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는 언제나 일종의 “장난감 토템”이 필요하다.


현재는 조나단 같은 인물이 그렇고, 과거에는 샘 오취리 같은 인물이 그 역할을 했다. 한국어를 잘하고, 한국 문화에 잘 적응하고, 한국 사람들과 유쾌하게 어울리는 흑인들은 한국 대중에게 쉽게 사랑받는다.


유튜브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볼 수 있다. 키가 작거나, 탈모가 있거나, 장애가 있거나, 사회적 약자의 조건을 가졌음에도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한국인들에게 큰 호감을 얻는다. 얼마 전에는 자폐 스펙트럼을 소재로 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도 큰 인기를 끌었다.


겉으로 보면 이것은 좋은 현상처럼 보인다. 한국 사회가 흑인, 장애인, 자폐인, 외모나 신체적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호감이 순수하게 동등한 인간을 향한 호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 그들은 한국 사회가 자기 자신을 좋게 보이게 만들기 위한 장식물로 소비된다. 흑인을 좋아하는 태도에는 “우리는 이렇게 국제적이고 글로벌한 사회다”라는 자기 과시가 섞여 있다. 장애인이나 약자를 응원하는 태도에도 “우리는 이렇게 다양한 약자를 보호하는 도덕적인 사회다”라는 자기 만족이 섞여 있다.


문제는 그 호감이 매우 조건적이라는 점이다. 그들이 한국 사회가 기대하는 역할 안에 머물 때에는 사랑받는다. 한국어를 잘하고, 한국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밝고 긍정적이고, 불편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때에는 귀여움과 호감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이 선을 넘었다고 여겨지는 순간, 그 호감은 너무 쉽게 공격성으로 바뀐다.


샘 오취리의 사례가 그 점을 보여준다. 그는 한때 한국어를 잘하고 한국 방송에 잘 적응한 외국인으로 사랑받았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불편하게 느끼는 문제를 건드린 순간, 대중의 호감은 급격히 식었고 비난은 매우 거칠어졌다. 이때 드러난 것은 한국 사회가 그를 정말 동등한 인간으로 존중했는가, 아니면 한국 사회를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역할로 소비했는가 하는 문제였다.


한국 사회가 이런 인물들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사회 문제를 부정하는 데 편리한 토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조나단 봐라. 저렇게 한국에서 잘 지내는데 한국에 무슨 인종차별이 있냐.”

“키가 작거나 장애가 있어도 연애하고 결혼하고 잘 사는 사람 있잖아. 그러니 차별이 아니라 개인의 자격지심 문제 아니냐.”

이런 식이다.


일부 성공한 사례를 내세우면 구조적 문제를 부정하기 쉬워진다. 한 명의 흑인이 한국에서 인기를 얻었다는 이유로 한국 사회의 인종차별은 없는 것이 되고, 한 명의 장애인이 긍정적으로 살아간다는 이유로 장애인이 겪는 사회적 장벽은 사라진 것처럼 취급된다. 키가 작은 사람이 연애에 성공했다는 사례 하나가, 키 작은 사람들이 겪는 조롱과 배제를 부정하는 근거로 사용된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비겁한 태도다. 예외적 성공 사례는 구조적 차별의 부재를 증명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무하마드 알리가 활약하던 시기의 미국을 생각해보자. 당시 복싱은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정상급 선수들 중에는 흑인이 많았다. 그들은 일반 백인보다 훨씬 더 유명했고, 돈도 많이 벌었으며, 사회적으로 큰 명성을 얻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미국에 인종차별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일부 흑인 스포츠 스타가 성공했다는 사실은, 흑인 전체가 겪던 차별과 배제를 지워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사례는 차별 사회에서도 극소수의 아웃라이어는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다. 특정한 흑인 방송인이 사랑받는다고 해서 한국에 인종차별이 없는 것이 아니다. 특정한 장애인 캐릭터가 인기를 얻는다고 해서 장애인이 존중받는 사회가 된 것도 아니다. 키가 작거나 외모가 불리한 사람이 일부 성공한다고 해서 외모와 신체 조건에 대한 차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예외가 아니라 평균적인 경험이다.

그 사회에서 평범한 흑인은 어떤 대우를 받는가.

평범한 장애인은 어떤 기회를 얻는가.

평범한 키 작은 남성은 어떤 시선을 받는가.

평범한 약자는 불편한 문제를 제기했을 때도 존중받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고 일부 성공 사례만 내세우는 것은 사회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종종 특정한 약자를 좋아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그 약자를 통해 자기 사회의 도덕성을 과시한다. 그리고 그 약자가 자신의 역할에서 벗어나 불편한 말을 하면 곧바로 공격한다. 이것은 존중이 아니다. 이것은 소비다.


더 역겨운 점은, 일부 성공한 약자를 장식물처럼 내세우면서 그렇지 않은 대다수 약자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저 사람은 잘하는데 너는 왜 못하냐.”

“저 사람은 긍정적인데 너는 왜 불평하냐.”

“저 사람은 사랑받는데 너는 왜 차별받는다고 하냐.”


이런 말은 약자를 응원하는 말이 아니다. 약자를 침묵시키는 말이다. 성공한 예외를 들이밀며 실패한 다수를 개인 탓으로 몰아가는 방식이다.


진짜 관용은 약자를 귀여워하는 것이 원하며 진짜 존중은 약자가 사회가 원하는 밝고 긍정적인 역할을 할 때만 박수치는 것이 아니다.


진짜 존중은 그들이 불편한 말을 할 때에도, 그들이 화를 낼 때에도, 그들이 사회의 위선을 지적할 때에도 동등한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좋아하는 것은 약자 그 자체가 아닐 수 있다. 한국 사회가 좋아하는 것은 자신들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약자, 한국 사회가 관대하다는 착각을 유지하게 해주는 약자, 사회 구조의 문제를 부정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약자다.


나는 그것을 존중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그것은 장난감 토템을 세워놓고 노는 것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