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드 모파상의 '비계덩어리'는 인간의 위선과 자기합리화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단순히 선한 인물이 악한 사람들에게 희생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더 중요한 점은, 타인을 이용하고 희생시키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악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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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을 악역의 위치에 두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은 합리적으로 행동했거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였거나, 나름대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이 이기적이거나 비겁했더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보다는 그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를 찾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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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설명할 때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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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렇게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상대방도 문제가 있었다.”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
“나 역시 피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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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말들은 일정 부분 사실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인간관계나 사회적 상황은 단순하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설명이 자신의 책임을 흐리거나, 타인에게 가한 피해를 축소하는 방식으로 사용될 때 발생한다.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보기보다,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사건을 재구성하려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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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은 대니얼 카너먼의 저서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설명하는 인간의 사고방식과도 관련이 있다. 인간은 우연하고 복잡한 사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사후적으로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순전히 우연에 의한 사건일지라도 그것을 인과관계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어떤 일이 벌어진 뒤에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선택과 책임은 흐려지고, 행동을 정당화하는 서사만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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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계덩어리'에서도 이러한 자기합리화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마차에 탄 사람들은 처음에는 비계덩어리를 천한 여자라고 경멸한다. 그러나 독일 장교 때문에 이동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그들은 비계덩어리에게 희생을 요구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노골적인 이기심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대신 애국심, 공동체의 이익, 현실적 필요와 같은 명분을 내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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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행동의 본질은 명확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편하게 떠나기 위해 비계덩어리 한 사람을 희생시키려 한 것이다. 그들의 말은 고상해 보이지만, 실제 행동은 타인을 도구로 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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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중요한 장면은 그 이후이다. 비계덩어리가 결국 자신을 희생해 모두가 다시 이동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사람들은 그녀에게 감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시 그녀를 차갑게 대하고 멸시한다. 이는 그들이 자신의 위선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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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들이 비계덩어리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면, 자신들이 그녀를 이용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비겁하고 이기적인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마주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대신 비계덩어리를 다시 천하고 더러운 존재로 취급한다. 그래야 자신들이 한 행동에 대해 죄책감을 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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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구조는 현실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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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실제로 관찰한 현상인데, 한 여자가 환승연애를 하려고 하는데 자신이 조건을 보고 사람을 갈아탄 것처럼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일부러 현재 연인에게 시비를 걸거나, 갈등을 키워서 일부러 싸움을 걸어서 헤어진다. 그리고 이후에는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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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 때문에 떠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원래 성격이 맞지 않았다.”
“그 사람이 나를 힘들게 했다.”
“관계는 이미 끝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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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랑이 식는 것 자체가 악은 아니다. 누구든 마음이 변할 수 있고, 관계를 끝내고 싶을 수도 있다. 문제는 자신의 선택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고, 상대방을 악역으로 만들어 자신의 책임을 줄이려는 태도이다. 이 경우 핵심은 이별 자체가 아니라, 이별의 명분을 조작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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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보인다. 부모가 자식에게 과도한 기대를 강요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욕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부모는 흔히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다”라고 말한다. 물론 실제로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자식의 성공을 부모 자신의 체면이나 자랑거리로 삼고 싶은 욕망이 섞여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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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부모의 기대와 다른 길을 가려고 하면, 부모는 자신의 통제욕을 인정하기보다 자식을 철없는 사람, 배은망덕한 사람, 현실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해야 부모는 여전히 자신을 희생적이고 올바른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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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차원에서도 이런 현상은 반복된다. 어떤 집단이 약자를 배제하거나 착취할 때, 그들은 자신들이 잔인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정말로 별것 아닌 사소하다고 볼 수 있는 행위를 과도하게 해석해서 마치 그 사람이 그것에 대한 합당한 징벌을 받는 것처럼 명분을 만든다. 그래서 자기들은 '좋은 사람'인데 상대가 너무나 잘못해서 어쩔 수 없이 그런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스스로에게 세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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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명분이 있다고 해서 모든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누군가의 존엄을 짓밟거나, 인격을 모독하거나, 타인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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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어떤 사람이 악한 행동을 했는지를 판단할 때는, 그 사람이 만들어낸 이야기만 보아서는 안 된다. 누구나 자기에게 유리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어떤 행동을 했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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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행동에는 언제나 맥락이 있다. 그러나 맥락이 있다고 해서 모든 행동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연이 있더라도 사람의 인격을 모독하는 행위는 정당화되기 어렵다. 어떤 이유를 붙이더라도 상대를 일부러 악역으로 만들고 자신의 책임을 지우는 행위는 비겁하다. 어떤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타인을 희생시켜놓고 자신은 선량한 사람인 척한다면, 그것은 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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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비계덩어리'가 보여주는 것은 인간 사회의 불편한 진실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악한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행동에 이야기를 붙이고, 우연한 사건을 필연처럼 설명하며, 욕망을 도덕적인 명분으로 포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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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무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도, 타인을 이용하고 모욕하고 희생시킨 행위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악은 대개 스스로를 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악은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나도 피해자였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말 속에서 자신을 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