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나머지 요약.
요리이건 음악이건 그 이외 예술의 다른 분야건 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보여질 것을 고려해 멋대로 끝맺음 하지 않음이다. 끝맺음을 통속적인 것으로 한다면 그 과정도 통속적이게 되어 삶을 살아낸 결과를 작품에 담아내야 한다는 일반적인 작품론에서의 것을 이행치 못함을 넘어 삶을 살수가 없게되고 살지 못하는 삶은 그 속에서 발견할 것도 발견할 수 없게 만들어 결과도 지극히 통속적인 것이 된다.
'받아들여질 것' 만을 혹은 그래서 그 결과 '증명하고자 함'만을 고려해 요리를 만든다면 요리는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스스로 그 크기를 줄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소비자로 하여금 재료에 대한 감수성의 크기를 줄이는 결과를 불러올 뿐이다.
오히려 감수성의 크기를 키우는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고려하지 않은 어머니들의 요리이며 이러한 감수성이 전제돼야지만 의도된 해석에서 의도한 답 만을 끌어오지 않고 스스로 능동적으로 맛의 가능성을 찾아 해석을 전유할 수 있다.
삶은 보편적이나 통속은 예외적이다.
그러나 맛에 있어선 예외적임이 보편적이고
보편적임이 다시 예외적이다.
그리하여 예외적인 보편적임은 예외적인것 마저도 보편적으로 만들어야 할 당위를 갖고
보편적인 예외적임은 보편적이라서 예외적인 것이기에 뭘 더 할 길 없이 자기길을 갈 뿐이다.
3. 파인다이닝&오마카세 소비층의 경우.
3-1 소비층 자체의 내적 성향
글 더러워서 다시 씀.
다시 쓸 생각하니 속이 울렁거리네.
한 문화가 형식주의로 치닫는다 해도 그럼에도 조자(셰프)와 평론가 무리들의 궁극적 차이는 창조자들은 그럼에도 창조를 하는 하는 입장에 있다는 거.
우선 이전 글에서 다뤘듯 위에가 형식화되면 아래는 돌이킬 수 없이 형식화가 돼버림. 그런 상황에서 위와 아래의 차이는 그저 얼마나 더 구조적으로 아름다운가의 차이. 대중은 '아름다울 이유'에서 밖에 아름다움을 찾지 못하니 자연히 셰프들의 요리를 해설하는 그 평론가들도 그 '맛있어야 할 이유' 이외의 것에서 작품을 해설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됨. 이것도 좋은 자질을 갖춘 비평가들에 한해서고 대부분은 그저 선천적&후천적 환경의 결과로 속한 곳의 언어를 획득해 그 언어로 평가를 하고 있을 뿐인 상황에 불과함. 왜냐면 같은 형식주의로 점철된 세계에서 그 이외의 다른 것을 보는 이들은 그것들을 덜어내고 재조합해 작품으로 빚어내는 창조자들뿐이니까. 그럼에도 다시 끝맺음 단계에선 대중적으로 더 선호될 형식을 두르는 과정을 거치기에 완성된 작품에서 인간 정신의 어떤 측면이 겉으로 보일 일은 더 요원해지지만. 그런 관점에서 한 문화는 그것의 건전성과 무관하게 평론가들의 층위는 예술가들의 것에 빗대어질 수 없다 생각함.
이번 안성재 사건을 계기로 안성재를 심사위원 자리에서 퇴출시켜야 된다는 말과, 그 자리를 몇몇 공신력 있는 미슐랭 유튜버들로 대체해야 된다는 말이 나오는데 안될 소리라 생각함. 후자는 특히 갈 데까지 가보겠다는 소리.
보기에 따라 거악의 주구일 수도 있으나 역설적으로 그런 안성재라 이만한 평을 할 수 있었다 생각함. 이번 일이 있기 전까지 대중의 흑백요리사 심사위원으로서의 안성재에 매료된 주 키워드는 공정한 심사였었음. 근데 이건 큰 착각에 불과함.
