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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전생기라는 만화 후기.

사유 자체는 오래됐지만 정리가 안돼서 그냥 묵혀만 두던 생각.

어쩌다 문득 무협지의 표상들과 엮어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그럴듯하게 글 가닥이 잡혔고 - 원래 어떤 사물의 본질은 그것에 대해서만 골똘히 생각할 때보다는 그것을 다른 사물과 겹쳐 보다가 그 다른 사물에서 내가 본래 고민하던 것과의 공통점에 해당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때 그것이 그 사물의 이념(껍데기가 빠져나간 알맹이)에 해당하는 것이라 더 잘 깨닫게 된다 생각함. 마치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선 무지하면서도 남의 결점을 집을 때 돼서 그제서야 우리 자신을 다시금 성찰할 수 있는 것처럼 - 쓰고 나서 보니 안성재가 까이고 있다는 걸 알게 돼서 해당 글의 연장선으로 개인 생각을 적어보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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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2판 서문 속 글.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대개 사물의 가상이 세상에서 널리 통용되고 크게 행세하는 것을 보게 된다. ~~~ (중략) ~~~ 왜냐하면 사물을 사물의 외견과 일치시킨다는 점은 불가능은 아닐지라도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철학을 위해 이처럼 떠들어 대고 노력하다 보면,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진리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리란 결코 창부가 아니라서 그를 갈망하지 않는 자에게 스스로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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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재를 대표하는 트레이드 마크가 하나가 "타이트한 간"임.
사실 파인다이닝 업계에서 간을 중시함은 어제오늘 일이 아님. 십수 년 전 마셰코 당시 심사위원이던 김훈이 셰프도 출연자 요리의 간에 대해 혹독하게 평가한 바 있으니.
이들 파인다이닝 셰프들은 왜 이렇게 간을 엄격히 평가하는 걸까?
그들의 지론은 대개 간은 모든 요리의 기본이자 간이 알맞게 돼 있어야 비로소 요리에서 올바른 (본연의) 맛이 느껴진다는 식.
거의 간을 무슨 요리에 있어서의 선험적 요소로 여기다시피 하는데, 이는 간이 본래 그러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정체성이 그런 간을 선험적 요소로 신성시함을 필요로 하기에 그런 것이라 생각함.

태초에 파인다이닝이 아닌 일반인들의 요리, 보통의 인류가 음식을 먹고 맛을 지각함이 먼저 있었지 파인다이닝 셰프들이 있고 나서야 요리의 역사가 시작한 게 아님. 태초의 맛 지각은 우리의 (조)부모 세대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감자, 당근, 마, 고구마 등 통상의 경우 우린 그것을 생식하지 않는 것들을 생식하는 것에서 시작됐을 터.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이 같은 것들을 날로는 커녕 그걸 조리해 반찬으로 먹는 것도 그다지 선호하지 않고 채소에서 퍽퍽한 맛이 난다고 하는 사람까지 등장한 것처럼 급기야는 아무 맛을 느낄 수 없는 경지에 이름. 그리고 이 같은 현상은 점점 가속화될 거라 생각함. 셰프들의 "간"을 맛의 표준으로 삼으려는 눈물겨운 노력 덕분에.

이러한 현상은 일단 간을 친 게 안 친 것보다는 맛을 느끼기 쉽고 인간은 쉬운 걸 선호한다는 데서 시작함. 맛을 못 느끼던 것도 간을 조금만 치면 맛이 바로 지각되기 시작하니까. 근데 간을 치면 맛이 더 쉽게 느껴지는 이때에 간을 치기 이전의 것은 맛이 없던 것인가? 하면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맛이 없던 것일 리가 없음. 그럼 맛은 간 만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간만 맛을 가지고 있을 리 없으니까. 그리고 이게 경험적인 거라 말하기 힘들고 그래서 파인다이닝이 그 노선으로 간 것이겠지만, 간을 가하기 전 불순물 같던 맛이, 그러니까 해석은 안되지만 무언가 부유하는 상태로 존재는 하는 것 같던 맛들이 간을 넣었을 때 더 분명히 인식되기에 이르는데 이것은 간 이전의 것들은 결국 맛으로 느껴질 가능성들이 되는 셈이라 생각함. 더 나아가 우리는 간이 없을 때 맛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누군가 - 대개 선대의 사람들 -는 맛을 또렷이 잘 느낀다는 것은 간이 들어간 정도에 따라 느낄 수 있는 맛의 풍성함의 정도가 전부 천편일률적으로 정해진 게 아니라 선천적 특성이나 경험의 차이, 지각 인식 능력의 정도에 따라 다 다르다는 말. 그리고 세상 만물이 으레 그렇듯 벼룩을 통 안에 담아두는 것과 같이 파인다이닝이나 오마카세 따위의 미식 권력이 "이 풍미는 이 정도 간이다!"라고 딱딱 맞춰두고 그것에 따를 것과 그것에 따르는 것을 교양 있음이라 여겨 강제하지 않는다면 사람마다 간의 편차에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 맛을 지각하는 정도는 얼마든지 더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함.


그렇다면 파인다이닝 및 오마카세 따위의 미식 권력(?)은 왜 이 간이란 것을 그들의 기준 잣대로 삼았느냐?


1. 기본적으로 유산계급은 자기들이 향유하는 문화가 무산계급의 것과 뭐가 달라도 다름을 증명하고 싶어 하고.


<--> 다른 거 없음. 일단 다른게 없으니까 구분적 당위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일 테고 전통적 구분으로 봐도.

칸트의 예술론 속 문화 예술을 설명하는 대목 중에


"천재란 주관이 그의 인식능력들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데서 드러나는 천부적 자질의 범형적 원본성[독창성]이다. 그렇기에 천재의 산물은 (가능한 학습이나 교습에서가 아니라 천재에서 기인한 다고 할 수 있는 점에서) 다른 천재에게는 모방의 실례가 아니라 - 왜나하면 그 경우에 그 산물에서의 천재적 요소와 그 작품의 정신을 이루는 요 소는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 계승의 실례인 것이다. 다른 천재는 그 실례를 통해 그 자신의 원본성(독창성)의 감정이 일깨워져, 규칙들의 강제로부터 벗어난 자유를 예술 속에서 행사하는 바, 그를 통해 예술은 그자신 새로운 규칙을 얻고, 이 새로운 규칙을 통해 그 재능은 범형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천재는 자연의 총아이고~"


이런 게 있는데 여기 어디에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의 차이가 있음? 그저 예술가의 자질을 갖춘 사람(천재)과 비 예술가의 차이 도식만이 있지.

