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 무엇인가? 내가 터키를 여행하면서 가장 즐거웠던 기억 중 하나는 다양한 과일과 견과류를 맛보는 일이었다. 터키는 과일 값이 무척 싸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안탈리아의 재래시장에서 7천 원, 당시 50리라어치 오렌지를 달라고 했다가 생각보다 엄청난 양의 오렌지를 받은 것이다. 오렌지 1kg이 고작 600원 정도였는데, 나는 그렇게까지 쌀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말라티아의 말린 살구, 가지안텝의 피스타치오도 한국에 비하면 매우 저렴했고 품질도 훌륭했다. 그리고 한국인에게는 다소 낯선 과일도 맛보게 되었는데, 바로 대추야자였다. 사실 나는 독일에서도 터키인이나 시리아인이 운영하는 가게에 자주 갔기 때문에 대추야자를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직접 사 먹어 본 것은 터키가 처음이었다. 독일에서는 꽤 비싸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지만, 터키에서는 독일에 비하면 말도 안 되게 저렴했기 때문이다. 먹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말린 대추야자는 정말 엄청나게 달다. 처음 먹었을 때 나는 이것이 과일이 아니라 설탕에 절인 가공식품인 줄 알았다. 두세 개만 먹어도 질릴 정도로 단맛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은 인위적으로 첨가한 단맛이 아니라 대추야자 자체가 가진 당도라고 한다. 대추야자의 당도는 대략 60브릭스 이상으로 이야기되는데, 사과가 보통 10브릭스대 초반, 포도가 10브릭스대 후반, 수박이 10브릭스 안팎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차원이 다른 수준이다. 거기에 말리기까지 했으니 단맛이 얼마나 강할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18브릭스짜리 포도를 말린 건포도도 많이 먹으면 너무 달아서 금방 질리지 않는가? 나는 대추야자의 끔찍할 정도로 강한 단맛을 경험하면서, 과일은 단순히 달다고 해서 맛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과일에는 각자의 개성이 있다. 대추야자가 많이 나는 중동과 터키에서도 대추야자는 인기 있는 과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도가 훨씬 낮은 다른 과일들이 외면받는 것은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아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도 포도보다 당도가 낮은 수박, 참외, 딸기 같은 과일들이 많은 사랑을 받지 않는가? 결국 과일이라는 것은 단순히 당도라는 숫자만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 과일이 가진 고유의 향과 맛, 식감, 계절감 때문에 과일을 먹는다. 당도는 그 향과 맛과 어우러질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단맛만 강하다고 해서 좋은 과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사과, 복숭아, 딸기, 포도, 수박이라는 이름으로 과일을 구분하지 않고, 오로지 “몇 브릭스짜리 과일인가”라는 기준으로만 과일의 가치를 평가한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당도가 낮은 대부분의 과일은 도태될 것이다. 터키에서는 대추야자 같은 과일만 살아남을 것이고, 대추야자가 자랄 수 없는 지역에서는 그 지역에서 자랄 수 있는 가장 당도 높은 과일 하나가 모든 과일을 대체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전 인류에게 매우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 여름에 먹는 시원한 수박도, 봄의 딸기도, 새콤한 귤도, 향긋한 복숭아도 사라지고 오로지 단맛이 강한 한 종류의 과일만 시장을 점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에서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어리석지 않다. 아무리 당도가 높아도 대추야자가 수박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수박은 수박의 자리에서, 딸기는 딸기의 자리에서, 포도는 포도의 자리에서 가치가 있다. 하다못해 과일도 하나의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는데, 인간은 어떨까? 그리고 인간들이 모여 만든 국가와 사회는 어떨까? 일개 숫자 하나만으로 인간과 국가를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는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다. 여름에 먹는 시원한 수박이 대추야자보다 당도는 낮아도 어떤 순간에는 훨씬 맛있을 수 있듯이, 소득이 낮은 국가라고 해서 반드시 덜 매력적인 나라인 것은 아니다. 성적이 낮은 학생이라고 해서 성적이 높은 학생보다 반드시 덜 훌륭한 인간인 것도 아니다. 인간은 일정한 기준에 맞춰 산출된 숫자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고유의 개성과 삶의 방식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그 숫자가 낮더라도, 법을 어기지 않고 타인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모두가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숫자는 어느 한 분야에서의 참고 자료일 뿐이다. 숫자로 사람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습관이다. 그런데 과연 한국인들은 한국 사회에서 숫자가 아닌 자신의 개성으로 평가받아 왔을까? 나는 한국만큼 숫자와 순위를 좋아하는 사회를 많이 보지 못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부터 한국인들은 성적이라는 숫자로 끊임없이 평가받는다. 단순한 점수만으로는 부족해서 표준점수, 등급, 백분위, 석차까지 상세하게 매겨진다. 학생은 어느새 한 명의 인간이 아니라 “몇 등급짜리 학생”, “전교 몇 등 하는 학생”, “모의고사 평균 몇 등급을 받는 학생”으로 불린다. 물론 성적이 아예 의미 없다는 말은 아니다. 어떤 분야에서는 성취를 측정하기 위한 기준이 필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숫자가 참고 자료를 넘어 인간 전체의 가치처럼 취급된다는 데 있다. 등수가 높거나 평균 등급이 좋은 학생은 우수한 학생으로 여겨지고, 그렇지 못한 학생은 자연스럽게 뒤처진 학생으로 분류된다. 그 학생이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 어떤 재능이 있는지, 어떤 삶의 태도를 가졌는지는 별로 고려되지 않는다. 사회에 나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연봉이 얼마인지, 어느 회사에 다니는지, 얼마나 비싼 아파트에 사는지, 부모의 재산이 얼마인지 같은 숫자들이 사람의 정체성을 대신한다. 한국인들은 자주 숫자에 기반하여 자신을 설명하고, 다른 사람을 평가한다. 가끔 뉴스에서 특정 회사의 평균 연봉이 얼마라는 식의 기사가 전국민에게 소비되는 것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그리고 도대체 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야 하는가? 물론 어느 나라에나 연봉 정보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정보가 지나치게 쉽게 비교와 서열화의 재료가 된다. 인터넷 랭킹뉴스에 대기업 연봉 기사가 오르고, 댓글에서는 자신의 연봉이 더 높다며 자랑하는 사람과 그것을 보고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함께 나타난다. 대체 왜 이런 일을 반복하는 것일까? 다른 사람이 나보다 연봉이 높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더 행복한 것도 아니고, 더 훌륭한 존재라는 보장도 없다. 연봉은 그 사람의 삶을 설명하는 수많은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에서는 그 숫자 하나가 사람의 우열을 가르는 기준처럼 작동할 때가 많다.