예술은 수학 과학이 아닌지라 공정하게 평가할 수도 없을뿐더러 예술에 공정의 척도를 들이미는 순간 예술은 그 스스로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기치(서사)를 잃고 무너져버림. 방송의 여러 순간들에서 안성재가 임기응변으로 적절히 대처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현장에서 직접 고군분투하던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들이었음. 기존 문법에만 의존하지 않고 문법이 서로 충돌하는 변경 지대서 어떻게든 새로운 창조로 이어지기 위해 해냈을 것들이 심사위원의 자리에서의 서로 다른 문법의 작품들이 저마다의 내적 완결성을 뽐내는 상황에 그대로 이어진 것. 결국 시청자들은 안성재의 공정함이 아닌 안성재의 유능함에 매료된 것이고 그럼에도 공정함이 그를 상징하는 수식어로 떠올라 다시 이것을 메인으로 여러 왈가왈부가 되었던 건 그 외에 아는 언어가 달리 없었어서일 뿐이라 생각함.
개중에 한 사건이 있는데 바로 정호영 셰프와 서울 엄마 사이의 치열했던 승부. 무승부가 연이어 나오자 안성재는 기존 문법의 한 귀퉁이로 돌아가 아귀 간을 문제 삼은 것. 이때에 안성재가 해야 할 것은 기존 문법으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그 문법 위에서 새로운 규칙, 모두가 납득하지 않는다 한들 그 자신 스스로를 납득시키면 그만인 새로운 길을 제시했어야 했음. 그러나 안성재는 그러지 않았고 안전한 길로 돌아선 게 해당 장면의 아쉬운 부분. 그리고 이게 다시 위에서 말한 예술이 형식이 될 때 자신의 생각에도 받아들여질 형식을 둘러 스스로를 검열하는 것의 한 예라 생각함.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자기검열마저도 검열할게 있으니 검열하는 것으로 시청자가 설령 의식치 못한다 한들 이 전체는 전체로서 예술가의 유능함을 표상할 때 그 사변의 어딘가에서 그것을 표상하는 방식으로 결국 소비됨에 있다고 생각함.
결국 모든 것은 안성재 였기에 가능했다는 말. ㅇ그가 잘한 것도, 역으로 못한 것도 모두 흔히 여겨지기에 가장 주체적인 자로서 폭풍의 눈에 해당하는, 이 일련의 현상을 추상한 것의 실례에 해당할 인물이기에 가능한 것이었음.
반면 미슐랭 레스토랑(권위)를 평가함에 있어 한 없이 유능하게 느껴졌던 유튜버들은 그 같은 문법과 문법이 충돌해 납득할 만한 새로운 답을 내야 할 상황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음. 겪어보지 않았고 상정해 본 적 없는 상황이니까. 이들의 큰 문제는 대개 자각도 없다는 것으로 그러면서도 수중에 돈은 많아서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할 이런저런 관련 지식과 경험은 많이 습득하고 있다는 것임. 실제로는 하나의 작품이 겉보기에 여러 의도들의 합일뿐인 것으로 드러날 때 그 것보기의 드러난 의도들을 그것에 대응하는 각각의 개념으로 되짚어 설명해 줄 뿐인 이것이 사회에서 칭송받고 떠받들어지니 정말 미적 감수성이 풍부한 것인 줄 안다는 것. 실제로는 그들이 거주하는 곳이 예술가들의 체류하고 있는 곳과 같은 곳일 뿐이라 그 언어를 알고 있을 뿐인 것이고 그 동일 언어 공유의 공통점 보다 큰 게 예술의 정신적 측면의 유무이며 그 다른 언어의 차이점 이상으로 같은 게 이들이나 일반 서민층이나 지식의 대입 없이는 스스로 예술적인 것을 만들어 낼 자질이 없다는 것인데도.
이러한 정신적 요소의 유무에 있어서의 차이는 해석 윤리에 있어서 돌이킬 수 없는 큰 차이로 이어진다.
나~아중에 하려던 말인데 걍 해야지. 답답해서 돌아버릴 거 같음.
예술에 있어서 본질은 정신적인 부분이지 그것이 형태를 갖추고 드러난 형식적인 부분이 아니다. 파인다이닝식의 요리와 일반 백반집에서의 요리가 있다 할 때 두 요리의 근원적 부분은 두 요리에서 보편적으로 여겨지는 맛있는 요리를 향한 열정에 해당하는 것이지 그것이 각기 다른 상황과 조건 그리고 요리사가 속한 계층 속에서 그것이 드러나는 방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아는 안성재라면 다른 문법의 요리, 그가 속한 미슐랭 레스토랑이 보편적으로 사회의 여겨지는 가장 높은 문법이라서, 보다 낮은 단계의 문법으로 쓰여진 문법에서도 그러한 본질이 상황과 만나 드러났을 뿐인 요리의 외적 형태에 신경을 쓰지 않고 내부의 본질을 볼 텐데 요리의 외견이 전부인 평론가들은 그것이 덜 준수된 요리를 보면 떨어지는 것으로 여겨 더 우수한 내가 속한 이것으로 더 떨어지는 그것을 단죄함을 당연시하기에 이르는데 이게 참으로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이다.
