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바이타 베단타와 약간의 나가르주자식 중관 조금 섞어서 다뤄봤음 근데 중관사상은 진짜 아주 조금 향첨가 식으로 약간 다뤘음
출발
해탈이란 무엇인가. 힌두교의 목샤와 불교의 열반은 어떻게 다른가. 하나는 아트만으로의 귀환이고 하나는 자아의 해체라고들 말하는데. 그리고 둘 다 나에게는 기능적으로 부동인 상태로 보였고 그럼 무슨 차이가 둘을 나누는지 알아보는 과정에서 힌두교 개념을 다루던 중 나온 생각의 결과물임.
들어가기 앞서 다룬 개념들의 속성을 짧게 소개하고 넘어가겠음.
브라만 : 힌두교에서 말하는 모든 것의 실체 되는 것으로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 우주의 모든 것이기도 하다
아트만 : 아트만 = 브라만. 근데 좀 개인적인 개념임. 참나라고도 불림 이 글이서는 브라만과 혼용해서 사용함.
마야 : 아트만을 가리는 환영이자 브라만을 보지 못하게 막음. 본질이 아닌 모든 것이 여기에 속함(자아포함).
공 : 불교(중관론)에서 말하는 고정불멸한 실체는 비어있다는 생각으로 심지어 비어있다의 실체도 비어있음 (공공)
*알면 좋은 것
*미세신 : 힌두교에서 말하는 윤회하는 나. 정신, 자아가 여기에 속하며 카르마가 남음. 카르마가 남아있는 한 윤회를 멈추지 않음. (수행을 행하는 주체이기도 함)
*카르마 : 행위(원인)에 따른 결과. 집착을 갖고 행위를 하면 미세신에 카르마가 남아 윤회의 원인이 됨(카르마가 많을수록 해탈이 어려움)
*갈애 : 불교에서 말하는 공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원인(집착)
*연기 : 원인과 결과의 굴레. 중관사상에서는 모든 것 중 독립된 것은 없고 상호간의 연기아래 존재하니 모든것이 공하다고 함.
1. 아트만의 모순
아트만이 부동불멸하다면, 착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착각하는 주체가 있다면 그것은 아트만과 분리되어 있다는 말이다. 분리되어 있다면 수행은 마야가 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행 끝에 소멸하는 것은 그 수행의 주체이고, 해탈은 귀환이 아니라 소멸이 된다. 그러나 분리가 아니라 일치한다면 부동불멸한 것이 착각을 일으킨다는 말이 되고, 아트만의 본성 자체가 흔들린다.
2. 수행의 구조적 모순
수행의 구조도 같은 딜레마에 걸린다. 주체가 아트만과 분리되어 있다면 수행 끝에 소멸하는 것은 수행한 자이고, 해탈을 이룬 자는 없다. 주체가 아트만과 일치한다면 완전한 것이 완전해지려 한다는 말이 되어 수행의 이유 자체가 사라진다. 어느 쪽이든 수행의 동력은 근거를 잃는다.
논리의 한계 그리고 새로운 가설
현 인식내의 논리의 영역에서는 더 이상 수행과 해탈의 형이상학적 정당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여기서 인식의 틀을 살짝 전환해 보았다. 우리가 동적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다른 축(가령 시간이라던가)이 추가된 다른 차원에서는 고정된 현상일 수 있다면, 부동이면서 동적이라는 모순은 모순이 아니라 차원간의 인식 차이가 된다.
*결정론의 부상 — 자율성의 문제
결정론과 자발성의 긴장도 여기서 함께 떠올랐다. 모든 동작과 부동, 원인과 결과가 이미 갖춰저있다면 수행할 사람은 수행하고 이를 사람은 이른다. 수행의 의미는 어디서 오는가.
마야의 재정의 — 고착감
새로운 가설 안에서 마야에 대한 새로운 가설이 떠올랐다. 세계가 환상이라는 것이 아니라, 아트만의 극히 일부분에 고착되게 만드는 인력, 그 고착감이 마야일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업이 쌓인다는 것도 특정 방향으로의 고착이 강화되는 것으로 통하고, 수행은 그 인력을 약화시키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더. 그리하면 세상의 모든 것, 살아가고 있는 우리, 소멸, 창조, 유지, 탄생, 변화, 죽음, 관념, 물질, 빛, 어둠, 동, 부동 모두 아트만이며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에만 몰입하게 하는 고착감이 마야(환상). 아트만 속에 모든 존재할, 존재하고 있고 소멸할, 소멸한, 혹은 그저 아트만과 그 중 아주 적은 부분을 전부라고 느끼게 만드는 고착감이 중첩된 좌표 그것이 수행의 주체이다 이것은 마야이자 아트만이고 수행을 통해 그 고착감이 작용하는 인력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하면 수행은 더 이상 소멸이 아니다.
불교와의 접점
불교의 공과 아트만에서 비슷한 향취를 느꼈다. 있음도 없고 없음도 없는 공공과 부동이면서도 동적인 아트만, 완전한 충만과 비어있음조차 비어있는 공, 무한한 한계와 무제한. 기능적으로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부정으로 가든 긍정으로 가든,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비슷한 지점에 도달한다. 극단처럼 보이는 두 전통의 차이가 어쩌면 언어와 개념이 만들어낸 차이, 그 자체로 마야이자 갈애일 수 있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언어유희
하지만 이 또한 잡을 수 없는 개념이라는 점을 이용한 막연한 언어적 유희, 착각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자율성의 문제
자율성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다른차원으로 열어버리면 지금 내가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감각 자체가 이 차원에서만 유효한 것이 될 수 있고, 그 감각에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어진다. 그러나 인식 너머의 시선에서 운명을 관조할 수 없으니, 본인이 생각하기에 최선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거기서 더 파면 철학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의 마비가 오기 때문이다.
내 의식 속 목샤와 열반 개념의 재정립
본래의 나의 인식 속에서 목샤와 열반은 각각 정지와 소멸로 보였다, 그러나 해당 사유가 끝나고 나서는. 둘 다 인식의 고착을 풀어내고, 부동이자 역동, 모든 것이자 아무것도 아닌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 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뭔가 하다보니 음슴체에서 해라체로 넘어가긴 했는데 주요내용운 끝났으니 다시 음슴체로 하겠음
뭔가 하다보니 좀 b급 sf설정딸처럼 되어버리긴 했는데 어디 똥글 쌀 곳이 없어서 여기에라도 올림. 근데 개념은 사실 인터넷 검색으로 배워서 틀린거 많을수도 있음 ㅎㅎ;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