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라이트]
(실화 기반 제작)
"이거 그린라이트냐?"
4월의 어느 봄날, 그날도 단체메시지에 수노는 질문을 보냈다. 낮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었을까. 그는 설레는 마음으로 친구들의 답장을 기다렸다.
"겠냐 이 병신 같은 년아."
역시나 친구들의 반응은 거칠었다.
'뭐,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개연성은 없는 건가..'
하지만 수노는 어렴풋이 믿고 있었다. 이번 일은 다를 것이다. 일말의 희망을 안은 채 그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녀의 미소가 머릿 속에서 계속해서 맴돌았다. 수염 난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로 흐릿하게 떠올려본다. 그날의 행복했던 기억.
해가 따뜻하게 세상을 비추고 가벼운 남풍과 풀잎의 그림자가 서늘하게 감싸안는 오전이었다. 교실에서 수학 숙제를 하고 있던 수노는 복도에서 들리는 과격한 소리와 수근거림에 문을 열어 나가보았다. 군중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본 광경은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아, 또인가
여느때처럼 둘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특유의 격투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만의 규칙과 동작으로 재편한 놀이인듯했다. 사마귀같은 자세로 팔을 올리고 있는 녀석의 이름은 조재성. 특수반에 속한 아이다. 특별한 하자가 있는 학생들이 가는 곳이었지만, 수노에게는 그닥 비정상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장풍을 쏘는 듯한 자세로 기술 이름을 외치고 있는 녀석은 곽서진. 특수반은 아니지만 그에 못지 않은 비정상적인 모습을 자주 보이곤 한다. 이 둘은 수노가 3학년에 올라오면서 새로 사귄 친구들이다. 주변에서의 평판이 그리 좋진 못하지만, 뭐. 또 그렇게 나쁜 애들은 아니다. 무엇보다 수노가 이들과 친구를 하는 데에는 중요한 점이 있다. 그는 사람을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것.
'전교적 병신'
'지역급 찐따'
'철학갤러리 호감고닉 "치볼랑" '
그의 사회적 지위를 설명하는 데에는 사람들이 그를 부르는 이 세가지 별명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뭐, 서론이 길었다만 그렇게 그들의 엽기적인 쇼가 끝나고 관중들은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그때, 옆에 있던 김광연-아마 교내에서 이진 정도의 급인 듯하다-이 언제나처럼 말을 걸어왔다.
"이야~네 친구들은 오늘도 열심히네~.이번주는 좀 씼었어?"
아 역시나 나를 보고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다. 녀석은 꼭 나한테 꼽을 줘야 속이 풀리는 듯하다. 대충 무시한 후 다시 반에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아 연재는 오늘도 참 예쁘네. 화장도 잘 된 거 같다.'
옆자리 연재는 수노가 짝사랑하고 있는 여자애다. 상냥하진 않지만 화장을 지우면 드러나는 귀여운 얼굴이 매력적이다. 언젠간 그녀도 본인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까 생각하며 오전을 보내다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그는 점심시간이 싫었다. 아니, 다시 말하자면 점심시간에 지나는 복도가 싫었다. 점심시간에는 모두가 복도로 나와 이동한다. 수노와 친구 둘도 마찬가지다. 그럴 때면 인파 속 수많은 이들의 비웃음과 특히 여학우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견디는 게 힘들었다. 익숙해졌나 싶지만, 여전히 기분이 좋진 않다. 특별하진 않은 식사를 마치고 친구 둘과 운동장 근처에 있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자애들에 관한 얘기였다. 이럴 때면 관심은 수노에게 집중되곤 했다. 그에게는 짝사랑하는 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연재와 그녀의 친구들이 그들의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그 즉시 하던 얘기를 멈추고 그들은 서로를 응시했다. 그들 사이에 흐른 3초의 정적 끝에 수노는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앞에 있는 그녀를 찍으려고 했다. 지금이라면 가능하다. 셀카를 찍는 척하면서 그녀를 담을 수 있다. 이것만 성공한다면...
"수노야 지금 사진찍는 거야?!?"
젠장, 조재성 녀석 때문에 망했다. 이건 기회였는데...!
예비종이 울렸다. 벤치에 있던 학생들도 일어나 교실을 향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돌아가려던 그 순간,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아아 윤슬같은 눈동자, 앵두같은 입술에서 일어난 찰나의 그 작은 움직임은 한 남자의 심장을 멈춰버릴 정도로 창대했다. 그렇다. 그는 보았다. 그녀의 순백한 얼굴에서 피어난 꽃을. 순간 저 태양보다 빛나던 그 미소를....!!
연재가 나를 향해 웃어주다니...!! 이건 분명 나를 향한 미소였어!! 수노는 그 상황이 믿겨지지 않았지만 급히 정신을 차리고 어색하고 수줍은 미소를 돌려주었다. 그 짧은 순간을 몇번이고 떠올리며 수노는 꿀같은 잠에 들었다.
다음 날, 등굣길에도 여전히 그는 그 생각 뿐이었다. 여학우에게서 따뜻한 위로의 문자를 받았을 때도, 말같지도 않던 장난에 웃어주었을 때도, 배고플 떄 간식을 나눠주었을 때도 생각했다. 이것은 그린라이트라고.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달랐다. 온 우주가 그에게 신호를 보내는 듯했다. 이번엔 가능성이 있다고, 드디어 연애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오후 내내 그는 지난번에 실패했던 스토킹 계획을 재구상했다. 종래에는 재성의 꾸준한 하굣길 개입으로 연재를 스토킹 하는 데에 불편함이 있었다. 그는 재성이가 공교롭게도 학교에 오지 않은 오늘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는 연재의 하굣길을 따라갔다.
그렇게 3일 정도를 스토킹 할 때 쯤 그는 무언가 잘못됨을 느꼈다. 유난히 고요한 거리, 유난히 한가한 도로, 그와 대비되는 그녀의 급한 발걸음. 불길함을 인지한 채 골목길을 들어섰다.
"쿵"
무언가 크고 단단한 사내같은 몸에 부딛힌 듯 했다.
"넌 뭐냐??뭔데 연재를 따라오는 거냐?"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사내의 묵직한 주먹이 그의 뺨을 강타했다.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그 누구도 없었다. 골목에 피가 튀긴 채로 몸은 쓰러졌다. 어디서부터였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난 어째서 피범벅이 된 몸뚱아리로 이 차가운 거리에 누워있는가. 그걸 모르는 게 문제일까. 정상인이 될 수는 없었을까. 모르겠다.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었다. 일어설 수 없었다. 희미하게 깨달았다.
애초에 난 이 세상에 서 있지 않았다. 차가운 바닥에 누워있었다. 초라하기 짝이 없게. 세상은 이미 나를 강타했었다. 나는 애초부터 피범벅이었다. 그저 이제야 그 붉은 피가 눈에 보일 뿐이었다.
고요한 도로 옆에 쓰러진 몸뚱아리는 더 이상 눈을 뜰 힘조차 없었다. 꺼져가는 시야, 텅빈 도로 위 떠있는 신호등. 그 녹색 불빛마저 붉게 물들었다.
글쎄. 시야가 피로 물든 건지, 애초에 녹색불빛 따윈 없었는지. 사실 잘 알 수 없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