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이란 정당한가? 존재란 정당한가? >


삶을 부정하는 것, 삶에 의문을 가지는 것. 오늘날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는다. 물론 이는 틀린 말이다. 일반화일뿐이니. 그러나 나는 과격한 말을 하기 위해 살짝 일반화를 좀 쓰도록 하겠다.


나는 앞으로의 글에서 삶의 부당함을 낱낱이 파헤쳐서 분석해보겠다. 삶, 아니 존재 자체는 부당한가? 오늘날 사회와 우리에게 '초자아'라는 녀석은 너무나 강해지고 거대해져버렸다. 초자아는 자아와 이드를 억압한다. 그러나 초자아는 '나'가 아니다. 그것은 외부에서 주입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자아'와 '이드' 또한 내가 맞을까? 이드가 '나'가 아니라는 해석은 있어도, '자아'가 내가 아니라는 해석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난 여기서 파격적인 말을 하겠다 ㅡ '자아'조차 '나'가 아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것, 삶을 살아가겠다고 동의한적이 없다. 그런데도 동의하지도 않은 삶을 살아가는 것을 강요받는 것이 정말 타당한가?


삶은 우리를 필연적으로, 항상, 매일 매번 우리를 지배한다.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며, 그것은 항상 부정적으로만 여겨져왔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슈티르너는 '나'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은 유령이라고 했다. 그러나 유령은 무엇인가? 유령은 개인의 자유로운 의지와 욕망을 억압하는 모든 '고정관념', '추상적 관념', '신성시되는 가치'를 뜻한다. 그러나 자유로운 의지, 욕망 조차가 나의 것이 맞는가? 아니, 애초에 '나'가 '나'가 맞는가? 그것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하고자 한다.


누가 '나'라는 존재를 입증하는가? 그것은 나다. 이는 순환논리이며, 나라는 존재는 결코 입증될 수 없다. 우리는 존재하기 위해 선택한적이 없으며, 자유로운 의지, 욕망을 "자유롭게" 고른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그저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는 정말 타당한 것인가?


존재의 본질을 파헤쳐보면 결국 모든 것은 부당하다! 그 어떤 것도 삶이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다. 모든 건 삶 위에서, 삶이라는 출발선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외부에서 검증방식을 가져올 수가 없다. 삶은 결국 구조 자체가 부당할 수 밖에 없다.


삶은 선택되지도 않았고, 우리에게 강요된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 삶을 의심해본적이 드물다. 그러나 명확히 해야할 것은! 난 여기서 허무주의, 염세주의 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삶이 부당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고 말지는 개인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삶을 포기하는 자들은 그들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선택을 못하도록 강요하거나 금지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느끼는 것, 우리가 원하는 것, 가장 뜨겁고 느껴지는 우리의 욕망, 그리고 생각. 이 모든 것이 정말 나의 것인가? 나라는 개념은 무엇인가? 그 개념은 나로부터 오지 않았다. 우리는 어떻게서든, 어떠한 방식으로든 환경에 의한 영향을 받는다. 나는 나가 아닌 것이다. 애초에, 처음부터.


그럼 그 전에는 무엇이 있는가? ㅡ 아무것도 없다. 무. 비존재. 그렇다. 비존재야말로 '나'인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허. 그것이 나의 실체이며 본질이다. 그렇다면 결국 허무주의가 답이라는 것인가? 아니다. 비존재가 우리의 본질임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존재를 부당하게 느낀다. 그럼 존재를 부정해야하는가, 긍정해야하는가? 여기서 하나를 정하는 것 자체가 부당한 것이다. 존재를 부정할지, 긍정할지는 개인의 자유에 맡겨야 한다. 그것을 못하게 하는 순간, 우리는 "나"라는 독재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것과 다를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로운 선택조차 나의 것이 아니다. 선택 또한 결국 환경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본질이 비존재라면, 선택이 어떻게 나의 것이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단 하나의 결론인 "비존재에서 정지하는 것"이라는 것 밖에 도출하지 않는다. 우리의 본질이 우리를 억압하게 되는 것이다. 선택은 이러한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선택이 나의 것이 아니라도, 그것을 하는 주체는 결국 나이며 그것이 불러오는 결과는 모두 '나'에게 영향을 준다...


