는 포틀래치가 사라진 근대사회가 아니라, 포틀래치가 생활양식 전체로 확장된 사회에 가깝다.
과거의 포틀래치가 잔치와 증여의 형식을 띠었다면, 현대 한국의 포틀래치는 결혼식, 아파트, 사교육, 명품, 효도, 회식, 스펙, 외모, 인간관계의 형식을 띤다. 과거에는 부족장이 재산을 불태우며 위신을 증명했다면, 오늘날 한국인은 대출과 카드값과 사교육비와 체면 비용을 감당하며 자신의 정상성을 증명한다.
이것은 문명화된 사회라기보다, 더 정교해진 의례 사회에 가깝다.
물론 모든 소비가 포틀래치인 것은 아니다. 좋은 것을 좋아할 수도 있고, 아름다운 것을 사고 싶을 수도 있고, 자녀에게 더 나은 기회를 주고 싶을 수도 있다. 인간에게 취향과 애정과 책임감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그 취향과 애정과 책임감마저 너무 쉽게 위신 경쟁으로 빨려 들어간다. 내가 정말 원해서 하는 것인지, 남들이 안 하면 비웃을까 봐 하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개인의 선택처럼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사회적 압력의 결과일 때가 많다.
진짜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한국 사회에서 해방이란 단순히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이 아니다. 소득이 조금 오른다고 해서 이 포틀래치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준만 더 올라갈 수 있다. 예전에는 평범한 결혼식이면 충분했지만, 이제는 더 화려한 결혼식이 기준이 된다. 예전에는 학원 하나면 충분했지만, 이제는 여러 개가 기준이 된다. 예전에는 집 한 채면 충분했지만, 이제는 어느 동네의 어떤 아파트인지가 기준이 된다.
욕망이 문제가 아니라, 욕망이 남의 시선에 의해 끝없이 갱신된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진짜 해방은 다른 곳에 있다.
“그 정도 안 해도 된다.”
“작게 살아도 된다.”
“남들 기준에 맞추지 않아도 된다.”
“아이를 남과 비교하지 않아도 된다.”
“결혼식을 초라하게 해도 결혼은 결혼이다.”
“작은 집에 살아도 삶은 삶이다.”
“차가 없어도 사람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인생을 태우지 않아도 된다.”
이 감각을 회복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아직 그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서로를 감시하고, 비교하고, 평가하고, 조롱하면서 포틀래치 경기장 안으로 계속 밀어넣는다. 그 경기장에서 빠져나오려는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패배자라는 낙인을 찍으려 한다.
그래서 이 사회가 피곤한 것이다.
돈이 없어서만 피곤한 것이 아니다. 쉴 시간이 없어서만 피곤한 것도 아니다. 한국 사회의 진짜 피로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자기 삶을 계속 소모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온다.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고, 끊임없이 비교당해야 하고, 끊임없이 정상임을 입증해야 한다.
포틀래치는 과거의 풍습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다.
다만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다.
예의라는 이름으로.
체면이라는 이름으로.
효도라는 이름으로.
부모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생활이라는 이름으로.
정상적인 삶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그 이름 아래에서 사람들은 오늘도 자신의 돈과 시간과 자유와 행복을 태워가며, 자신이 탈락자가 아님을 증명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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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비판이다. 하지만 동시에 문제도 있음을 지적해야겠다. 위신과 상관없이 처음부터 그렇게 생겨먹은 사람들이 있다. 포틀래치에 사회적 위기를 대입해보면, 많은 문제는 구성원 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가? 예를 들어 사교육 시장의 과열은 그런 식으로 형성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역사적 수요라는 측면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