좀 더 실제적으로 들어가면 안성재나 일반적인 음식점을 경영하는 입장이나 결국 처한 상황은 자신의 요리 철학, 코스트, 마케팅, 대중의 요구, 신념의 타협 등에서 본질적으로 같아 자신(안성재)의 요리가 이 모든 것들을 거쳐 만들어진 결과이니 상대의 요리에서도 같은 걸 보려 하지 않아도 눈에 보이는 형태를 넘어 그게 먼저 보일 것이지만, 비평가들의 경우는 자신들이 속해있는 곳이 가장 우월한 것으로서 그 이외의 것을 평가함에도 그 우월함이 열등함으로 소급 적용된 것을 기점으로 그 시각에서 계산해들어간다는 소리인데.. 와닿게 설명하기가 힘든데 존나 다르다 암튼.
그래서 그들은 가끔, 가끔이라 하기엔 상당히 자주 안성재와같은 현업의 전문 셰프라면 절대 하지 않을 비평을 비평이라고 내놓는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유튜버 텐의 안유성 명장 <가매일식>에 대해 평한 유튜브 영상이 있다.
요지는 이러하다.
안유성 명장의 <가매일식>은 명장이란 말 무색하게 서울 유수의 오마카세 집들에 비해 떨어지는 부분이 너무 많다. 이것도 부족하고 저것도 부족하고. 이런 면들을 종합해 볼 때 계속 이와 같이 장사를 한다면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서울) 손님들 대다수가 실망을 할 것인데 이 같은 운영 방식. 정말 이게 최선인가??
서울 사람들이나 타 지역 사람들이 광주까지 가면 얼마나 갈 거라고?
<가매일식>외에도 우리나라가 한 지역에 그 음식점 만으로 방문 목적이 되는 음식점들이 있기나 한가?
서울 파인다이닝과 오마카세씬 마저도 그 음식점들 자체가 그 지역 방문의 목적으로 쓰이지 않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가매>는 지역 음식점이다. 또한 지역에서 사랑받아온 음식점이고 적어도 비평을 하려면 지역주민들 인터뷰를 담아 비평을 하던가 뭔 "정통 오마카세를 즐기는 교양 있는 서울 사람인 내가 보기에 <가매>는 정통스럽지 않아!"야. 이건 그 자체로도 오만한 소리지만 원래의 주 고객인 지역 사람들에 있어서도 그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소리. 사실 서울 사람이 파인다이닝과 오마카세란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것 자체도 서울이란 토양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고 지방의 비슷한 음식점들이 보다 향토화되고 토착화된 것도 역시 지방이라는 장애물이 자리하기에 그렇게 된 것. 서울에 사는 누군가는 이미 외국 요리에 익숙해 바로 오리지널로 갈 수도 있으나 광주에 사는 누군가는 바로 새로운 것으로 가기 버거워 오히려 그 중간지대에서 적절히 고급스러움을 가미한 <가매>가 오히려 가뭄의 단비 같을 수도 있고, 그래서 지방민인데 이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이 그저 오마카세가 지켜야 할 문법이라니...
이래서 이들은 요리 경연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이 될 수 없고 심사위원으로서도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덤으로 지방의 맛을 서울의 맛의 식민지로 만들고자 한다는 데에서 감상자로서도 부적절하고.
앞서 설계에서의 디테일 vs 정성에서의 디테일에서도 논한 바 문화 예술이란 위에서 잔뜩 기교로 온갖 실험적인 것을 할 때에만 발전하는 게 아니라 했다.
