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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돈론 (Chaosism)


세계는 질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무질서도 아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무질서'란 개념 자체가 이미 질서를 전제로 한 말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그 어떤 개념으로도 포착되지 않는 상태, 즉 혼돈이다. 혼돈론은 이 단순하고 불편한 사실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빛은 신호로 변환되고, 신호는 뇌에서 해석되며, 우리는 그 해석의 결과물을 '현실'이라 부른다. 색도, 소리도, 시간도, 공간도 전부 뇌가 구성한 모델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 실재를 번역한 사본이다. 그것도 왜곡된 사본. 따라서 앎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해석된 감각만이 있을 뿐이다.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은 무언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완전히 증명 가능한 것이 없다는 말은 곧 모든 것이 가능성으로 열려 있다는 뜻이다. 타인의 의식도, 세계의 본질도, 우리가 믿는 자연법칙도 전부 잠정적인 가설에 불과하다. 이 세계는 확정된 실재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의 장이다.


의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세계에 의미가 없다는 말은 허무주의처럼 들리지만, 혼돈론은 그것과 다르다. 허무주의는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 그것이 없음을 탄식한다. 혼돈론은 그 전제 자체를 버린다. 세계에는 원래 의미라는 속성이 없었다. 의미는 인간이 생존을 위해 만들어낸 도구다. '무의미'조차 의미를 전제한 인간 언어의 산물이다. 세계는 의미와 무의미라는 범주 바깥에 있다.


그렇다면 왜 살아야 하는가. 혼돈론은 이 질문이 잘못된 질문이라고 본다. '왜'라는 물음은 삶에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나 삶은 목적이 아니라 상태다. 존재는 이유 없이 발생한다. 살아야 하는 이유는 없다. 살아 있음이 그냥 사실로서 일어나고 있다. 삶은 정당화될 필요가 없다.


행동도 다르지 않다. 모든 행동은 궁극적 목적 없이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그것이 헛짓거리라는 의미는 아니다. 헛짓거리라는 판단 역시 목적을 전제한다. 행동은 그냥 존재의 표현이다. 의미가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유롭다. 수행은 계속된다.


쾌락은 어떤가. 인간이 의미 없이도 기분 좋음을 느낀다는 사실, 이것이 생명의 원형이다. 

쾌락은 우리생각보다 더 근원적이며 중요하다기분이 좋다, 라는건기분이 좋다, 라는것이기때문이다가짜건뭐건간에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기분이 나쁜거vs기분이 좋은거

뭘해야할까?

답은 간단함을 성숙한 어른인 우리는 알수있다

지금당장 야동을 보는거다유전자는 쾌락을 신호로 삼아 행동을 유도한다. 그러나 카오시스트는 이 구조를 자각한다. 쾌락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느껴지는 방식임을 알면서 살아간다. 쾌락은 삶의 목적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감지하는 방식이다.


도덕과 법도 마찬가지다. 혼돈론은 법을 신념으로 따르지 않는다. 법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특정 사회가 만들어낸 시스템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법을 무시하거나 어기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뜻도 아니다. 카오시스트는 법을 전략적으로 이용한다. 믿어서가 아니라 유용하기 때문에. 도덕 역시 신념이 아닌 맥락의 산물이다.


타인의 실존조차 완전히 증명할 수 없다. 타인이 의식을 가진 존재인지,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느끼는지, 아무도 확인할 수 없다. 우주는 우리가 인식조차 못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들로 가득할 수 있다. 우리가 안다고 믿는 세계는 전체의 극히 일부, 어쩌면 그보다도 작은 파편일 뿐이다.


언어도 한계 안에 있다. 혼돈을 언어로 담을 수 없다. 말하는 순간 이미 왜곡이 시작된다. 그러나 침묵은 회피다.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해야 한다. 언어는 진리를 전달하지 못하지만, 혼돈을 향해 던진 손짓의 흔적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결국 혼돈론의 핵심은 이것이다. 모든 것은 알 수 없고, 의미도 없으며, 확정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느끼고 있고, 살아 있다. 카오시스트는 이 혼돈을 해결하거나 초월하려 하지 않는다. 혼돈을 자각한 채 그 안에서 살아간다. 의미를 믿지 않으면서 행동하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서 말하고, 삶을 정당화하지 않으면서 살아간다. 그것이 전부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성숙한 카오시스트라면 철학 그 자체도 해체해봐야 한다.