또한 첫 대목의 "주관이 인식능력을 자유롭게 사용한다" 함도 미각에 있어선 맛을 제멋대로 느낀다에 대응하는 것이지 절대 맛이 미각의 합법칙성 내에서만 올바르게 운용된다를 의미하는 것일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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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대 사회의 과학만능주의 경향이 요리에도 이어져 조리 과학의 성경이라 불리는 두 권의 책 "음식과 요리" 그리고 "모더니스트 퀴진".

이 두 권의 책과 더불어 수많은 셰프들에게 있어 그들의 명성을 유지시키는 수단은 체계화된 조리법과 그 각각의 단계에 적합한, 그래서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여겨지는 객관화된 것으로서의 간이지 개별 인식 주체에 따라 상이하게 다를 수 있는 것으로서의 간이 아니기에 그 다름을 낳는 간의 위치가 의도적으로 혹은 은연중에 신성한 것으로 급부상했다 생각함


3. 1+2. 2의 고객이 주로 1인지라. 1의 요구에 2의 당사자들이 어차피 같은 메타언어인 "객관성"으로 회답하는 것인데 이는 보편적으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계가 - 현재 미식계가 자신들이 예술가란 자각이 있는지는 의문이다만 - 시대적 지배이념에 따라 그 이념에 종속된 메타언어만 달리하며 기득권에 봉사하는 일반 형식이겠으나 //

간과되는 건 그 어느 시대보다도 문화 예술과 사회 풍습 전반에 있어서의 인간 정신에 대한 복구 불가 수준의 심대한 타락에 있다 생각함.

무엇보다도 선험적 체계는 수학 과학같이 자연에 그 연원이 본디 있었다 여겨지는 데에서나 세우던가 하지 왜 그걸 인간의 주관적 감각 인식 부문으로 끌고 와 체계화하려는지 의문.

쇼펜하우어의 두 번째 구문을 끌어온 것도 이 이유. 그들 셰프들 일반은 어떻게든 과학적이고 체계화된 방법론으로 미식을 위해 애무하다 보면 예술의 경지로서의 미식이 자연히 나타날 것이라 여기나 본데 그런 감성적인 부분 자체를 키우지 않고 테크닉적으로만 접근해 우연히 이를 획득하려 함은 그야말로 창부나 다름없는 일이라 생각함.

또 그렇기에 그들이 그렇게 신성시하는 할머니의 손맛을 도둑질하기에 여념이 없고 또한 이에 부끄럼이 없는 것이기도 하고.

진짜 가증스러운 족속들이 아닐 수가 없음.
크게 서너 가지 관점에서 이 가증스러운 족속들을 비판해 보도록 하겠음.



1. 이원일 전)셰프의 어느 양식집  컨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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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초부터

요리는 정말 훌륭하나
요리가 가진 맛을 전부 드러내 보이기 위해선 간이 살짝 부족하다.
단 맛이 있고, 고소한 맛이 있고, 향이 있고.
터놓고 말해 요리사들끼리 먹기엔 알맞은 간이 있고 솔직히 그거엔 못 미친다.
여기서 "요리사들끼리의 문법적으로 합의된 간"이 다시
본 글 서두의 안성재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타이트한 간과 겹침.
파인다이닝은 일전부터 짜다는 말이 지배적이었고
해당 영상에서도 영상 속 요리들은 여러 기교가 더해진(미식 용어로 여러 레이어가 켜켜이 쌓인 것쯤 될) 요리인데 여기에 간이 그만큼 더해져야 비로소 의도된 맛이 제대로 느껴진다 함은 결국 1기교 1간이라는 소리임.
미식에 있어서의 여러 기교는 그 기교의 가짓수와 같은 수의 간을 메인으로 하며, 여러 셰프들 영상에서 각 조리 단계에서 재료마다의 개별 간을 치는 것도 이런 이유.
이는 결국 기교가 쌓인 만큼 요리도 그만큼 짜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타이트한 간"의 필요성은 그것을 필두로 맛을 만들어 내는 것에 있음.

다시. 결국 짜야 하는 이유는 내가 가진 기교가 이 정도이다!를 내보이기 위해서가 되는 셈. 달리 보면 자신의 의도가 누구에게나 객관적으로 다가오게 하기 위해서이고 이는 그것 이외엔 달리 방법이 없음을 시인하는 것이기도 함.
결국 이들 미슐랭식의 작품은 의도의 총합에 지나지 않는 범속적인 것으로 전락해버림.



2. 본연의 맛과 버터 양.



이 당근 수프 이기는 레시피 절대 없다는, 파인다이닝 식 그리고 위에서도 거론한 책 '모더니스트 퀴진'에 나오다는, 당근 수프 레시피.


1. 껍데기 벗긴 당근(500g)을 겹치지도 않고 그렇다고 빈 공간도 없게 3cm 두께로 썸.

2. 버터 100g을 먼저 녹이고 여기에 당근을 넣은 뒤 버터, 물, 베이킹 소다 - 알칼리 어쩌고로 당근을 잘 풀어지게 함 - , 소금을 넣고 뚜껑 덮고 약불에서 25분간 가열

3. 믹서기에 갈아 채에 내린 뒤 함량 높은 당근주스(500g)을 넣어 데우다 따듯해지면 버터(40g) 넣고 가열.



반면 유튜브에 "당근 수프" 내지는 "carrot soup"치면 나오는

대부분의 클래식한 레시피들은 보통 이런 식.


1. 올리브오일 or 버터에 양파 다진 거, 마늘&진저, 큐민 차례로 넣고 볶음

2. 당근 넣고 볶다가 채수나 닭육수 정도 넣어주고 취향에 따라 타임이나 세이지... 뭐 기타등등 첨가.

3. 한 번 갈아준 뒤 다시 크림이나 코코넛 밀크 등 넣어서 데워준 뒤 마무리.


분명 전자의 파인다이닝식 레시피가 좀 더 당근의 맛에 집중한 레시피이긴 함. 근데 그게 과연 "본연의 맛"인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

애초에 본연의 맛이 뭔지도 모르겠어.

누가 안성재한테 물어봐 줄래? 본연 본연 거리기 이전에 본연의 맛이 무엇인지? 위의 쇼펜하우어식, 그리고 철학 일반에서 여겨지는 본연이란 사물의 외견이 아닌 사물 그 자체 사물의 본성에 해당하는 것일 텐데 맛에 있어서 본성이 무엇임 대체?

들어가는 레시피가 더 단출하다고 그게 당근 본연의 맛이라기엔 들어가는 버터의 양이 너무 많지 않나?

우리가 흔히 날로 먹을 때 보르디에 수준은 고사하고 평범한 프랑스산 버터 정도만 돼도 극찬하며 빵에 듬뿍 발라 먹는 것과는 달리 생당근은.. 누가? 그걸 맛있다 하며 먹나?