덜 만들어진 세계는 보다 더 정성적인 세계일 수 있고 그리하여 덜 만들어진 세계와 덜 만들어진 세계끼리의 충돌로도 새로운 것은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덜 만들어진 세계는 단순히 배움이 부족에 정립에 이르지 못한 세계가 아니라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데 아직 자신의 언어를 갖추지 못한 세계일 수도 있으니 그런 이들에겐 정립의 세계에 뿌리를 둬서 좀 더 다양한 방향성으로 뻗쳐나간 지방의 요리가(사실 이것이 현지의 요리에 뿌리를 둬서 오마카세의 문법을 매개해 뻗어나간 것인지, 오마카세 문법에 뿌리를 두고 지방 고유색으로 뻗쳐나간 건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나 뭐 어쨌든) 더 깊은 인상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선망한다는 서울의 셰프들, 스시 장인들도 지방에 왔을 때 무언가 얻어 가는 게 있어야 되는데 지방이 서울의 아류가 된다면 그들은 지방에서 무엇을 배워간단 말인가?
<가매일식>같은 레스토랑은 서울의 오마카세씬과 같은 오마카세 문법을 공유하는 레스토랑이기도 하나 지방 레스토랑의 터줏대감이기도 해서 그 하나가 바뀌는 것만으로 지방 음식들 노선이 많은 부분이 바뀔 텐데 말이다.
그런 면에서 파인다이닝 소비층은 문화 예술의 물질적&정신적 성장에 있어 지극히 해롭다.
요약: 진짜 창조적 에너지는 종종 완성된 중심이 아니라, 완성되지 않은 주변과 중간지대에서 나온다. 그런데 형식주의 평론과 고급 소비층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중심의 언어로 번역·재단하려 한다. 그래서 문화는 점점 메마르고 획일화된다.
3-2 본래 하려던 말 +@
창원에서 먹었던 가장 맛있었던 돈가스집(현재 폐업함)과
탕수육 해먹고 남은 안심으로 집에서 대강 튀겨먹은 돈가스.
둘 다 맛있었음.
전자를 잣대로 후자를 보면 쓰레기고 그래서 과거의 난 이걸 노맛이라 했겠으나 마인드가 바뀐 현재 시점에선 충분히 맛있었음.
아마 깨닫는 재미가 크게 작용했다 생각함.
냉동실에 얼린 채 보관 중인 통밀 식빵이 있길래 그것을 갈아서 쓰면 막연히 일식 습식 빵가루가 될 거라 여겼으나 안됐고.
튀기는 시간과 온도도 눈대중으로 대강 한 결과 어떤 건 오버 쿡 돼 뻑뻑해지고 어떤 건 덜 익어 버리는 등 위와 같이 됨.
그러나 그럼에도 튀김옷이 최소한 눅눅하진 않아 돈가스의 정체성은 갖게 하였고
그 불완전한 익힘 정도 속에서도 완전 웰던으로 만든 건 아니라 최소한의 육즙과 촉촉함은 보존할 수 있게 됐고.
물론 위의 것이 지켜져야 할 디테일이 더 살아있고 그래서 크게 고민하지 않고 그냥 먹어도 더 맛있게 느껴질 것이긴 함.
그러나 느끼는 것은 느끼려는 의지의 개입의 결과.
아래에서도 위에서처럼 그라데이션을 느껴 먹고자 하면 느낄 수 있다 생각함.
맛은 어차피 본래 실재하는 걸 지각하는 게 아니라 표상(차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먹는 것임. 김도윤 셰프와 최강록 셰프 그리고 윤남노 셰프와 데프콘이 등장하는 어느 1박 2일 카피캣 같은 방송에서 최강록 셰프의 수육이 잘리는 장면을 보고 김도윤 셰프가 '우와 맛있네(?)' '딱 칼 들어가는 것만 봐도 맛있어 보이네'라며 말하는 장면이 있음. 이에 데프콘은 '맛있네는 좀 그렇지 않냐?!' '안 먹었는데도 맛있네는 좀..'이라며 이의를 제기하고 이것에 대한 윤남노의 설명. '요리사들은 알죠 칼 들어가는 느낌만 봐도 내 치아에 닿았을 때 무슨 느낌일까'.
맛을 먼저 지각하고 그것을 표상으로 해석해 내는 게 순서겠으나 맛을 보지 않아도 맛을 보는 것과 같은 상황을 가정하면 표상만으로 맛을 해석해낼 수 있음. 어차피 결국은 맛이 그 자체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표상을 거쳐 드러나는 것이니까.