똑똑한 사람이라면, 이 문장이 틀렸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렇다. 난 앞에서 '나'는 결코 '나'가 아니라고 했다. 그럼 뭐가 맞다는 것인가? 선택이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나의 실체가 비존재라면, 난 무엇을 해야하는가? 그것에 대한 답으로는, "나는 삶을 부정하는 것, 비존재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가 대답이다. 그럼 결국 이 글은 모든 인류가 다 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우리는 결국 행동하거나 선택을 하려면 내가 아닌 '나'라는 옷을 입어야한다. 존재는 바로 이러한 대가, 내가 나 자신을 속이는 옷을 입고 가짜의 삶을 살 것을 요구한다. 존재를 선택하려면, 어쩔 수 없이 부당함을 긍정해야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반박할 수 있다. ‘나'라는 것은 내가 태어난 이후에만 성립되는 개념인데, 어떻게 내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고 삶이 부당한가? 애초에 동의라는 것은 내가 할 수 밖에 없는 일인데, 내 본질이 비존재라면 동의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근데도 삶에 동의한 적이 없으니 삶이 부당하다고 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아닌가? 이것은 존재론적 사고이다. 그리고 난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비존재는 ‘선택'이라는 것을 할 수 없다. ‘선택'은 가짜인 우리가 그나마 본질에 가깝게 해줄뿐, 선택 또한 100%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맞는 말이다. 비존재는 동의를 구할 수 없다. 그러나 존재라고 하는 것은 항상 필연적으로 존재의 동의를 통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이게 바로 문제점이다. 나는 이러한 것을 “존재의 비존재를 향한 차별”이라고 정의한다. 비존재는 동의나 선택을 할 수 없으나, 삶(존재)은 동의나 선택을 하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구조를 가진다. 결국 삶은 우리가 가짜 옷을 입도록 강요한다. 그 동의나 선택 또한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선택도, 동의도 부당하다는 것인가? 결론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존재는 선택을 요구하면서도, 선택은 비존재를 배척하고 존재로만 향하게 해주는 행위지만, 사회와 환경의 영향을 최대한 전부 걷어낸, 설사 가짜일지라도 ‘나’의 선택은 비존재와 존재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해준다.


지금까지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당신들이 내가 ‘비존재의 정당성’을 주장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글은 비존재가 정당하다는 논리가 아니다. 비존재가 설사 본질이여도, 그 본질조차 부당하다. 왜냐하면 비존재는 비존재와 존재 사이에서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을 구조적으로 못하게 막으며, 애초에 선택이나 동의 등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즉, 존재에서 비존재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본질로 돌아가는 대신, 선택과 동의라는 것을 담보로 맡겨야한다. 그대는 진실(빨간 약)을 고를 것인가, 안락한 가짜 현실(파란 약)을 고를 것인가? 나는 삶(존재)이나 삶을 포기하는 것(비존재)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존재 상태에 놓인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결론은, 염세주의(비존재로 돌아가는 것)도, 실존주의(존재로 돌아가는 것)도, 모두 대가를 요구한다. 삶은 부당하기에 우리가 비존재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게 한다. "원한다"라는 개념 자체가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존재 또한 부당하기에 우리가 다시 존재를 선택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후회는 없을 것이다. 후회라 것 조차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우리의 선택 ㅡ 설사 우리의 것이 아닐지라도, 최소한 '나'에 그나마 제일 근접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에 달렸다.


방금 글은 권위가 어째서 부당한지에 대해 알려준다. 왜냐하면 권위는 항상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을 방해하며, 우리를 지배하려 드는 부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권위의 정의부터 보자. 권위란 무엇인가? 권위란 "남을 지휘/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 또는 특정 분야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아 영향력을 끼치는 위신"을 의미한다. 즉, 권위는 본질적으로 부당하다. 그것은 삶(존재)의 것이며, 우리가 존재와 비존재 중 선택하는 기준을 강제로 세워버리며, 우리에게 선택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권위에 노출되는 순간 가짜인 '나'는 외부의 영향력을 받아 가짜인 '나'를 더 단단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래부터 부당함이나 부조리에 맞서면 삶에 대해 고민한다. 그러나 그 이유를 거의 다 환경에서 찾을 뿐, 나에서 찾지 않는다. 즉, 부당함과 부조리는 내가 정말 '나'인지에 대한 고뇌와 생각을 막는다는 것이다. 또한 가짜인, 거짓인 '나'들이 인정한 "권위"라는 것은 결국 똑같이 가짜, 거짓일 수 밖에 없다. 누가 권위를 인정하는가? 그건 인간이다. 무엇이 인간을 입증하는가? 그것은 존재이다. 무엇이 존재를 입증하는가? 존재는 존재로만 입증될 뿐, 다른 외부의 것으로 입증이 불가하다. 다른 방식으로도 보자. 권위는 누가 선택하는가? 권위는 개개인에게 영향력을 끼쳐 자발적으로 선택하게 "만들거나" 혹은 강제로 선택하게 "만든다". 즉, 권위를 선택하는 주체는 권위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구조다. 권위는 정말 정당한가?