무시하지 못할 버터의 양에 당근을 넣어 함께 조리해 먹는 건 결국 앞서 말한 간이 그런 것처럼 버터의 보다 식별되고 분명한 맛에 당근의 맛을 입혀 먹는 거 아닌가?

여기에 그것이 보다 더 당근의 맛에 가깝다 할 여지는 어디 있는지? 위의 방식이든 아래 방식이든 결국 그러한 조리 자체는 당근의 맛을 더 지각되기 쉬운 형식으로 바꿔서 맛을 음미하자는 것이고 이렇게 변형된 맛은 결국 맛의 본성 면에서 맛의 외견일 뿐이지 어떻게 그게 맛 자체가 되는지 의문.


또한 전자가 더 맛있을 거란 자신에 찬 발언에서 아마 각기 다른 후자의 레시피들에 비해 심플 분명한 전자가 더 보편적으로 그것이 맛있기는 할 텐데, 이는 애초에 체계 정립의 목적 자체가 그러했기에 그러할 뿐 - 즉 여러 레시피에서의 디테일이 재료를 볶는 순서나 들어가는 향신료&향신채의 배합 등 지극히 자기 취향에 의한 것과 달리 전자는 보편성을 의도하느니 만큼 여러 사람이 보편적으로 좋아하는 버터를 메인으로 넣고 그 외에 다른 건 일체 첨가하지 않음 -, 이 보편성의 결과가 곧 맛의 깊이에 있어서의 정도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고 또 그 깊이가 아닌 보편성 그 자체가 예술성이란 보장은 대체 어디에 있을련지?


파인다이닝 업계 일반은 문화적 위계를 따지기 좋아하는데, 그래서 그러한 측면에서 보면 보다 예술적이고 보다 전위적인 것은 어떤 세계의 현상에 대해 해석하고자 하는 의지의 정도 아닌가?

그런데 그 강도가 한낱 더 보편적으로 맛있음에 수렴되는 과학적이고 체계화된, 그래서 조리의 요법과 맛의 지각이 일대일로 대응되고 상기의 당근 수프(퓌레)가 그들 플레이트 속에서 여러 부 요소로 쓰일 것처럼 그런 대응물 들의 조합물을 섬세하게 지각함에 지나지 않는다면, 창작자의 의도에 자신의 사견을 덧대 하나의 작품은 창작자의 의도와 이해자의 해석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고교 교과 속 문학 이론에서도 나오는 그 같은 것이 전혀 이뤄지지 않은 채  그저 의도한 대로 넙죽넙죽 받아먹어 해석해냄을 지고의 가치로 삼을 뿐이라면,

거기에 예술적 지각의 강도는 대체 어디에 있는지?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현대 조리 과학이 대체 뭘 만들었고

그래서 후대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가 궁금함.

수비드? 분자요리? 아님 뭐 접시에 요리 잡스럽게 장식질하는거?

한국의 할머니 or 어머니의 손맛에 대응되는 표상으로서 이태리에도 할머니의 손맛을 강조하는 단어로 '논나'와 같은 것이 있고 그 외에 수많은 전문 셰프들에 있어서도 내 영감의 원천이란 식으로 어머니의 요리가 리스펙되곤 하는 건 역으로 그들 조리 혁명이 보여지는 것 대비 무용한 것이라서라 생각함.

그러니까 영감을 현현시키는 것으로서는 유용한데 영감 그 자체가 되지는 않는, 영감은 다른 데서 떼와야 하고 그 영감이 그들이 때때로 터부시하기도 하는 그런 비과학적이고 덜 숙련된 조리법에서 기인하는 그런?

말이 모순적인데 이는 셰프들 하는 짓이 온통 모순 덩어리라 그러함. 모순을 사실대로 현시하려면 모순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 이외에 달리 방도가 없음.


대부분의 셰프들의 시그니처 메뉴 속 셰프's 스토리를 보면 어린 시절 경험이나 ..  주방 막내이던 시절..  혹은 일상적인 가정식의에서의 새로운 경험 따위에서 시작함.

사실 누구에게나 어떤 요리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은 있고 셰프와 이들의 차이는 대부분은 생각이 머리에 스쳐 지나가고 말지만 셰프들은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을 붙잡을 도구들(조리 스킬)이 있기에 그걸 요리로 구현 해낸다는 거 정도?

그리고 셰프들의 경우는 그들이 알고 있는 조리방식의 다채로움과 지각할 수 있는 맛의 섬세함 만큼이나 일반인들이 흘겨 지나갈 것에서 주목할 만한 것을 많이 발견하고 또 그것을 각각의 형식에 옮겨 담을 수 있을 텐데 문제는 떠오른 영감을 형식으로 이식함에 있어 그게 형식 위주냐? 아니면 영감에 대한 변주의 의지적 정도(?)의 정도냐? 이냔 건데, 내가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지만 지나치게 형식 위주라는 거.


이 형식성에 대한 증거로

일단 첫째는 그들이 선보이는 전위가 아래로까지 쉽사리 내려오지 않고 위에서만 맴도는 이유 자체가 이것에 기인한다 생각함.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문학에 고매한 학식층도 그렇지 않은 일반인도 너 나 할 것 없이 흔히 알고 또 사용하는 말. 그 말의 함의야 깊겠지만 그 말 자체는 그 말의 진의를 알지 못하는 이들조차도 널리 사용하기에 이르는데 이는 저 말 자체가 예술의 본질을 잘 담아냈기 때문이라 생각함. 현대의 예술 종사자들과 비평가들은, 철학가들이 그 예술가 일반까지 일반 대중과 합쳐 철학자와 철학자가 아닌 사람으로 나눠버릴 것이란 걸 아는지 모르는지 대중을 가리켜 이만큼의 교양은 갖춰야 자신들이 향유하는 진짜 예술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며 선을 긋곤 하는데, 이는 오만한 개소리에 불과하다 여김.

확실히 보다 더 아는 게 예술을 풍부하게 즐길 수 있게는 해 주겠으나 예술을 진정으로 즐기는 것은 감성적으로 인식하는 것이지 이론을 배워 그 표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춤이 아님. 또한 예술가가 예술을 선보일 때도 가장 아름다운 작품은 예술의 언어가 표면에 드러난 작품이 아닌 예술의 언어가 안으로 수그러들고 그 아름다움의 본질이 전면에 드러난 작품이라 생각함. 마치 셰익스피어의 해당 문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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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수의 전복 타코"

근데 여기에 그런 아름다움의 형식이 고개를 숙이고 아름다움의 본질이 그 위로 치고 나온 그 같은 게 있나?

없지 않나?