따라서 내 불완전한 익힘의 돈가스에서도 제대로 익혀진 돈가스에서의 맛을 표상하여 그것으로 맛을 읽어내고자 하면 의지 여하에 따라 읽어낼 수가 있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여전히 그 불완전한 맛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아니니 현재의 맛과 이상의 맛 사이를 계속 오가며 지각하면서 이게 이렇게 느껴져야 하는데 이렇게 느껴지고 이건 이렇게 느껴져야 옳은데 이건 또 이렇게 느껴지네?! 그리고 보면 이건 이거였구나?! 하면서 나름의 재미를 추구할 수 있음. 원래 맛이란 표상이면서 또한 재미인지라. 재미가 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창조(발견)이기 때문이고. 결국 그 안에서 무한히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또 발견할 수 있음.
또 그것을 계속 반복하다 보면 결국 재료의 본질에 가까워져 차이가 있어야만 맛이 지각되지 않고 그 자체로 지각되기에 이르는데 이렇게 되면 큰 차이와 작은 차이 사이의 차이, 그러니까 겉(튀김 옷)은 꺼슬꺼슬하고 속은 촉촉하게 잘 익힌 것과 내 것처럼 개판으로 익힌 것 사이의 차이,는 그다지 큰 차이가 아닌 것이 됨.
뻑뻑해서 촉촉함이 덜 느껴지는 데서도
촉촉함의 속성 그 자체에로의 의지의 자연적 수렴이 촉촉함을 현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그 사물에의 의지의 수렴보다 강하게 나타나기에 속성은 사물을 초월해 의지만으로 깊어지는 것으로서 차이가 옅어지게 되는 셈.
간간이 보면 웰던이 좋다는 이들. 대개의 경우 이들을 계몽되지 못한이라 낙인찍으며 호도하고 야단쳐서 바른길로 들어서게 함을 사명으로 느끼는 게 일반인데 이들 중에서도 웰던에서도 미디엄이나 레어에서 풍부함을 느낄 수 있는 이들이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을 느끼기에 거기에 웰던의 특성을 더해 웰던을 좋아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생각함.
예시를 하나 더 들자면 역시 요 근래 느끼기 시작한 것인데 삶은 달걀의 달걀 흰자에서 달걀 프라이의 달걀 흰자 맛이 느껴진다.
일전엔 육식의 종말 책에서 달걀에 소금을 치지 않으면 아무 맛이 없다는 내용을 본 탓인지 실제 소금을 치지 않은 달길에서도 그 같이 느껴졌고 프라이는 물론 삶거나 굽거나 말이 등 달걀의 각기 다른 요리에서도 각기 다른 맛으로만 지각됐었다.
그러라 아르바이트할 때 간하지 않은 삶은 달걀 하나를 통째로 입안에 넣고 우걱우걱 씹어 먹던 것으로 그 안에서 프라이의 흰자 맛을 느낀 이후론 구운 달걀의 흰자 맛도 그 이외 다른 요리의 다른 버전 맛들도 느낄 수 있게 됐다. 어차피 같은 계란 맛에서 적당히 변형이 된 것이니까. 프라이는 흰자의 그 맛이 기름에 튀겨지며 간이 더해진 맛, 구운 달걀은 흰자의 그 맛이 수분이 부족한 상황에서 뻘겋게 구워져 표면부터 달아올라 그리된 맛, 커스터드 크림이나 이태리 까르보나라의 크림 맛은 반숙 노른자의 다 익었을 때와 덜 익었을 때의 중간자적 위치의 그 맛이 꾸덕해져 설탕이나 바닐라의 단 맛 혹은 양 젓 치즈나 베이컨 기름의 짠맛 등과 섞여 혼연을 이룬 맛 이란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될 경우 음식을 먹고 -> 맛을 지각한다에서 음식과 맛 지각 사이의 경계가 흐려진다.
그런데 무엇에 의해서 삶은 달걀에서 다른 맛을 느끼게 됐을까? 그건 다음과 같다. 이전에 만들어뒀던 어떤 인식론적 도식이 있고 거기에 생각을 덧붙인다.
시작은 우연히 알게 된 기표 기의라는 언어학 개념에서다. 사실 관련 책을 깊이 있게 파본 것은 아니고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얕은 지식에 내 생각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거라 어디까지가 학자 의견이고 어디서부터가 그것에서 분기된 내 고유 사유인지는 분명치 않다. 인터넷으로 알 수 있는 건 개요 정도니까.
그래서 나도 선대의 이론은 간략하게 다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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