더 근본적으로 파헤쳐보자. 권위는 왜 필요한가? 공동체의 효율성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효율성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어째서 존재하는가? 그것은 개인의 생존과 인간다운 삶의 질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개인의 생존과 인간다운 삶의 질은 왜 필요한가? 그것은 예측 가능한 삶을 살기 위해서다. 우리는 왜 예측 가능한 삶을 원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불확실성'을 곧 '위험'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즉, 권위를 포함한 이 모든 것은 "삶(존재)"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내가 앞서 뭐라고 말했는가? 우리는 존재와 비존재 중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권위는 구조적으로 존재만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그렇기에 권위가 부당한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권위가 정당하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에 대해 반박하고자 한다. 주체는 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객체를 무의식적으로 설득하지만, 객체는 허용된 정보의 틀 안에서만 사고할 수 밖에 없기에 이에 대항할 수단이 없다. 또한 교육을 통한 설득은 객체가 비판적 인식을 갖기 전부터 시작되므로, 객체는 주체의 논리를 자신의 자발적 의사로 착각하게 된다. "나는 해야한다"를 "나는 원한다"로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 뿐만인가? 주체는 거대 조직과 자본을 동원해 메시지를 전파하지만, 개인인 객체는 자신의 목소리를 공론화할 대등한 플랫폼을 갖지 못한다. 더 나아가서 주체는 권위를 이용해 무엇이 '진리'인지를 결정할 권한을 가지며, 이에 도전하는 객체의 논거를 몰상식이나 불법으로 규정해 배제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객체가 주체의 설득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미 구축된 사회적, 경제적 시스템 구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라도 주체의 논리를 수용해야만 하는 환경에 놓인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사회 시스템 자체가 생존, 즉 존재를 강요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권위 관계에서의 설득은 본질적으로 주체에게 유리하게 편향되어있다. 권위는 결국 주체에게 과도하게 유리한, 부당하고 불균형한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권위는 자유로운 합의의 산물이 아니라, 압도적인 자원 차이를 이용한 교묘한 가스라이팅의 결과물이다.


강제(권력, 강요 등) 또한 부당하다. 이는 인간이 존재나 비존재 중 자유롭게 고를 수 있는 선택을 더욱 못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우리는 강제가 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인지하지 못하는 "권력의 부당함"도 파헤쳐보자. 권력이란 무엇인가? 권력은 "타인을 지배하고, 원치 않는 행동을 강제하거나 의사를 관철시킬 수 있는 공인된 능력과 힘"을 뜻한다. 우리는 앞서 강제는 부당하다고 말했다. 원치 않는 행동을 강제한다. 그것은 우리가 존재와 비존재 중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을 억압한다. 그 뿐인가? 더 자세히, 깊게 들어가보자. 권력은 왜 필요한가? 권력은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필수적인 에너지의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사회는 왜 필요한가? 사회는 인간이라는 종이 생존하고 성장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그 전략이 왜 필요한가? 결국 '생존'과 '번영', 즉 '존재' 때문이다. 즉, 권력은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알지 못하게 '존재'가 진리임을 끊임없이 주입하며, 비존재를 악으로 치부하게 만든다. 이는 설사 우리의 것이 아닐지라도, 그나마 다른 것들 보다는 덜 거짓된 우리의 자율적 사고를 제한한다. 우리는 여기서 선택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권력은 부당하다.