대부분의 파인다이닝 요리가 그러하지만 이건 이걸 의도했고 저건 저걸 의도했고 이건 이것을 말하기 위함이며 저건 저런 측면을 강조. one vision 이란 노래처럼 하나의 터치(기교)에 하나의 맛(의도) 그리고 그것들의 합.

먹어보지 않아도 그 생김새 자체가 나 형식주의요 하는 선언이 배경에 깔려있지 이것 자체가 모방의 실례가 아닌 계승의 실례로서 이 형식의 일부 또는 전체를 다른 모방자가 베끼게 함에 그치지 않고 이 요리에서 느껴지는 어떤 정신적 요소를 또 다른 창조자가 무언의 형태로 계승할 수 있게 함을 독려하는 형태는 전혀 고려돼있지 않음.

예술작품에 있어서의 어떤 정신적 요소의 결핍으로 모방만이 가능하고 계승은 불가능함. 이것이 파인다이닝 문법이 위에서만 맴돌고 아래로는 내려오지 못하는 연유라 생각함. 단순히 내용을 몰라서가 아니라, 내용을 모르더라도 "죽느냐 사느냐 ~"등의 구문이 꼭 햄릿을 읽어본 적 있어야만 그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정신이 있다면 형식을 초월한 정신은 어디서든 교류되고 계승될 수 있는데 그 정신에 해당하는 부분이 사멸되다시피 했으니 계승될 껀덕지도 없는 거.



그리고 또 하나가 요리를 자꾸 좁쌀만 하게 만드는 것.

이게 형식에 치우쳐진 두 번째 이유이자 그들이 그들의 영감의 원천인 할머니의 손맛과 달라진 가장 큰 차이점이고  또한 "타이트한 간"에 이어 안성재의 두 번째 트레이드 마크인 "이븐함"강조의 연원이라 생각함.

단도직입적으로 왜 좁쌀만하게 만드는 걸까?

답: 맛에 깊이가 없어서

미슐랭 쓰리 스타의 음식이 왜 깊이가 없을 수 있느냐 할 수 있으나 정확히는 디테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고(내가 임의로 구분) 하나는 구조(구조라고 해도 되고 설계라 해도 되고 형식이라 해도 되고 말하기 나름)에서의 디테일이고 또 하나는 정성에서의 디테일.

미슐랭 음식들은 대개 전자는 출중한데 후자는 전자의 출중함으로 어떻게든 찍어누르고자 함이 일반이지 후자가 전자의 출중함만큼 대등한 크기로 형성돼 있지 않음. 근데 문제는 대중은 어떻게 보면 셰프들이 대중을 기만하거나 스스로를 속이는 것 이상으로 이 정성에서의 디테일을 자각하지 못하고 또 설사 자각하더라도 - 부르디외라는 사회학자의 아비투스 이론이 말하는 것처럼 - 자신이 태생적으로 가진 것을 상류층이 선천적&후천적으로 전유하는 것보다 스스로 못하다 여겨 이를 부정하고 자신을 낮추며 대세에 쉽사리 순응해버려 결국 미식 권력이 그대로 깔아주는 문화적 위계를 내면화 시키기에 이르는 것에 있단 점인데....

이게 참으로 참담한 일이라 생각함.


지금부터 말하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 경험들에 의거한 사유들로

일단 시작은 앞에서의 감자, 고구마, 무, 마 등의 뿌리 식물 생식하기에서처럼 나도 그걸 생식하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그걸 생식하는 어르신들이 그 맛을 그것에서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하다시피 할 신세대가 느끼는 것과 같은 맛을 느끼고도 그것에서 흡족함을 느껴 그 맛을 즐기는 것이라곤 생각되어지지 않음.

덤으로 나도 수중에 돈이 많지 않기에 수제 버거를 좋아하고 내 최초의 수제버거는 호텔 셰프 출신의 지극히 정석적인 버거였는데 난 그 버거집의 두툼한 소고기 패티와 그 위로 치즈 한 장 올려 휴지한, 그리고 버거 번을 파니니 프레스로 앞뒤로 구워 나온 디테일이 좋았음. 그러나 17년경에 오픈한 그 집이 점점 사장세로 접어든 수제버거의 인기와 체인점화된 수제버거집들 아성에 밀려 결국 20년도 전반기에 문을 닫기에 이르렀는데 개중에 한 배달 어플의 댓글. "이 버거를 왜 이 가격 받고 파는지 모르겠다. 맥도날드 xx 버거보다도 못하지 않나?" 사장님(셰프님)은 배달 어플의 댓글 하나하나에 친절히 답을 해주셨었고 아마 그 같은 댓글들에 꽤 충격을 먹은 것 같아 보이셨음.

맥도날드의 xx버거는 안 먹어봐서 모르겠고 무슨 버거였는지도 기억이 확실치 않으나 요 근래의 맛피아의 모짜렐라 버거를 기준으로 해서 비교해 보면 나의 수제버거는 의도된 맛 자체는 분명 그보다 단순하긴 했음. 아이올리 소스니 뭐니 이것저것 코스트가 허락하는 한 덧씌울 수 있는 대로 덧씌운 고든 램지 버거와는 말할 것도 없고.

질 좋은 버거 번에 잘 구워진 쇠고기 페티와 그 위에 적절히 녹아있는 치즈 한 장.. 버거 만들며 그제서야 홀에서 뜯어낸 신선한 야채 슬라이스에 미니 오이피클 슬라이스.. 천트니 소스 약간. 심플하다면 심플한 구성이었고 강점은 그것을 알바생이 조리하는 것이 아닌 30년 경력 셰프가 직접 조리했다는 거. 문제는 그게 아무리 각 요리의 부분부분이 원래 그렇게 다뤄져야 하는 데로 디테일이 잘 살려져 나온 요리라 한들 평소 먹어온 요리가 그 같은 고려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애초 그 같은 고려가 인지되지도 않을 알바생들이 만든 요리였다면 흔히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속설처럼 그러한 디테일 역시 지각되지도 않는다는 거. 그리고 그런 일반적 인식 속에서 정석적이라 그래서 심플한 버거는 맛있어야 할 이유 없는 심플하기만 한 노맛의 왜 먹는지 모르는 버거로 전락해버리게 됨. 반면 맛있어야 할 구조적 디테일을 잘 살린 맛피아의 모짜렐라 버거 같은 것들은 그게 조리의 디테일이 고려될 수 없는 환경에서 만들어진다 한들 맛있어야 할 이유 하나만으로 떠받들어지고.

둘 다 같은 셰프의 손길을 거친 버거인데 이토록 대중의 평가는 상이하게 다르고 사실 의도하는 바도 달라서 이 다른 점을 중점적으로 해서 나눈 게 "정성에서의 디테일"과 "설계에서의 디테일"임.