우리는 대체 무엇을 위해 철학하는가. 지적 유희를 위해서? 사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아니면 그냥 의미 없이? 솔직히 말하자면, 혹자에게 철학이란 고급스러운 자위 행위다. 고타마 싯다르타도 결국 비슷한 말을 했다. 모든 것은 자기 삶의 쾌락 총량을 올리기 위한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의 철학자들처럼 자신의 철학에 매몰되는 주객전도를 경계해야 한다. 이 철학을 알게 된 이후 삶이 더 재미있어졌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만약 이걸 읽고 기분이 더 나빠졌다면, 솔직히 말한다. 그냥 포기하고 자위나 하는 편이 진심으로 더 나은 삶이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현대 사회는 인간을 통제한다. 물론 통제, 폭력, 억압은 문명의 3대 기본 요소다. 문명이 싫든 좋든,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참고로 화자는 문명을 사랑한다.


법에 대해서도 명확히 해두자. 가상의 인물 조지가 이 책을 읽고 사람을 죽였다고 치자. 조지의 쾌락 수치는 일시적으로 올라갔을지 모르지만, 아마 감옥에 가게 될 것이다. 법정에서 이 책을 증거로 들이민다 해도 무용할 것이다. 화자는 정치인도 아니고, 그냥 방구석에서 사는 백수 남성 1인이니 도움을 줄 수 없다.


철학은 신이 정해준 규칙이 아니다. 그렇다면 억울하지 않냐고? 선택한 적도 없는 룰에 따라야 하다니, 너무 부조리한 거 아니냐고?


맞다. 세상은 원래 부조리하다. 특히 법은 더욱 그렇다. 가끔 우리는 까라면 까야 한다. 왜냐면, 다시 말하지만, 세상에 의미란 없으니까. 그런데 법은 의미 없이도 우리를 규탄하고 억압한다. 어쩔 수 있겠는가. 경찰은 총이 있고, 정치인은 우리보다 돈이 많다. 꿇어야 할 때는 꿇어야 한다.


화자가 말하고 싶은 건 이것이다. 그 안에서 최대의 이득을 쟁취하라. 예를 들자면, 길에서 어떤 사람이 넘어졌을 때 굳이 도와주지 않고 빠르게 집으로 달려가 좋아하는 콘텐츠를 즐기는 정도의 소소한 최적화 말이다.


불만이 있다면 레딧에서 욕을 쓰거나, 투표를 잘 해서 바꿔나가자. 혼돈 속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행동이다.



여기서부터는 개소리다. 듣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여기까지 읽어온 당신은 이미 화자의 한평생 사유의 엑기스를 뽑아간 셈이니, 마지막 개소리 한 토막 정도는 읽어주는 게 예의 아닐까.


나는 정답이 없음을 사랑한다. 화자의 취미가 망상, 자위, 롤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정답이 없다면, 세계를 재미로 채워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는 사실상 무한에 가깝다. 고로 이 세상 어딘가에 프로토스, 저글링, 그리고 아젠다르가 실존할 가능성은 꽤나 높다.


만약 지성체의 기준이 뇌가 아니라 고도의 전기신호 같은 것이라면, 우리 행성이나 별들에게 지성이 없을 이유가 뭐겠는가. 우리가 보지 못할 뿐이다. 혹은 암흑물질이 거대 우주공룡의 똥이라면? 리처드 1세의 아버지가 진짜 사자라면? 이런 상상들은 꽤나 즐겁다.


개인적으로 현대 인터넷이 너무 삭막해졌다고 생각한다. AI가 대충 뽑아낸 콘텐츠(정치 선동글 연애인 가십글 등 화자는 개인적으로 이걸 정치권의 우민화 계략이라고 생각한다)가 아닌, 진짜 사유의 결정체로 만들어진 엉뚱하고, 때로는 사람 명예도 실추시키고, 즐거운 논란을 빚는 브레인롯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 화자는 개인적으로 사람들이 꽤 싫어하는 67밈, 이탈리안 브레인롯 같은 것들을 좋아한다. 엉뚱하고 즐겁기 때문이다. 참고로 화자는 AI도 진심으로 사랑한다.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다. 거기엔 범죄도 있고, 지식도 있고, 야동도 있고, 게임도 있고, 전투도 있고, 스너프 필름까지 전부 있다. 그런데 왜 우주공룡이 없으면 안 되겠는가.


이것이 나의 작은 이기심이다. 이하로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