국가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도 비슷하다. 나는 한국만큼 국가의 ‘숫자’에 민감한 사람들을 많이 보지 못했다. 한국이 이탈리아의 1인당 GDP를 앞설 수 있느냐, 한국이 일본의 1인당 PPP GDP를 추월했느냐, 한국이 세계 몇 위 경제대국이냐 하는 식의 이야기가 자주 소비된다. 한때 한국에서는 ‘30-50 클럽’이라는 말도 유행했다. 인구 5천만 명 이상이면서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는 나라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들어간 나라가 많지 않다며 자부심을 가지는 식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꽤 이상한 기준이다. 독일에서 “40-80 클럽” 같은 말을 만들어 자부심을 느낀다는 이야기를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기준을 만들면 미국, 독일 정도만 남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국이 일본의 1인당 GDP를 앞선다고 해서 한국이 일본보다 우수한 나라라는 것이 증명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국가는 내가 속한 사회 집단일 뿐이다. GDP 1위 국가든, 100위 국가든, 그 나라는 고유한 역사와 문화와 생활방식을 가진 독립된 공동체다. 숫자가 높다고 해서 그 나라 사람들이 더 우월한 것도 아니고, 숫자가 낮다고 해서 그 나라 사람들이 열등한 것도 아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한국 사회에는 인종 차별뿐 아니라 국적 차별도 상당히 강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소득이 낮은 국가의 사람을 무의식적으로 얕잡아보는 태도가 있다.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낮게 보는 것이다. 이는 결국 국가를 소득이라는 숫자 하나로 서열화하는 사고방식에서 나온다. 소득이 낮은 국가는 ‘낮은 나라’, 소득이 높은 국가는 ‘높은 나라’라는 식의 감각이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숫자로 환원하는 습관은 자연스럽게 비교하는 습관으로 이어지고, 결국 인간의 행복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다시 과일의 예로 돌아가 보자. 여러분은 수박과 포도 중 어느 것이 더 우수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결국 취향의 문제다. 더운 여름날에는 포도보다 수박이 훨씬 반가울 수 있고, 어떤 날에는 진한 단맛의 포도가 더 먹고 싶을 수도 있다. 둘은 서로 다른 과일이지, 우열을 가릴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당도가 몇 브릭스인가”라는 숫자만 들이대면 갑자기 비교가 가능해진다. 10브릭스의 수박보다 18브릭스의 포도가 더 우수한 과일이라는 식의 결론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비교인지는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숫자로 인간을 비교하는 일은 그다지 어리석게 여겨지지 않는 듯하다. 수능 2등급 학생보다 1등급 학생이 더 나은 인간인 것처럼 여겨지고, 연봉 4천만 원을 버는 사람보다 5천만 원을 버는 사람이 더 우수한 사람인 것처럼 취급된다. 하지만 이것 역시 수박과 포도를 브릭스만으로 비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시험 성적, 연봉, 자산, GDP 같은 숫자가 아무 의미 없다는 말은 아니다. 숫자는 필요하다. 어떤 상황에서는 매우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숫자가 전부가 되는 순간이다. 숫자가 참고 자료를 넘어 인간과 사회의 가치를 결정하는 최종 기준이 될 때, 우리는 수많은 개성과 가능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과일이 당도만으로 평가될 수 없듯이, 인간도 성적이나 연봉만으로 평가될 수 없다. 국가 역시 GDP나 순위만으로 평가될 수 없다. 수박은 수박답기 때문에 가치 있고, 딸기는 딸기답기 때문에 사랑받는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각자가 가진 고유한 성향과 재능, 삶의 방식이 있다. 이제 한국 사회도 획일화된 기준으로 서로를 비교하는 습관에서 조금은 벗어날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을 하나의 숫자 위에 세워 놓고 위아래를 가르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쉽게 행복해질 수 없다. 누군가는 더 높은 숫자를 가져도 불안하고, 누군가는 낮은 숫자 때문에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원래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향과 맛을 가진 과일과 같다. 어떤 사람은 수박처럼 시원하고, 어떤 사람은 포도처럼 진하며, 어떤 사람은 딸기처럼 섬세하고, 어떤 사람은 대추야자처럼 강렬하다. 어느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를 도태시켜야 할 이유는 없다. 한국 사회가 조금 더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높은 숫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서로 다른 삶의 방식과 개성을 존중하는 태도일 수 있다. 숫자는 참고할 수 있다. 하지만 숫자로 인간을 끝까지 판단해서는 안 된다. 과일도 그렇게 평가하지 않는데, 하물며 인간은 더더욱 그래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