물론 그래서 너가 정성에서의 디테일로 치부하는 너가 좋아했다는 그 수제버거집의 익힘의 정도도 역시 안성재가 중요시하는 익힘의 정도와 비슷한 것으로 결국 그들 역시도 중요시 여겨 갖추고 있는 것 아니냐? 즉 동시에 설계에서의 디테일인 것일 수도 있지 않느냐? 되물을 수 있지만,

그런데도 수제 버거집 셰프님은 알바생 안 쓰고 본인이 신경 쓰며 구웠고 나폴리 마피아는 애초에 알바생이 구울 것을 전제로 레시피에만 신경 쓰잖아?

중요한 것은 현재 그것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가 아닌 그것을 어느 정도로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둘러싼 방향(입장)은 어떠하느냐? 임.


각각의 차이는 이데아를 무엇에 두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짐.

정성에서의 디테일은 본디 그 셰프들도 그 셰프들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한정적 상황 내에서 어떻게든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주고자 한 마음에서 시작된 것으로 당연히 각 재료의 가장 맛있다 여겨지는 조리 방식을 거쳐가기에 통념적으로 적절히 조리 매뉴얼이라 합의된 것을 거치지만 궁극적으론 거기서 자신의 의지를 개입해 더 나은 것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갈망에 있음.

흔히들 조리 비법이라 여겨지며 대를 이어 전수되기도 하는 그 같은 것들. 이 과정을 거친 것들은 대개 겉으로 드러나는 방법론적 변화에 있어선 본래의 것과 큰 차이가 없음. 그저 뭘 넣거나 순서를 바꾸거나 하는 등의 아주 작은 한 걸음을 가졌을 뿐이니까. 관건은 그 한 걸음이 내용면에선 만 걸음과도 같은, 그 이전에 통상의 문법에 의존해서 그 안에서 소극적 변주만을 주어 다채로우나 전혀 새롭지는 못한 것들만을 만들어내는데 안주하던 이들이 만들어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낸다는 것. 이는 그 모든 변화가 기존의 문법에 순응하지 않고 스스로의 감성적 직관을 믿어 자식에게 있어서 건 손님에게  있어서 건 그저 더 맛있는 음식을 해주겠단 일념 하나라 짜낸 것이기에 기존에 없던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거라 생각함.

간단하기에 계승될 수 있고, 계승의 또 다른 요건인 심미적 아름다움도 굳이 셰프들의 것처럼 플레이팅 따위로 인위적으로 애써서 만들어내지 않아도 그 자체로 충족시키기에 자연히 퍼지게 되는.


반대로 설계에서의 디테일은 역시 타이트한 간을 비롯 엄밀한 익힘 정도나 그 같은 것들을 따지는 과정을 포함하나 요건은  따지는 목적이 철저히 설계, 내가 그러한 것을 할 수 있음을 그 요리의 구매층에 알림을 목적 - 이게 항상 의식적으로 이뤄지진 않더라도, 무의식 속에 은연중에 행동 원리로는 내재된 -으로 함에 있다는 것.

따라서 구매층에 따라 자연히 그러한 디테일의 정도가 차등적으로 나눠 적용되게 됨. 애초 그걸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신념은 누구에게나 자신의 최선을 보여주겠다던 정성에서 비롯된 것이지 상대의 요구 수준에 부응해 - 그 요구 수준 자체가 다시 그러한 움직임으로 빚어진 타성적 결과란 게 문제지만 - 그에 맞춰 나의 유능함을 최대로 내보이겠다는 알량함에서 비롯된 게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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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흑백요리사 관련 수많은 콜라보 상품들이 쏟아지는 연유 역시도 이것에 있음. 그게 꼭 자본주의라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이전에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력 자체가 한없이 낮고 또 애당초 위에서 논한 것처럼 그들의 요리 이념 자체가 자본주의 내에서 설계되었으니까. 결국 설계의 디테일은 요리의 구매층을 향한 능력 증명이고, 그래서 구매층이 바뀌면 디테일도 따라 바뀐다.라는 것인데 이게 자본주의의 메타언어랑 다른게 무엇이지?

오이디푸스 신화가 말하는 것처럼 방송에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익힘의 정도를 평가 기준 삼아 저 잘났다는 듯 말하는 이들은 결국 그 같은 게 지켜질 턱이 없는 콜라보 상품으로 회귀하는 게 연어의 귀소본능과도 같은 어떤 자연적 본능임.

셰프 군단이 자본주의에 맛들려 타락해 저 같은 극악무도한 콜라보 제품들을 출시한 것이 아니라 셰프들의 본성이 이미 그것을 향해 있었다는 말. 음식에는 본성이 없어도 이 같은 것을 따짐에는 본성이 있고 디테일이 엄격히 지켜진 파인다이닝과 그런 것이 상당수 무시된 시판 제품들 이 둘의 본성은 전혀 다른 것 같아 보여도 실제는 같다는 게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


그리고 그러한 것의 홍수 속에서 인정받을 만한 의도된 설계가 있는 맛있는 다채로움을 만들어 내지 못한 개인 업장들은 점점 더 경영난이 악화돼 줄줄이 폐업 위기에 처해있고.

그 레스토랑이 들이 얼마나 한 두 가지 단출한 맛의 배합의 밀도나 중후함들을 신경 쓴다 한들, 사실 그게 셰프들이 방송에서 떠드는 본연의 맛이라 여겨지는 표상과 이념적으로 같은 것인들 대중(여기서 대중이란 인스타 맛집충은 물론 파인다이닝&오마카세 주 수요층 전체를 말함)은 더 이상 그 같은 걸 고려하지 않음을 넘어 인지의 밖에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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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역. 벨라튀니지. 양고기 훔무스. 7500원.
성대역 바로 옆 지하에서 지중해식 퓨전요리로 대학생과 인근 외국인들 상대로 장사하는 곳. 해당 레스토랑에서 해당 메뉴를 가장 좋아하고 이만한 가성비는 수원은 물론 전국을 통틀어서도 많지 않다 생각함.

이 접시의 장점은 한 접시 내에 7,500원이란 가격 무색하게 거의 모든 식감과 맛이 어떻게든 다 들어 있다는 거. 전체적으로 이 레스토랑의 추구하는 방향 자체가 그러함. 그것을 가장 잘 드러내는 메뉴가 이것이고. 원래 레스토랑의 정체성은 그 레스토랑이 가장 싼 메뉴를 취급하는 방식에 있다 보는데 잘 모르더라. 싼마이하게 맛있는 맛을 추구하는데 적당히 무게감이 있으면서도 그게 과하지 않음. 드러냄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으나 그래도 몇 가지 맛의 깊이감 있는 배합보단 다양한 맛을 스스로 느껴 지각하게 함을 신경 쓰고 이것이 우연히 파인다이닝식 깊이가 문화적 타성으로 그 아래로 침투해 빚어진 다채로움의 코드와 맞아떨어져 현 시국에도 별 영향받지 않고 내 좋아하던 줄줄이 폐업한 다른 음식점들과 달리 나름대로 장사를 이어나가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곳 드묾.
폐업한 데도 어떤 코드가 대중적 기호와 안 맞는지 하나하나 집어줄 수 있으나 생략하고.


