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고 타락한 인간들과 대화할 바에야 혼잣말 하는 게 낫다. 마치 무지한 나쁜 배우자와 결혼 생활을 하느니 독신이 나은 것처럼."
인간과의 관계는 그 자체로 선(善)이 아니며, 관계의 부재가 잘못된 관계보다 분명히 우월할 수 있다.
나쁜 상호작용은 빈자리보다 못하다.
현대 사회는 인간 상호작용을 거의 무조건적인 선으로 간주한다. 외로움은 병리화되고 사교성은 미덕으로 칭송되며
'연결되어 있음'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상태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전제는 대화하는 상대의 질(quality)을 묻지 않는다.
마치 음식이라면 무엇이든 먹는 게 굶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부패한 음식을 먹으면 식중독에 걸리고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
나쁜 대화는 단순히 얻는 것이 없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적극적으로 빼앗는다. 거짓을 듣는 동안 사고는 그 거짓을 처리하고 반박하느라
소모되며 어리석은 단언을 거듭 듣는 동안 분별 감각은 무뎌지고 악의적인 말은 진실을 왜곡하고 정당한 확신도 뒤흔든다.
잘못된 동반자와 보낸 시간은 그 시간만큼 잃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 곱하기 회복에 드는 시간만큼 잃는 것이다.
빈자리는 무(無)이지만, 잘못된 자리는 음(陰)이다.
한편 혼잣말 내지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는 오랫동안 격하되어 왔으나 그 가치는 결코 작지 않다.
쇼펜하우어는 "사람은 오직 혼자 있을 때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일 수 있다"고 썼다. 고독 속에서는 타인의 어리석음에 맞추어
자기 정신을 낮출 필요가 없고 비위를 맞추기 위해 거짓을 말할 필요도 없으며 침묵을 견디지 못해 무의미한 소음을 만들어낼 필요도 없다.
진지한 사색은 군중 속에서 자라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과의 대화가 끊이지 않는 사람의 내부에서만 자란다.
자기 자신과 대화할 줄 아는 사람은 사실 가장 풍부한 대화 상대를 가진 사람이다. 그는 침묵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빈 시간을 채우기 위해 아무에게나 매달리지 않는다.
이 통찰은 동서양의 사상 전통에 일관되게 등장한다. 법구경(法句經) 은 분명히 말한다
"지혜롭고 사려 깊은 도반을 만날 수 없거든 정복한 왕국을 떠나는 왕처럼, 혹은 숲속의 외로운 코끼리처럼, 차라리 홀로 가라."
인용문과 거의 같은 구조의 가르침이 2500년 전에 이미 명문화되어 있었다.
공자는 익자삼우(益者三友)와 손자삼우(損者三友)를 나누어 어떤 벗은 단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해롭다고 가르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을 효용, 쾌락, 덕 셋으로 구분하며, 오직 덕에 기반한 우정만이 참된 우정이라고 했다.
나머지 둘은 시간을 보내는 한 방식일 뿐이며 잘못 선택될 경우 시간을 죽이는 방식이 된다. 그노시스 전통의 은수자들과 인도의 사두들이
인적이 끊긴 곳으로 들어간 것은 인간 혐오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인간들의 무리가 진리를 향한 길을 가로막는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결혼은 단순히 '좋은 결혼이 아닌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손상이다.
매일의 무지에 노출되는 것, 매일의 악의에 적응해야 하는 것, 자기 정신이 매일 조금씩 상대의 수준으로 끌려 내려가는 것
이것은 빈자리보다 훨씬 못한 자리다. 같은 논리가 일상의 모든 대화에 적용된다. 강도가 낮을 뿐 구조는 동일하다.
매일 한 시간씩 무지하고 악의적인 말에 노출된 사람은 1년 뒤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관계의 양은 미덕이 아니다. 미덕은 분별에 있다. 빈 시간을 두려워하여 아무나 하고 어울리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을 잃는다.
자기 자신을 잃은 사람은 좋은 관계를 맺을 능력마저 잃는다. 역설적이게도 혼자 있을 줄 아는 사람만이 함께 있을 자격이 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자기 존중이다. 자신의 시간과 정신을 존중하는 사람은 그것을 누구에게 내어줄지 신중해진다.
그리고 신중함이 마땅한 상대를 발견하지 못할 때 그는 자신과 함께 있는 법을 안다.
그리고 그것은 결핍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충만함이다.
굿굿
이건꼭백여섯살이라는김형석글쯤은되지않을까해상당하네
ㄹㅇ 뭔가 혼자있는것 = 찐따 뭐 이런 줄비찬 공식들이 다니는데 그들한테 묻고싶다 혼자인게 왜 그리 나쁜것인지? 막상 그들도 질문 받게되면 앵무새처럼 단순한 답만 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