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어렵다. 이것은 타인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나에게는 오랫동안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이 매우 힘들었다. 남들이 하는 것은 나도 반드시 해야 하고, 남들보다 못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나를 성장시키는 생각이 아니라,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생각이었다.


내 글을 꾸준히 읽은 사람이라면 짐작하겠지만, 나는 그다지 활동적이고 사교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만약 내가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인싸’ 스타일의 사람이었다면, 지금 내가 쓴 글들과 같은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선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사교적이지 않은 내 성격을 원망했다. 왜 나는 남들처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지, 왜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하지 못하는지, 왜 나는 이렇게 비판적이고 짜증이 많은 사람인지 스스로를 탓했다. 오랫동안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고,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체념했다. 그리고 그 체념은 단순한 포기가 아니라, 나 자신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에 가깝다. 나는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고, 세상을 마냥 좋게만 보는 사람도 아니다. 비판적이고 예민하며, 때로는 짜증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내가 잘못된 인간이라는 뜻은 아니다.


사람은 모두 다르게 태어난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자주 다른 사람과 같아져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산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정해진 기준에 맞지 않는 자기 자신을 억지로 자르고 늘리며 괴롭힌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나 자신을 고문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렇게 태어났고, 특별히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이렇게 살아갈 자유가 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본받고 배우는 것은 필요하다. 사교성이 부족한 사람이 최소한의 사회성을 배우는 것, 비판적인 사람이 표현 방식을 다듬는 것, 예민한 사람이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익히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러나 약도 지나치면 독이 되듯, 남을 배우려는 마음도 지나치면 시기심과 자기혐오로 변한다.


문제는 바로 그 지점이다.


나아지고 싶다는 마음이 어느 순간부터 나를 책망하는 마음이 되고, 성장하고 싶다는 욕망이 나 자신을 학대하는 방식으로 변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좋은 노력이 아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기질과 재능은 다르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는 데 능하고, 어떤 사람은 혼자 오래 생각하는 데 능하다. 어떤 사람은 낙관적이고, 어떤 사람은 비판적이다. 어떤 사람은 행동이 빠르고, 어떤 사람은 관찰이 깊다. 이 차이를 모두 노력 부족으로 돌리는 것은 인간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 일이다.


모든 것이 노력의 문제라고 말하는 사회는 결국 사람을 학대한다. 그리고 더 나쁜 것은, 그 학대가 타인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향한다는 점이다. 남들처럼 되지 못한 나를 미워하고, 내가 가진 성향을 결함으로 여기며, 바꿀 수 없는 것까지 바꾸려 든다.


그러나 진짜 성숙은 모든 한계를 극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한계는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내가 살아갈 방식을 찾아내는 데 있다.


나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 단점을 모두 정당화한다는 뜻이 아니다. 고칠 수 있는 부분은 고치되, 바꿀 수 없는 기질까지 죄로 여기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지만, 그 과정이 나 자신을 미워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남이 가진 장점을 배울 수는 있어도, 남 자체가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타인의 기준에 억지로 맞추며 고문할 필요는 없다.


나는 나로 태어났고, 결국 나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조금은 덜 불행한 삶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