반면 파인다이닝식 문화를 그대로 수용해 장사하는 곳들이 있는데 이런 곳들의 큰 문제는 그 깊이가, 적어도 파인다이닝 셰프들 본인은 그것이 그들의 창시자이니 일정 부분 갖추고 있을지 몰라도 아래로는 말 그대로 형태의 정형적 모방만을 하기에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다는 거. 어디라고 말은 안 하겠지만 성대역에도 이런 곳 몇 군데 있음. 그런 사특한 곳을 가느니 차라리 난 성대역에 투박하게 필리 치즈 스테이크 파는 데가 있는데 그곳을 가겠음.

일전에 몇 년 창원에서 지낼 때 우연찮은 결심으로 그 인근의 파인다이닝풍 느낌 내는 뇨끼 집들을 모조리 찾아가 먹었는데 별로 맛이 없었음. 와인을 하나라도 더 팔아 보려고 와인 맛을 안배해 메뉴를 내는 집들부터 - 이건 크게 잘못됐다 생각함. 곁들여 먹었을 때 더 맛있는 것이어야지 무슨 와인 맛을 고려해 요리를 내나? 모든 요리는 그 안에서 내적 완결성을 지녀야 함. - 각종 기교로 그 위로 번잡함을 쌓을 수 있는 치사량까지 쌓은 데까지.
그들의 한 가지 공통점은 그러면서 정작 뇨끼 자체는 별 맛이 없었다는 거. 이게 대표적으로 형식을 계승(모방) 한 부작용의 사례라 생각함.

반면 동네에 몇 번 봉골레 등을 먹으러 가 보았으나 백종원의 롤링파스타 식의 치킨스톡을 풀어 맛 내던 곳이라 망설여졌던 데가 어느 날 뇨끼를 메뉴에 내게 되면서 크게 홍보하길래 가 보았더니 의외로 맛이 좋았음. 소스가 각종 기교로 잡스럽게 덧칠해 놓은 통상의 파스타집에 비해 여전히 크림에 스톡 푼 평범한 소스였는데도 불구하고. 뇨끼 자체가 맛있었달까? 대부분의 뇨끼들은 일단 크기가 작고, 또 작을 뿐만 아니라 감자 맛도 안 나서 이게 뇨끼 인지 파스타인지 의문인 곳이 대부분이나 해당 레스토랑은 나이프로 베어 먹어야 할 정도로 뇨끼가 컸고 주문 즉시 만든다 하였는데 그래서인지 감자 맛이 살아 있었음. 그 위로 소스야 뭐.. 그게 평소 좋아하는 형식이건 아니건 간에 곁들여서 오히려 처질 건 없는.

생각해 보면 그런 큼지막하고 맛있는 뇨끼 위로는 잡스런 기교가 그다지 불필요한 거 아닐까? 싶음. 그래서 이탈리아 할머니들도 손주들에게 뇨끼를 만들어줄 때 대개 한국식 파인다이닝에선 절대 하지 않을 토마토소스에 버무려 버리거나 평범한 세이지 버터소스에 내버리는 것처럼. 어쩌면 그 같은 뇨끼 요리의 이념은 호화롭고 전위적인 옷을 잔뜩 걸친 가냘픈 몸의 명품 모델과 같은 걸지도 모름.

그 레스토랑의 셰프님은 그저 인건비 절감 목적으로 요리사 출신이 아닌데도 함께 일하는 아버지와 정성껏 뇨끼를 준비한다 한 게 이태리 할머니들과 같은 이념이고, 파인다이닝식을 위시한 지방 레스토랑들은 뇨끼뿐만 아니라 다른 데서도 보이는, 예를 들어 비스큐 소스 파스타에서 소스 자체는 또다시 코스트가 허락하는 수준만큼 나름의 공을 들여 파인다이닝의 것과 얼 비슷한 것을 만들어내나 면만큼은 파인다이닝이 면에 있어서도 생면으로 잔뜩 군기 잡으려 하는 것과 달리 일반 대중이 의외로 면에 무지하다는 이유로 싸구려 건면으로 때우려 듦이 역시 모델들을 내세운 패션 업계의 이념과 비슷한 게 아닌가 싶음.

근데 문제는 파인다이닝 셰프들 자신도 같은 입장이 되면 같은 짓을 한다는 것으로 당장 파인다이닝 셰프들이 파스타 체인이나 수제 버거집 체인을 내면 할 짓이 그것이고 당장 하고 있는 콜라보 상품들도 그와 같은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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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만 매달리는 평범한 철학자와 독자적 사고를 하는 사람과의 관 계는 역사 연구가와 목격자의 관계와 같다. 독자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사물에 대해 자신이 직접 파악한 것을 말한다. 그 때문에 독자적 사고를 하는 자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일치하는 점이 있다. 그들의 차이는 단지 입장이 다른 데서 생겨날 뿐이다. 그러나 입장이 다르지 않을 경우. 그들은 모두 똑같은 말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객관적으로 파악한 것 만 말하기 때문이다."


책에만 매달리는 평범한 철학자 = 대중
독자적 사고를 하는 사람 = 셰프들, 급식대가 등.
섬세한 불 조절, 웍돌리는 손기술 등등 전부 조리 과학의 문법이 계량화 불가능한 손맛이나 정성 혹은 어떤 직관 등을 이 정도는 보편적으로 이 정도에 수렴된다로 고정시키기 위해 만든 값들.
무조건 같은 맛이 난다?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임.
무조건 같은 맛이 날 가능성은 낸다. 근데 지각 주체는 다 다르니 무조건적으로 같은 맛은 안 나지.
물론 대체로 같은 맛이나긴 함. 특히 파인다이닝 수요층은 같은 일원화된 형식을 공유함을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하는 이들이니 더 같은 맛을 느낄 테고 그래서 더 그쪽으로 발전하는 실정.
반면 급식의 경우는 어린애들은 제각각 다르게 느낄 수 있고 이 집단 내 개개의 다름의 편차는 적어도 파인다이닝 주 수요층보다는 클 것임. 이때 파인다이닝의 형식성을 강하게 내재한 그래서 균일한 맛있음을 이끌어내는 그들의 요리가 급식에서도 똑같이 균일한 결과로 착륙할까?는 글쎄임.
오히려 급식대가의 같은 맛 재생산은 더 약할지라도 좀 더 재기 발랄한 맛이 아이 개개의 합으로 이뤄진 아이 집단의 입맛의 호응을 더 잘 이끌어 낼 수도 있음.
그리고 이게 위 글에서 "단지 입장이 다른 데서 생겨날 뿐인 그들의 (디테일의) 차이".
그 이외 그들이 맛에서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건 크게 다르지 않음.


