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 코끼리를 말뚝에 묶어놓으면, 처음에는 그 말뚝에서 벗어나려고 애쓴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힘이 약하기 때문에 결국 벗어나지 못하고 포기한다. 시간이 지나 성체가 되면 그 정도 말뚝은 충분히 뽑아버릴 수 있지만, 어린 시절의 실패 경험 때문에 더 이상 시도하지 않는다. 자신이 벗어날 수 없다고 믿게 된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어떤 부당함에 저항할 수 있음에도, 오래전부터 “저항해도 소용없다”거나 “저항하면 오히려 내가 손해 본다”고 배워온 사람은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



나는 한국에서 갑질이 많이 발생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회에서 특정 소수에게만 드물게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 다수에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개인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연쇄살인 같은 범죄는 극소수 개인에게서 발생하는 예외적 현상에 가깝다. 물론 그 역시 사회적 배경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기본적으로는 특정 개인의 병리와 범죄성에 더 큰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반면 어떤 현상이 특정 사회에서 반복적이고 광범위하게 나타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경제가 파탄 난 나라에서 생계형 범죄나 성매매가 늘어나는 현상, 국가 기능이 무너진 지역에서 해적이나 무장 집단이 생겨나는 현상은 단순히 개인의 게으름이나 도덕성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런 경우에는 개인의 선택 뒤에 놓인 사회적 조건을 함께 봐야 한다.



한국의 갑질도 마찬가지다.



물론 갑질이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나라에나 권력관계는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일은 발생한다. 그러나 문제는 정도와 빈도다. 한국에서는 직장, 군대, 학교, 가족, 서비스업, 공공기관 등 여러 영역에서 갑질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대한항공 땅콩회항 사건, 아시아나항공의 회장 찬양 강요 논란, 양진호 회장의 직원 폭행 사건, 택시기사 폭행 사건, 응급구조사 폭행 사건 등은 모두 한국 사회에서 갑질이 단순한 예외적 일탈이 아니라 반복되는 사회적 문제임을 보여준다.



당연히 뉴스에 나오지 않는 사례는 훨씬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갑질은 몇몇 나쁜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 안에서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는 구조적 문제로 봐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갑질을 한 개인의 책임이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다. 잘못한 사람은 당연히 처벌받아야 한다. 그러나 처벌만으로 끝나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사회적 문제는 개인 몇 명을 처벌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왜 그런 일이 반복되는지, 왜 주변 사람들은 쉽게 저항하지 못하는지, 왜 피해자는 침묵하게 되는지를 분석해야 한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이런 분석을 두고 “사회 탓”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사회적 원인을 찾는 것은 개인의 책임을 지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한 과정이다. 원인을 분석하지 않고 금지와 처벌만 반복하면, 같은 문제는 다른 모습으로 계속 나타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갑질은 왜 이렇게 쉽게 발생할까.



나는 그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어릴 때부터 주입되는 학습된 무력감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어릴 때부터 부당함에 저항하는 법보다, 윗사람에게 순응하는 법을 먼저 배운다. 초등학교나 유치원에서도 아이들이 싸우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따지기보다, “둘 다 잘못했다”는 식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누가 먼저 괴롭혔는지, 누가 정당하게 항의했는지보다 “시끄럽게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다.



이런 문화에서는 정의보다 질서가 우선된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사람보다, 조용히 참는 사람이 더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이라기보다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취급된다.



내부고발자에 대한 시선도 비슷하다. 한국 사회에서는 조직 내부의 부당함을 고발한 사람을 보호하기보다, “왜 굳이 일을 크게 만드느냐”, “조직을 배신한 것 아니냐”, “윗사람이 잘못 좀 했다고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식으로 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역시 옳고 그름보다 관계와 위계를 먼저 보는 사고방식이다.



한국에서는 어린이가 어른에게 반박하는 것도 쉽게 “말대꾸”로 취급된다. 물론 어느 사회든 무례한 태도는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어의 “말대꾸”나 “버릇없다”는 표현은 단순히 말투가 나쁘다는 뜻을 넘어,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반박했다는 위계 위반의 의미를 강하게 담고 있다.



문제는 그 반박의 내용이 옳은지 틀린지보다, 누가 누구에게 말했는지가 더 중요하게 다뤄진다는 점이다. 아이가 아무리 합리적인 말을 해도, “어린 것이 어디서 말대꾸냐”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아이는 일정한 잘못을 떠안게 된다. 그러면 아이는 배운다.



부당해도 참아야 한다.

윗사람에게 반박하면 내가 손해 본다.

옳은 말을 해도 분위기를 깨면 나쁜 사람이 된다.

문제를 제기하면 문제를 만든 사람이 된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사람은 점점 저항하지 않게 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해도 말하지 않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참고, 남이 당하는 것을 봐도 끼어들지 않는다. 어릴 때 말뚝에 묶인 코끼리처럼, 실제로는 벗어날 힘이 생겼는데도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갑질은 바로 이런 환경에서 자란다.



갑질을 하는 사람은 상대가 쉽게 저항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피해자는 저항하면 더 큰 손해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변 사람들은 괜히 끼어들었다가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봐 침묵한다. 조직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조용히 덮으려 한다. 그렇게 가해자는 점점 더 대담해지고, 피해자는 점점 더 무력해진다.



그러므로 한국의 갑질은 단순히 가해자의 인성이 나빠서만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가해자의 책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가해자가 권력을 함부로 써도 된다고 배우고, 피해자는 저항해도 소용없다고 배우며, 주변인은 침묵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배우는 사회적 구조가 있다.



다시 말해 한국의 갑질은 학습된 무력감과 학습된 지배감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어린 사람에게는 순종을 가르치고, 아랫사람에게는 침묵을 요구하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에게는 분란을 만든다는 낙인을 찍는 사회에서는 갑질이 사라지기 어렵다. 갑질을 없애려면 처벌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부당함에 저항하는 것을 “버릇없음”이나 “분란”이 아니라 정당한 권리로 인정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결국 갑질을 줄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순한 예절 교육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사람들에게 부당함을 구분하고, 정당하게 항의하고, 권력 앞에서도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는 훈련을 시켜야 한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순응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칭찬해왔다. 하지만 순응만 배운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쉽게 괴물이 된다.



갑질은 갑자기 튀어나온 괴물이 아니다.



부당함 앞에서 침묵하도록 훈련된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