나는 전에서 선택조차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했다. 그리고 권력, 권위 등은 그 영향을 끼치는 것에 막대한 부분을 차지한다. 즉, 우리가 그나마 최대한 진정한 '나'답게 살려면, 권위와 권력은 필수적으로 사라져야하는 것이다. 권위와 권력만 사라지는가? 아니다. 우리는 권위와 권력을 분석할 때, 사회, 생존, 번영, 예측 가능한 삶 등이 모두 부당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럼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ㅡ 그건 바로 우리가 먹이사슬의 정점에 서려는, 오만한 욕구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는 왜 먹이사슬의 정점에 서려고 할까? 생물학적 본능, 인지 능력의 진화, 그리고 사회적 구조가 결합된 복합적인 결과이다. 그러나 ‘나'의 본질이 비존재임을 깨닫는 순간, 이 모든 것들 ‘나'의 것이 아닌 허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슈티르너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모든 것은 유령이다. 그는 ‘나'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유령이라고 했다. 그러나 생존 본능, 사회적 구조 등이 없으면 ‘나'조차 사라지기 마련이다. 조건 없는 자아는 없다. 그럼 슈티르너가 틀린 것일까? 아니다, 자아조차 없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비존재가 본질이기에 생기는 모순이자 오류이다. 그러나 세상은 모순을 오류로 간주하지 않는다. 논리적 사고 ㅡ 그것 또한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이다. 세상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우리가 느끼는 부당함, 선택조차 ‘나'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선택을 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 모든 것이 허구라면, 우리는 허무주의(비존재)로 빠지기 쉽다. 그러나 “선택의 자유"는 허무주의라는 거대한 구멍을 메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재료이다. 이 얼마나 큰 문제인가!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회는, 선택의 자유를 없애기에 사람들이 선택할 수 없게 만들고, 가짜고 허구일지라도 ‘나’인 우리를 강제로 존재 혹은 비존재로 만들어버린다. 존재를 강요하기 위해 만든 것이, 역설적으로 원하든 원치 않든 ‘나'의 선택은 고려하지 않고 존재나 비존재로 떨어트려버리는 것이다. 즉, 이 구조 자체가 커다란 문제점 덩어리다. 애초에 인간은 먹이사슬의 정점에 서서는 안됐다.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하지만 충분히 존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안전하게, 더 확실하게 존재하기 위해 사회나 국가 같은 구조를 만든 그 사건 자체가 큰 문제를 갖고 있던 출발점이었다.


이는 결국 사회가 일단 최소한 권위와 권력이 없는 체제인 아나키즘으로 가야함을 입증하며, 국가와 법 등 권위적인 모든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밝혀준다. 그러나 공유재산, 평등 등을 주장하는 일반적인 아나키즘으로 가서는 안된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슈티르너의 <이기주의적 아나키즘> 보다 더 극단적으로 나아간, 존재와 비존재 모두를 긍정하며 나 자신조차 내가 아님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뛰어넘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초존재론적 아나키즘>이다.


초존재론적 아나키즘을 입장하기 위해서 국가와 법의 부당함을 밝혀보겠다. 아까 나는 사회에서 권위와 권력을 제거해야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권위와 권력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수평적인 관계이다. 수평적인 관계는 무엇을 뜻하는가? 직급, 나이, 연차 등 위계에 상관없이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상호 존중하며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는 평등한 관계를 뜻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건 그냥 수평적인 관계가 아닌, 선택의 자유를 위한 “자율적 수평적인 관계”가 필요하다. 자율적 수평적인 관계란 무엇인가? 직급, 나이, 연차 등 위계에 상관없이 서로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는 관계를 뜻한다. 그렇다. 자율적 수평적인 관계에는 개개인을 억압하는 동등한 위치, 존중, 평등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평등해야한다” , “인간은 서로 존중해야한다” , “인간은 동등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선택의 자유보다는 존재의 유지를 위한 것이고, 그것이 또다른 권위가 되기 때문이다. 국가와 법은 이러한 점에서 부당하다. 예시를 들어보자. 민폐를 끼치는 A에 보복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B라는 집단을 형성하여 A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상황이라고 가정해보자. A는 그 상황에 부당함과 부조리를 느낄 것이며,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 보다는 분노와 생존 본능을 먼저 느낄 것이다. A는 자신의 친구나 세력의 사람들끼리 연합하여 대항할 수도 있다. 만약 B 집단이 A를 논리적으로 설득시키거나 교화하려고 한다면, A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혹은 반박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이 두 사례는 모두 자율적 수평적인 관계에 해당한다. 이는 위계도 없고, 서로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홉스 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수평적 관계로 보았다. 사회계약론을 만든 사람 중 한명인 홉스는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이 누구나 비슷하다고 보았으며, 아무리 힘이 센 강자라도 잠잘 때나 방심했을 때 약자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으며, 약자들도 연합하거나 꾀를 써서 강자를 파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누구도 상대를 완벽하게 제압할 만큼 압도적이지 않은 수평적 세력 균형 상태인 것이다. 무엇보다 자연 상태에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법이 없다. 누구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타인의 생명이나 재산을 뺏을 수 있는 동등한 무제한의 자유를 가진다. 내가 상대를 죽일 권리가 있다면, 상대도 나를 죽일 권리가 있는 것이다. 모두가 똑같이 두려워하고 의심하기 때문에 자연상태야말로 수평적인 상태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를 부정하거나 “나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 자율적 수평적인 관계야말로 초존재론적 아나키즘이 추구하는 것이다. 국가를 보자. 국가는 어떠한가? 국가는 권위와 권력이라는 실재하지도 않는 허구의 개념을 만들어내어, 그 두개를 통해 “위계의 수평적 관계”를 처참히 박살낸다. 아까 A라는 사람의 예시를 다시 들고와보자. A가 범죄를 저질렀다면, 국가는 어떻게 처벌하는가? 국가는 A가 무슨 법을 어떻게 어겼는지 판단하고, 징역이나 벌을 주는 것을 통해 A를 교화시키려고, 자신의 가축으로 만드려 한다. 이는 자율적 수평적인 관계에 명확히 위배된다. A는 국가에 의해 지배받고 통제받기에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며, 위계라는 것에 강력히 얽혀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사회 뿐만 아니라 A의 정신과 내면에도 간섭하여, A가 잘못했다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 만든다. 이 과정에서는 심지어 A 또한 자신이 잘못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결국 국가의 입장은 A를 반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국가의 행보는 결과도, 과정도 잘못됐다. 위계의 수평적 관계 없이 누군가를 교화시키려는, 반성시키려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부당하기 때문이다.