안성재에게도 자식이 있고 그 자식 입맛 맞추기가 쉽지 않을 것이고, 파인다이닝 수요층에도 부모가 있을 것이고 그 부모의 집밥을 싫어하지 않을 텐데 급식대가라면 좀 더 쉽게 맞춰줄 수 있을 것이고.

물론 절대적 실력 차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셰프의 요리를 먹는 대중은 의도를 넘어서서 지각하지 못하는 반면,
요리를 설계할 때 전체 의도 속에 각 부분을 설계하는 셰프는 형식 밖의 요리를 접하더라도 그 요리의 각각의 의도를 전부 종합해 전체 의도를 심상함은 물론 그 안에서 다시 각기 조합과 배려 등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에서 요리를 평가할 것이란 말.
그 과정에서 본질적 차이는 줄어든다.

문제는 대중을 형식 의존적으로 길들이는 주체 역시 셰프들이란 점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좋은 맛”을 특정 기술과 문법의 결과처럼 제시하고, 대중은 그 형식을 통해서만 맛을 읽으려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셰프들 자신은 그 형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각의 영역을 가장 깊게 고민하는 집단이기도 하다.
결국 셰프는 대중을 형식 속으로 견인하면서도, 동시에 형식 바깥을 가장 많이 응시하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형식이 충분히 평준화된 순간, 셰프들 사이의 차별화 역시 다시 감수성과 해석의 영역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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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명장 체인 빵집들을 비판하기 위해 그렸던 어떤 그림.
다시 보니까 지금 말하려는 것을 좀 넘어선 것들이 섞여 있긴 한데 뭐.. 전체적으론 같은 세계관이니 이해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 함께 논해보고자 하겠음.


우선 전체의 전제는 셰프들도 한 재료가 깊어지는 것에 관해서, 그 재료의 맛 전체는 알지 못한다임.
위에서 앞서 "모더니스트 퀴진" 속 당근 수프의 레시피도 더 익숙하고 자극적인 버터의 맛에 당근의 맛을 옮겨와 해석하기 쉽게 변형시키는 것에 불과하니까.
최강록 셰프를 우승시킨 호박잎 우니 역시, 셰프들 끼리는 호박잎 맛, 우니 맛 각각을 모르는 이 없을 텐데도 그 조합이 그 이전에 없던 조합일 수 있는 것 역시도 호박잎 맛이 그 안에 우니를 품을 때 그 이전에 지각된 적 없는 호박잎이 갖고 있던 또 다른 맛의 방향성이(우니 역시 마찬가지로) 깨어난 것이니.
이는 어쩌면 쇼펜하우어의 의지 철학이 의지는 표상 속에서 인식된다 하는 것과 같이 결국 한 재료의 맛은 한 셰프가 혼자서 다 규정할 수 없는 무한한 맛의 가능성을 품은, 그러니까 해석 시도(표상) 이전엔 맛의 가능성들의 총체(의지)로 만 남아 있는 상태라 생각함.

신동민 셰프가 사과가 해석될 수 있는 여러 맛의 가짓수를 그의 조리 스킬로 보여주고자 했을 때 안성재가 그 모든 것들 보다 사과 하나가 더 맛있다(풍부하다) 한 연유도 같은 맥락.
가정 등 파인다이닝 문법의 타성에서 자유로운 곳의 요리와 셰프들의 요리의 외견상의 가장 큰 차이인 크기와 다채로움의 차이의 내재적 함의는 거부될 것을 고려함의 정도 차에 있음.

가정의 어머니들이나 오래된 노포의 이모님들의 경우는 물론 요리 자체는 최대한의 정성을 쏟겠으나 만들어진 이후론 거부되는 것을 상정치 않으니까. "너가 안 먹으면 어쩔 건데?!" 이게 그 요리 주체들의 공통된 심정임. 각각의 요리 주체들은 자신의 요리 속 재료의 그 재료에서 자기가 중요시하는 해석의 포인트를 가능한 한 충만하게 드러내려 하는데 애를 쓰지 그 포인트를 상대가 가장 잘 이해할 만한 방식으로 변용해 드러내는데 애를 쓰지 않음. 그들이 표상하는 사랑의 방식 자체도 그러한 투박함 속에 상대가 고려돼 있지 않은 듯하나 그럼에도 더 진심인 그 같은 방식이니까. 이것에 있어서 그들이 자식에 내놓는 요리는 그 사랑의 형식 중 하나이고. 따라서 그 충만함의 크기만큼이나 투박해서 재료는 작아지지 않음.

... 그러니까 글쓰기를 예로 들어서 흔히 작가의 의무는 완결을 내놓고 글을 쓰는 것이라 하지만 생각을 다 해봤는데 완결이 안 났을 경우 완결이 안 난 채로 그대로 내는 거 역시 무리하게 완결을 내는 것보다 어쩌면 더 아름다운 것일 수 있음.
사실 "완결"이란 대개 가치판단에 치중한 것들이고 그래서 그런 글에서 완결 역시도 대중이 원하는 방식으로 민족은~ 국가는~ 그런 식으로 입맛에 맞게 가치판단해 주는 것에 불과하니 그 같은 것을 안 할수록 오히려 솔직한 글이지.
위의 어머니의 요리(사랑)가 그러함. 그걸 최대한 수용되게끔 바꾸고자 함이 오히려 글에서 소비층을 고려 결론을 바꾸는 행위에 해당. 반면 무책임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그대로 최대한 드러냄이 오히려 솔직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일 수 있음.

반대로 파인다이닝의 셰프들은 한 재료에서 자신들이 본 것을 대중도 최대한 동일하게 봐 주기를 바라니 그 재료에서 자신이 그 의도로 조리한 것 이외의 것들을 해석에 불필요할뿐더러 자기의 해석을 망칠 수 있는 또 다른 잡음으로까지 여겨 이를 소거하려 드는데 그래서 그 같은 스스로 해석한 부분만 모아 다채롭게 합쳐 놓느라 크기가 작아지는 것이라 생각함.

그림에서 A와 B는 개별 인식 주체로서 해석할 수 있는 맛의 정도에 해당함. B가 A에 비해 눈에 띄게 큰데 이 크기의 맛의 지각에 있어 최초의 인식일 것이라 가정한 재료의 가장 덜 조리된 맛의 가능성을 지각할 수 있는 정도의 차이임.

