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비만을 바라보는 태도는 이상할 정도로 공격적이다. 의학계에서는 이미 비만을 단순한 의지 부족이 아니라 복합적인 만성질환으로 다루고 있는데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비만을 “게으름”, “자기관리 실패”, “의지박약”으로만 해석한다.
그들의 논리는 대개 이렇다.
“비만을 질병이라고 인정하면 사람들이 살 뺄 노력을 안 하게 된다.”
나는 이 말이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질병이라는 말이 왜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는가? 당뇨병이 질병이라고 해서 혈당 관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알코올 의존이 질병이라고 해서 술을 계속 마셔도 된다는 뜻도 아니다. 우울증이 질병이라고 해서 아무 치료도 하지 말자는 뜻도 아니다.
질병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책임을 없애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를 더 정확하게 보고, 더 효과적으로 치료하고 관리하자는 뜻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질병이라는 설명이 들어오는 순간, 마치 그 사람이 면죄부를 받는 것처럼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이 사회는 문제를 치료의 언어보다 처벌의 언어로 이해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비만인을 조롱하면 살을 뺄 것이라고 믿는다.
우울증 환자를 혼내면 정신을 차릴 것이라고 믿는다.
알코올 의존자를 모욕하면 술을 끊을 것이라고 믿는다.
말더듬이를 창피 주면 말을 잘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치료가 아니라 협박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이런 방식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교육과 조언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왜 이런 사고방식이 만연한가. 나는 그 이유 중 하나가 한국인들이 어렸을 때부터 설득이 아니라 협박으로 교육받아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너 그러면 인생 망한다.”
“남들은 다 하는데 너는 왜 못 하냐.”
“창피한 줄 알아라.”
“맞아야 정신 차린다.”
“굶어봐야 고마운 줄 안다.”
“그렇게 살면 아무도 너 인정 안 한다.”
이런 말들은 설명이 아니다. 설득도 아니다. 공포를 이용한 통제다. 아이에게 왜 공부가 필요한지, 왜 습관을 바꿔야 하는지, 왜 어떤 행동이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지 설명하는 대신, 겁을 주고 창피를 주고 비교를 한다. 그러면 아이는 문제를 이해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라, 혼나기 싫어서 잠시 행동을 바꾼다.
문제는 이렇게 자란 사람이 나중에 타인을 대할 때도 같은 방식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비만이면 왜 그렇게 먹게 되었는지를 묻지 않는다. 식욕, 스트레스, 수면, 유전, 환경, 노동 강도, 정신적 피로 같은 조건을 보지 않는다. 대신 “덜 처먹으면 되잖아”라고 말한다.
누군가 우울하면 왜 무너졌는지 보지 않는다. 대신 “정신 차려”라고 말한다.
누군가 술을 끊지 못하면 왜 술에 의존하게 되었는지 보지 않는다. 대신 “의지가 약하다”고 말한다.
누군가 가난하면 어떤 구조와 조건 속에 있는지 보지 않는다. 대신 “노력 안 해서 그렇다”고 말한다.
협박으로 자란 사람은 문제를 보면 원인을 찾기보다 먼저 겁줄 방법을 찾는다. 수치심을 주면 고쳐질 것이라고 믿는다. 고통을 주면 사람이 바뀐다고 믿는다.
물론 협박은 단기적으로 효과가 있어 보일 수 있다. 아이가 무서워서 공부하고, 직원이 욕먹기 싫어서 일하고, 비만인이 창피해서 굶으면 겉으로는 변화가 생긴다. 그래서 사람들은 착각한다. “봐라, 압박하니까 되잖아.”
하지만 그것은 치료가 아니라 공포 반응이다. 장기적으로는 자기혐오, 회피, 거짓말, 폭식, 우울, 분노, 관계 단절을 낳는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숨기게 만든다.
비만에 대한 한국식 비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비만인을 정말로 건강하게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 그를 도덕적으로 낮춰볼 권리를 지키고 싶어 한다. 비만이 질병이라는 설명이 들어오면 “게으르다”, “의지박약이다”, “자기관리 못 한다”는 비난의 언어가 약해진다. 그래서 그들은 질병이라는 개념을 싫어한다. 치료의 언어가 들어오면 처벌의 언어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협박으로 건강해지지 않는다. 수치심으로 안정되지 않는다. 모욕으로 치료되지 않는다.
진짜 변화는 문제를 정확히 이해할 때 가능하다. 비만은 단순히 많이 먹어서 생기는 결과일 수 있지만, 왜 어떤 사람은 많이 먹게 되는지, 왜 어떤 사람은 적게 먹는 것이 미친 듯이 고통스러운지, 왜 어떤 사람은 인내심을 거의 다 소모한 상태에서 살아가는지를 봐야 한다.
사람마다 식욕의 강도는 다르다. 포만감도 다르다. 스트레스를 견디는 방식도 다르다. 노동과 생활환경도 다르다. 어떤 사람은 적게 먹는 것이 별일 아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하루 종일 자신을 억누르는 고통일 수 있다.
그런 사람에게 “그냥 참아라”라고 말하는 것은 설명이 아니다. 그것은 다시 협박이다.
한국 사회는 너무 오랫동안 사람을 이해해서 바꾸는 법보다, 압박해서 맞추는 법에 익숙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군대에서, 회사에서 사람을 그렇게 다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문제 있는 사람을 보면 “아픈 사람”이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보기보다 “덜 혼난 사람”, “정신 차려야 할 사람”, “창피를 당해야 할 사람”으로 본다.
나는 이것이 매우 낡은 인간관이라고 생각한다.
말더듬이를 때리면 말을 잘하게 된다고 믿는 것.
우울증 환자를 혼내면 밝아진다고 믿는 것.
알코올 의존자를 모욕하면 술을 끊는다고 믿는 것.
비만인을 조롱하면 살을 뺀다고 믿는 것.
이 모든 것은 같은 뿌리를 가진다. 사람은 이해받으면 나태해지고, 수치심을 느껴야 고쳐진다는 믿음이다.
하지만 그것은 교육이 아니다. 치료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협박으로 자란 사람들이 세상을 다시 협박으로 고치려는 방식일 뿐이다.
캬~ - dc App
진짜 도움되는 쓴소리는 부모나 가족이 전부고 남이 떠드는 쓴소리는 아무 가치 없음 그건 상대를 모욕하기 위해 남보다 위에 자신을 올려놓고 스트레스 푸는거나 마찬가지니까 486꼰대들이 특히 그럼
설득이 아닌 협박으로 교육받은 인간들의 사회
생각해볼만한 글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