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적이고 본받을 만한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우리는 흔히 “모범적인 사람”이라는 말을 좋은 의미로 사용한다. 성실하고, 예의 바르고, 질서를 지키며,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두고 우리는 본받을 만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은 생각보다 위험하다.


왜냐하면 “모범적”이라는 말은 반드시 “선하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때로 그 사회의 도덕과 질서에 가장 잘 순응하는 사람을 뜻할 뿐이다. 그리고 어떤 사회의 도덕과 질서는 훗날 전혀 다른 기준에서 보면 잔혹한 악습일 수 있다.


조선시대를 생각해보자.


조선 사회에서 신분의 고하에 관계없이 누구와도 터놓고 대화하려는 사람은 품행이 방정하지 못한 사람, 법도를 모르는 사람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반대로 양반과 상민, 주인과 노비의 구분을 철저히 지키고, 위아래의 질서를 분명히 하는 사람은 예의 바르고 반듯한 사람으로 평가받았을 것이다.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그는 신분차별을 당연하게 여긴 사람이다. 하지만 그 시대의 기준에서는 오히려 모범적인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150년 전 미국 남부도 마찬가지다.


당시 그 사회에서 모든 인종이 동등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급진주의자,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 혹은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로 취급받았을 것이다. 반대로 백인과 흑인의 분리와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것을 “자연의 질서”나 “전통”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상식적이고 건전한 시민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오늘날에서 보면 그는 명백한 인종차별주의자다. 그러나 그 사회 안에서는 그는 모범적인 시민이었을 수 있다.


고대 아즈텍이나 페니키아 사회를 떠올려보아도 마찬가지다. 당시 어떤 사회에서는 인간을 신에게 바치는 제의가 성스러운 의식으로 여겨졌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끔찍한 살인이다. 그러나 그 시대와 사회 안에서는 그것이 공동체를 유지하고 신의 뜻을 따르는 경건한 행위로 이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불편한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악은 언제나 악의 얼굴로 나타나지 않는다.

어떤 시대의 악은 예의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어떤 시대의 악은 전통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어떤 시대의 악은 신앙, 충성, 가족, 질서, 상식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시대의 도덕감각 안에서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날의 우리는 과거 사람들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신분차별이 나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미국 남부 사람들도 흑인을 차별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는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대인들도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일에 최소한의 연민이나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물론 그런 감정을 가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자기 시대의 도덕을 의심하는 사람은 존재한다. 그러나 사회 전체의 지배적 감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를 수 있다.


조선 사람들에게 신분은 당연한 질서였을 수 있다.


미국 남부의 백인들에게 인종 분리는 자연스러운 상식이었을 수 있다.


고대의 제사장과 시민들에게 인신공양은 잔혹한 범죄가 아니라 성스러운 의무였을 수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불편해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것은 과연 얼마나 옳은가?


지금 우리가 모범적이라고 칭찬하는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인가?


혹시 그는 단지 우리 시대의 병든 규범을 가장 충실히 수행하는 사람은 아닌가?


한국 사회에서 “철들었다”, “예의 바르다”, “사회생활 잘한다”, “반듯하다”는 말도 때로는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윗사람의 부당한 말에도 대들지 않는 사람.
조직의 부조리를 보아도 문제 삼지 않는 사람.
자기 생각보다 분위기와 눈치를 우선하는 사람.
가족과 사회가 정한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
불합리한 요구를 받아도 “다들 그렇게 산다”며 참는 사람.
남들과 다르게 살려는 사람을 조용히 비웃고,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사람.


한국 사회에서는 이런 사람이 종종 모범적인 사람으로 칭찬받는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는 성숙한 사람이 아니라 권위와 집단에 과잉 적응한 사람일 수도 있다.


진짜 문제는 이런 태도가 “문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는 점이다.


어떤 관습을 비판하면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그건 우리 문화다.”
“한국에서는 원래 그렇다.”
“어디 가나 다 비슷하다.”
“튀지 말고 둥글게 살아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하지만 문화라는 말은 면죄부가 아니다. 조선의 신분제도 문화였고,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도 문화였고, 고대의 인신공양도 문화였다. 어떤 관습이 오래되었다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당연하게 여긴다고 해서 도덕적인 것도 아니다.


문화는 어떤 악습이 왜 생겼는지를 설명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을 계속 유지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우리는 흔히 과거 사람들을 비웃는다. 어떻게 노비제도를 당연하게 여겼을까. 어떻게 인종차별을 상식이라고 믿었을까. 어떻게 인간을 제물로 바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러나 미래의 사람들도 우리를 그렇게 볼 수 있다.


왜 그 시대 사람들은 아이들을 극단적인 입시 경쟁에 몰아넣는 부모를 책임감 있는 부모라고 불렀을까.


왜 회사에 자기 삶을 갈아 넣는 사람을 성실하다고 칭찬했을까.


왜 불합리한 위계에 순응하는 사람을 예의 바르다고 했을까.


왜 자기 삶을 포기하고 가족과 조직에 헌신하는 사람을 훌륭하다고 했을까.


왜 남들과 다르게 살려는 사람을 철없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몰았을까.


우리가 과거를 보며 느끼는 당혹감을, 미래의 사람들도 우리에게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모범적인 사람”이라는 말은 언제나 의심받아야 한다. 그 사람이 정말 선한 사람인지, 아니면 단지 그 사회가 원하는 인간형에 잘 맞춰진 사람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한 사회가 누구를 칭찬하는지를 보면, 그 사회의 도덕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 사회의 공포도 보인다. 그 사회가 무엇을 억압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며, 어떤 인간을 길들이고 싶어 하는지도 함께 드러난다.


모범적인 사람은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때로 모범적인 사람은 시대의 악습을 가장 충실히 수행하는 사람이다.


때로 본받을 만하다고 칭찬받는 사람은, 훗날 가장 먼저 반성되어야 할 인간형일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는 누군가를 모범적이라고 부르기 전에 물어야 한다.


그 사람은 무엇에 충실한가.


인간의 존엄인가, 아니면 시대의 질서인가.


스스로의 양심인가, 아니면 사회가 정한 역할인가.


이 질문을 하지 않는 사회에서 “모범”은 너무 쉽게 폭력의 다른 이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