B는 b의 결과이고 A는 a의 결과로 b에서의 큰 원은 어머니가 사랑으로 던져놓은 무식하게 큰 요리를 추상화한 것이고 a의 중간의 작은 원은 셰프들이 안배 속에 잘라낸 주 재료의 안그래도 작은데 해를 거듭해 갈수록 더 작아지는 조촐한 크기를 의미함.

어머니의 투박한 요리는(b)는 의도된 해석의 덩어리 이외 다른 가능성의 더미도 함께 던져지지만 문학 이론에서 숱하게 말 되어지는 것처럼 해석자가 꼭 창작자의 의도대로만 느껴야 할 필요는 없기에 불필요의 더미 속 창작자의 의도를 같은 방식으로 느끼려 노력함 자체도 큰 소요가 필요하나 이에 그치지 않고 다른 해석의 가능성들을 포착해 또 다른 분기로 이어지게 되기도 하는 등 일련의 행위가 맛의 지각에 있어서의 구성적 생성 능력 자체를 증대시키게 함. 그래서 B처럼 커짐.

반대로 셰프들의 잘 짜여진 요리(a)는 원 위아래로 이런저런 것들이 합쳐져 결국 사실 섬세한 맛이라는 걸 제하면 파리바게트 피자빵과 크게 다를 것도 없이 바로 옆의 잡탕밥과 같은 뒤섞인 추상적 형태를 띠게 되는데 이걸 세분화해서 하나하나 세심하게 느끼는 능력은 뭐.. 그 문법안에서의 유희의 정도야 즐거울지 몰라도 어떤 재료의 원색적 맛을 느껴 그것을 새롭게 전유하려 드는 의지의 정도는 발전이 없음. 그 결과가 A처럼 여전히 작은 것.

그럼 b에서 큰 직방형 원 내부에 선 그어놓은건 무엇이냐?
그러한 b의 인식 주체가 맛에 변형을 주는, 앞서 말한 정성에의 디테일의 이데아에 해당하는 것을 시각화해놓은 것임.

진정한 변화는 a처럼 위아래로 뭘 덕지 덕지 붙이는 것에 치중치 않고 기존의 정성적 형태에 누를 끼치며 본질적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함에 있다는. 일단 내놓는 부분의 크기가 커야 변화의 의도가 덧대졌을 때 a와 같이 호박에 줄그어 수박 되는 형태로 감싸는 포장지가 달라졌을 뿐인걸 변화라 하는 허망한 소리를 않고 그 의도가 그 내부로 베어 들어가 본질을 바꿔놓으니까. 그 직방형 원 위로 작은 빗금 친 원이 바로 그런 각 의도들이고 이어진 화살표와 함께 직방형 원 안에 쳐진 빗금이 재료를 침식해 변화시킨 것을 의미함. 위에 작은 파란색 원들은 이게 원래 자주 가는 빵집의, 근데 그 제빵사님이 자꾸만 빵 위에 씨앗을 뿌리는 다소 올드 한 취향이 있는데, 그 빵집의 식사빵들을 시각화 한 것이라 그 씨앗에 해당함. 자꾸만 크루아상 배를 갈라 뭘 넣으려는 식의 잡스러운 기교에 마음을 뺏기지 않으면 빵 위에 적당한 씨앗류를 뿌리는 단순함만으로도 근데 그 단순함이 이전엔 시도되지 않던 것이고 그런 단순함에 담긴 생각의 크기만큼 기존의 통념적 빵 맛을 크게 변화시킬 수 있단 것을 시각화하기 위한. 근데 그게 하기 힘드니까. 제빵사의 경우는 맨날 기록하며 발효실 앞에 서있어야 하고, 요리사들의 경우는 육수들을 끓이며 매번 그 앞에 대기 타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채 찾아올지도 모를 영감에 시간을 죽치고 있어야 하니 자꾸 잡기에 치중해 본질적이지 않은 사물의 외견만을 중시하게 되는 셈. 또 일단 그건 대중들도 보다 분명히 치하해 주니까. 그게 보다 더 용이하게 식별되어지는 위대함이니만큼.

파인다이닝은 자꾸만 느끼기 쉽게 하고 또한 더 많이 섬세하게 느끼게 하는데 치중하여 뭘 갈아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자꾸만 재료를 갈아 크기를 줄일수록 재료의 감수성에 대한 크기도 함께 줄어든다 생각함. 이는 파인다이닝 업계 그 자체의 발전에 있어서도 그다지 이롭지 못하다 봄. 왜냐면 창조자와 이해자로서 서로 의견을 주고받아 함께 이끌어나가야 할 소비층의 위치를 그저 별다른 의지적 행함이 없이 셰프들이 주는 걸 시혜적으로 받아먹는 존재로 만들 뿐이니.

또한 이런 파인다이닝 셰프들의 행보 전반은 어느 진취적 개인이 이끌어낸 변화를 과학적으로 접근해 이끌어낸 맛이 더 잘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질 형식에 담아 일반 대중에게 선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생각함. 좋게 말하면 협력이고 나쁘게 말하면 아이디어 스틸. 변화의 근원은 그들에게서 나오는데 실제 유명세를 얻는 건 셰프들이고 셰프들은 그들의 공로를 영감의 원천이라 치하하면서도 그 이상은 되지 못한 채 현 상황과 그들의 위치를 고수하려 하니까.

결국 b에서 a를 추출해 내는 행위.
여기의 어디에 본연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태초에 그것이 갖는 과학적 이점이 원래 과학이란 게 객관적으로 규정됨을 말하는 것이니 본연 소리를 내는 게 아닌가 싶음.
이젠 더 이상 그게 과학적이고 체계화된 것이라서인지 그저 더 용이한 것이라 그쪽으로 향하는지도 알 수 없어졌지만.


요약.

파인다이닝식 당근 수프는
“당근 자체의 존재론적 본질”을 드러낸 게 아니라,
사람들이 가장 쉽게 당근이라 인식하고
널리 맛있다고 합의하기 쉬운 형식으로
당근의 특정 가능성을 선명하게 추출한 것에 불과하다.

요리이건 음악이건 그 이외 예술의 다른 분야건 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보여질 것을 고려해 멋대로 끝맺음 하지 않음이다. 끝맺음을 통속적인 것으로 한다면 그 과정도 통속적이게 되어 삶을 살아낸 결과를 작품에 담아내야 한다는 일반적인 작품론에서의 것을 이행치 못함을 넘어 삶을 살수가 없게되고 살지 못하는 삶은 그 속에서 발견할 것도 발견할 수 없게 만들어 결과도 지극히 통속적인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