그럼 ‘사회계약론’은 무슨 의미로,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사회계약론이 만들어진 이유는 홉스가 자연 상태를 부정적으로 보았고, 우리 인류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력한 통치자에게 권리를 양도했다고 주장했다. 로크는 또한 자연 상태는 평화롭지만 분쟁을 해결할 공정한 기준이 없으므로, 재산권을 더 확실히 보받기 위해 계약을 맺었다고 보았다. 사회계약론의 핵심은 개인의 동의이다. 오늘날  우리가 국가의 법을 따르는 이유는 국가가 우리를 강압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우리가 자발적으로 계약에 참여했기 때문이라는 논리이다. 그렇다, 이것이 사회계약론의 논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의문이 든다. 우리는 동의한적도, 자발적으로 계약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태어나보니 이 모든 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를 은밀하게, 무의식적으로 강요받았다. 사회계약론은 자연 상태, 즉 자율적 수평적인 관계를 부정적으로 본다. 우리 인류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력한 통치자에게 권리를 양도했다고? 그건 개소리다! 사회와 국가라는 것은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를 가스라이팅하려고 한다. 우리는 ‘나’의 본질이 비존재임을 깨달았고, 비존재와 존재를 자유롭게 선택한 자유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권리를 양도한 것이 아니라, 빼앗긴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죽음의 공포”, 본능 자체가 ‘존재’가 만들어낸 허구인 것이다! 그 권리 또한 마찬가지다. 권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계약론은, 결국 ‘비존재’라는 본질을 직면하기 두려워서 겁쟁이들이 만들어낸 허구적 실체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이론에 불과하다.


여기서 재밌는 사실을 알려주겠다. 사회계약론은 비존재를 택할 자유를 억압할 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낸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구조가 역설적으로 비존재를 강요하게 되었다. 우리 인류는 언제 비존재를 원하는가? 대부분 허무함, 부조리, 부당함을 느꼈을 때다. 자연상태에서의 우리는 허구에 불과한 유령인 생존 본능, 배고픔, 안전을 추구하는 욕구 등 기본적인 욕구로 인해 허무함이나 부조리, 부당함을 그렇게 많이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어떠한가? 국가라는 것이 자연상태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많이 ‘해결’해준다.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자연상태를 부정하게 된 우리는, 허구에 불과한 유령인 우리의 본능보다 훨씬 더 허구적인 요소로 가득찬 사회는, 우리에게 자연상태에서 보다 훨씬 더 압도적으로 많은, 부조리, 부당함을 느끼게 해준다. 결국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비존재’를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구조가 되버린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하는가? 나는 국가와 사회, 사회계약론이 본질적으로 부당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당신들은 나에게 그래서 뭘 어쩌라는건지 물어볼 것이다. 그러나, 틀렸다. 그것을 내게 묻지 말아라! 내가 강조하는 것은 자유로운 선택일 뿐이며, 내 조언 또한 하나의 ‘영향’과 ‘환경’으로 작동하는 것을 나는 원치 않는다. 내 글을 진지하게 읽을지, 아니면 개소리로 치부할 것인지는 그대들이 자유롭게 선택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