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문재인 전 대통령이 평양에서 북한의 집단체조 공연을 관람한 일이 있었다. 흔히 아리랑 공연으로 알려진 북한식 대규모 집단 공연은 수많은 인원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움직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공연 영상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예상 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완벽하게 대열을 맞추고, 표정과 동작까지 통제된 듯한 모습을 보며 많은 외국인들은 아동 학대나 강제 훈련을 우려했다. 나 역시 그런 반응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어린아이가 저 정도 수준의 집단 동작을 하려면 그 뒤에 얼마나 긴 훈련과 압박, 꾸중과 처벌이 있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반응도 있었다. 일부 사람들은 그 장면을 보며 “어린아이들을 저렇게 훈련시킬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칭찬했다. 나는 이 반응이 매우 불편했다. 그들이 본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몸과 시간과 감정이 어떤 식으로 동원되었는지는 보지 않고, 오직 완성된 질서와 장관만을 본 것이다.
더 놀라웠던 것은 자신을 탈북민이라고 소개하며, 과거 다른 아리랑 공연에 참가한 경험이 있다고 주장한 사람의 반응이었다. 그는 그 훈련 과정이 즐거웠고 좋은 추억이었다고 말했다. 물론 개인의 기억은 복잡할 수 있다. 억압적인 환경 속에서도 친구가 있었을 수 있고, 무대에 선 성취감이 있었을 수 있으며, 당시에는 그것을 영광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다른 탈북자가 그에게 “너는 그런 가혹행위가 즐거웠냐”고 비판하자, 그는 “네가 못해서 욕먹었으니 그런 것 아니냐”는 식으로 대꾸했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그 말은 단순히 “나는 좋은 기억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폭력적인 구조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을 개인의 무능으로 돌리는 말이다. 어떤 체계가 아이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키고, 실수한 아이에게 모욕이나 처벌을 주었다면 문제는 그 체계에 있다. 그런데 그는 그 문제를 “네가 못해서 혼난 것”으로 바꾸어버렸다. 즉 폭력의 책임을 가해 구조가 아니라 피해자에게 떠넘긴 것이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며 남북한이 소름끼치도록 유사하다고 느꼈다.
물론 남한과 북한은 제도적으로 전혀 다르다.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이고, 북한은 전체주의 국가다. 선거, 언론, 이동의 자유, 사유재산, 표현의 자유 등에서 둘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다. 그러나 제도의 차이와 별개로, 사람을 바라보는 어떤 문화적 감각에서는 닮은 부분이 있다.
한국에서도 부조리를 겪은 사람들이 그것을 “좋은 추억”이라고 포장하는 경우가 많다. 군대에서 맞고 갈굼당한 경험, 학교에서 체벌당한 경험, 운동부에서 폭력을 견딘 경험, 직장에서 선배에게 모욕당한 경험을 두고 “지나고 보니 다 추억이다”, “그때 그렇게 배워서 사람이 됐다”, “요즘 애들은 너무 나약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정말 좋은 추억이라면, 왜 그 추억은 항상 약자의 고통 위에 세워져 있는가?
그들이 말하는 좋은 추억은 대개 자유로운 관계에서 생긴 추억이 아니다. 상급자가 하급자를 통제하고, 선배가 후배를 누르고, 교사가 학생을 때리고, 고참이 신병을 괴롭히는 구조 속에서 만들어진 기억이다. 시간이 지나 고통의 날카로움이 무뎌졌을 뿐, 그 구조가 정당했던 것은 아니다.
사람은 자신이 겪은 고통을 무의미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래서 종종 그 고통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때 힘들었지만 나를 성장시켰다”고 생각해야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자신이 견딘 고통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사람도 같은 고통을 견뎌야 한다고 요구하는 순간 그것은 자기 위안이 아니라 폭력의 재생산이 된다.
“나는 버텼는데 너는 왜 못 버티냐.”
“나는 좋은 추억인데 너는 왜 불평하냐.”
“네가 적응을 못한 것 아니냐.”
“그 정도도 못 견디면 사회생활 못 한다.”
이런 말들은 북한의 집단체조 훈련을 두고 “못해서 욕먹은 것 아니냐”고 말하는 태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특히 한국에서 우파라고 하는 사람들 중 일부에게 이런 경향이 강하게 보일 때가 있다. 그들은 북한을 극도로 혐오하고, 북한 체제를 비난한다. 그런데 정작 인간을 다루는 방식에서는 북한과 비슷한 감각을 드러낸다. 군대식 질서, 상명하복, 집단을 위한 개인의 희생, 강한 훈육, 고통을 통한 인간 개조, 조직에 대한 절대적 충성 같은 것들을 긍정적으로 본다.
그들은 북한의 사상은 싫어하지만, 북한식 인간관에는 묘하게 끌리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큰 모순이다. 북한을 비판하려면 단순히 김정은이나 공산주의만 비판해서는 안 된다. 인간을 집단의 부품으로 보고, 개인의 고통을 질서와 성과라는 이름으로 덮어버리는 사고방식 자체를 비판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일부 사람들은 북한을 욕하면서도, 바로 그 북한적 사고방식을 자기 안에 품고 있다.
아이들이 완벽하게 움직이는 장면을 보며 감탄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한다.
저 아이들은 정말 원해서 저 자리에 섰는가?
실수하면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훈련 과정에서 울거나 다친 아이들은 없었는가?
저 질서는 아이들의 행복보다 중요한가?
한국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군대의 질서, 학교의 성적, 회사의 성과, 가족의 체면, 조직의 명예를 말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누가 고통받았는가?
그 고통은 정말 필요했는가?
약자가 거부할 자유가 있었는가?
나중에 “추억”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당시의 폭력이 사라지는가?
나는 부조리를 겪은 사람이 그 경험을 개인적으로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는 것까지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과거를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자기에게 좋은 추억이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고통까지 부정해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그 고통을 비판하는 사람에게 “네가 못해서 그렇다”고 말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라 폭력 구조의 대변자가 된다.
남북한의 무서운 공통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개인을 개인으로 보지 않고, 집단을 위해 훈련되고 배열되어야 할 존재로 본다. 고통을 고통으로 인정하지 않고, 성장과 추억과 단련으로 포장한다. 부조리에 적응한 사람을 성숙한 사람으로 보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을 나약한 사람으로 몰아간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정말 위험한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의 집단체조를 보며 느껴야 할 것은 “저렇게까지 훈련시키다니 대단하다”가 아니다. “저런 장관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의 자유와 감정이 희생되었을까”여야 한다. 그리고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돌아볼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겪은 고통이 추억이 되었다고 해서, 그 고통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진짜 성숙한 사회는 사람을 잘 참고 견디게 만드는 사회가 아니다.
고통을 겪은 사람이 “나도 당했으니 너도 당해라”고 말하는 사회도 아니다.
진짜 성숙한 사회는 누군가가 “그건 부당했다”고 말했을 때, “네가 약해서 그런 것”이라고 조롱하지 않고, “그렇다면 그런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게 하자”고 말할 수 있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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