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유독 “육각형 남자”, “육각형 인재”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여기서 말하는 육각형이란 외모, 학벌, 직업, 소득, 성격, 집안, 사회성 등 여러 조건이 고르게 갖추어진 사람을 뜻한다. 겉으로만 보면 이것은 매우 합리적인 기준처럼 보인다. 누구나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고, 누구나 좋은 인재를 뽑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한국 사회의 육각형 인간 선호는 단순히 자기 만족이나 실질적 효용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핵심에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심리, 다시 말해 타인의 평가 앞에서 흠이 잡히지 않으려는 욕망이 강하게 깔려 있다.
결혼 상대를 고를 때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함께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은 성격, 생활습관, 대화 방식, 정서적 안정감, 경제관념, 위기 상황에서의 태도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거기에 더해 “남들이 어떻게 볼까”라는 기준이 강하게 개입한다.
학벌이 낮으면 부모가 뭐라 하지 않을까.
직장이 애매하면 친구들이 무시하지 않을까.
키가 작으면 비교당하지 않을까.
집안이 평범하면 체면이 서지 않지 않을까.
외모가 부족하면 “왜 저런 사람을 만나?”라는 말을 듣지 않을까.
이런 걱정들이 개인의 선택을 압박한다. 결국 배우자 선택은 자기 삶의 선택이라기보다, 남들에게 제출하는 일종의 사회적 포트폴리오가 된다.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한다”보다 “이 사람 정도면 남들에게 설명 가능하다”가 더 중요해지는 것이다.
회사에서 말하는 육각형 인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 조직에는 다양한 유형의 사람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말은 서툴지만 실무를 잘하고, 어떤 사람은 사회성은 부족하지만 깊이 파고드는 능력이 있다. 어떤 사람은 스펙은 평범하지만 책임감이 강하고, 어떤 사람은 다소 튀지만 창의적이다. 현실의 인간은 저마다 장단점이 다르며, 조직 역시 그런 차이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 조직문화에서는 특이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사람보다, 어디에 내놔도 욕먹지 않을 무난한 사람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뽑았을 때 실패하더라도 “그래도 스펙은 괜찮았잖아”, “그래도 무난한 사람이었잖아”라고 변명할 수 있다. 반대로 뾰족한 장점은 있지만 흠도 있는 사람을 뽑았다가 실패하면, 선택한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므로 육각형 인재 선호는 순수한 능력주의라기보다, 어느 정도는 평판 회피주의에 가깝다. 능력을 제대로 보려는 태도라기보다, 남들이 봤을 때 흠잡기 어려운 선택지를 고르려는 태도다.
이런 사회에서는 질문의 순서가 뒤바뀐다.
“이 사람이 정말 나에게 맞는가?”
“이 사람이 정말 이 일에 적합한가?”
“이 사람의 장점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보다,
“남들이 봤을 때 흠잡을 데가 있는가?”
“내가 이 선택으로 욕먹을 가능성이 있는가?”
“이 사람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당당히 보여줄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이 앞선다.
결국 한국식 육각형 인간 집착은 행복의 기준이라기보다 체면의 기준이다. 사랑의 기준이라기보다 전시의 기준이고, 능력의 기준이라기보다 방어 가능한 선택의 기준이다.
이것은 한국 사회에서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아파트, 좋은 차가 소비되는 방식과도 연결된다. 물론 그런 것들은 실제 효용도 있다. 좋은 대학은 기회를 넓혀주고, 좋은 직장은 안정성을 주며, 좋은 집은 삶의 질을 높여준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것들이 단순한 효용을 넘어 사회적 방패가 된다.
“봐라, 나는 이 정도 사람을 만난다.”
“봐라, 우리 자식은 이 정도다.”
“봐라, 우리 회사는 이런 사람을 뽑았다.”
“봐라, 나는 흠잡힐 만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
이런 식의 증명 욕구가 작동한다. 그래서 한국 사회의 많은 선택은 자기 만족을 위한 선택이라기보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 된다.
문제는 인간이 원래 육각형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은 모두 어딘가 부족하다. 어떤 사람은 똑똑하지만 예민하고, 어떤 사람은 성실하지만 재미가 없고, 어떤 사람은 돈은 적게 벌지만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어떤 사람은 스펙은 낮지만 삶의 감각이 좋다. 인간은 원래 불균형하고, 그 불균형 속에서 개성이 생긴다.
그런데 한국식 시선은 이 불균형을 잘 견디지 못한다. 장점을 크게 보기보다 흠을 먼저 찾는다. “무엇을 잘하는가”보다 “어디가 부족한가”를 먼저 본다. 그래서 사람을 평가할 때도 장점의 깊이보다 결점의 유무가 더 중요해진다.
이런 문화는 결국 사람을 사랑하거나 이해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람을 상품처럼 감정하는 방식에 가깝다. “좋은 사람인가?”보다 “어디 가서 창피하지 않는가?”가 먼저 온다. “나와 맞는가?”보다 “남에게 보여줬을 때 괜찮은가?”가 먼저 온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육각형 남자, 육각형 인재를 찾는 현상은 단순한 이상형 추구가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이 개인의 욕망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나타나는 방어적 선택이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남들 앞에 내놓을 수 있는 하자 없는 물건처럼 보는 태도다.
결국 이 사회가 찾는 것은 진짜 좋은 사람이라기보다, 남에게 보여줬을 때 흠잡히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한국식 육각형 인간 집착은 개인의 행복보다 체면을 우선하는 문화의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개념글
잘읽었다. 읽다보니 사회에서 체면 문화가 얼마나 뿌리깊게 자리잡았는지 보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