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천안문사태 당시 중국 최고지도부 비밀대화록:
천안문 페이퍼 발췌]
월간중앙 2001년 2월호 449-459 pp
"자오쯔양은 動亂 편이야, 당도 분열시키고..."(鄧小平)
"CIA 첩자들이 동란을 부추겼어. 인민해방군 동원해 쓸어버립시다.(李鵬)"
“천안문 페이퍼”(중국어 서명 “中國六四眞相”)의 최초 유출자로 알려진 장량(張良)과 함께 책을 출간한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앤드루 J. 네이선 교수는 당초 입수된 1만5,000여 페이지가 넘는 원본 디스켓에서 중요한 부분을 발췌했다.
5월 16일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긴급회동
1989년 5월13일, 천안문광장의 시위 학생들이 단식투쟁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했다. 5월16일 저녁 정치국 상무위원들, 자오쯔양(趙紫陽)·리펑(李鵬)·차오스(喬石)·후치리(胡啓立)·야오이린(姚依林)이 긴급회동했다. 당원로 양상쿤(楊尙昆·당시 국가주석)과 보이보(薄一波)도 참석했다.
학생들의 단식투쟁이 사회 전체에 광범위한 반향을 불러일으켜 원로들은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다음은 당 중앙 서기처의 ‘5월16일 정치국 상무위원회 발언록’에서 발췌.
자오쯔양 학생들의 천안문광장 단식투쟁이 오늘까지 나흘째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대표들과 대화를 나눴으며 그들의 주장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들의 발언에 계속 귀기울일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단식을 중단하라고 요구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광장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다. 다양한 부류의 인민들이 흥분한 채 슬로건과 기치를 내걸고 대오를 형성해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학생대표들 스스로도 사태를 통제할 수 없다고 한다.
양상쿤 최근 며칠간 베이징은 무정부상태나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은 모든 학교에서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일부 직장 단위에서도 거리로 뛰쳐나왔다. 교통수단 등 다수의 공공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무정부상태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다. 우리는 역사적인 중·소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는데 당초 천안문광장에서 환영식을 열기로 했으나 부득이 공항에서 할 수밖에 없었다.
자오쯔양 내가 북한 방문을 마치고(4월30일) 돌아왔을 때 4월26일자 “인민일보” 사설(4월15일 胡耀邦전 총서기 사망 후에 계속된 학생시위를 반혁명 동란으로 규정)이 사회의 많은 분야에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시위 학생들의 주요 이슈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학생들의 행동이 동란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민감한 문제는 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민주적이고 합법적인 수단을 쓴다면 학생시위도 점차 사라질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5월13일 수백명의 학생들이 단식투쟁을 시작했으며 그들의 주요한 요구사항 중 하나는 4월26일자 인민일보 사설(민주화 시위를 동란으로 규정)에 대한 공식입장을 번복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우리는 4월26일자 사설을 수정해야 한다. 우리(당 중앙)와 학생들 간의 대결국면을 풀 방도를 찾아야 한다. 가능한 한 빨리 사태를 풀어야 한다.
리펑 쯔양 동지, 4월26일자 사설의 공식입장이 대다수 학생을 겨냥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 사설은 어린 학생들의 감정과 우리가 범한 약간의 실책과 문제를 이용해 당과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투쟁을 시작하고 이런 투쟁을 베이징에서 전국으로 확대시켜 전국적인 동란을 일으키려는 극소수 학생들만을 겨냥한 것이다. 이것은 논쟁할 사안이 아니다. 비록 많은 학생들이 4월26일자 사설을 오해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설은 진실을 폭로하는 역할을 했다.
자오쯔양 내가 보기에 많은 학생들이 시위에 가담한 이유는 인민일보 사설이 그들의 시위에 붙인 동란이라는 꼬리표를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당과 정부가(시위에 대해) 변화된 입장을 표명하고 시위의 성격규정을 달리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계속 요구하고 있다. 나는 우리가 이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다뤄야 한다고 생각한다.
리펑 쯔양 동지, 4월26일자 사설의 핵심 구절은 덩샤오핑 동지의 4월25일자 발언(“이번 시위는 치밀하게 계획된 음모” “이것은 동란이다” “그 진짜 목적은 중국 공산당과 사회주의 체제를 거부하는 것이다” “전 당과 국가는 가장 심각한 정치투쟁에 직면해 있다”)에서 따온 것이다. 덩샤오핑이 한 말은 바꿀 수 없다.
자오쯔양 우리는 이번 학생시위의 진정한 본질을 덩샤오핑 동지에게 설명해야 한다. 우리는 시위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바꿀 필요가 있다.
5월 17일 자오쯔양의 실각
5월17일 오전 당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덩샤오핑의 집에서 만났다. 자오쯔양·리펑·차오스·후치리·야오이린 외에도 원로인 양상쿤과 보이보도 참석했다.
다음은 당 중앙 서기처의 ‘5월17일 정치국 상무위원회 회동 발언록’에서 발췌. 이 문건은 덩샤오핑의 판공실(사무실)에서 중앙 서기처 기록을 위해 제공한 서류.
자오쯔양 단식 학생들은 자신들이 주목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어 그들로서는 양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로 인해 우리도 난처한 입장이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들이 단식투쟁과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분리시키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들이 광장에서 나와 학교로 되돌아가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이다. 사태가 긴박하다.
양상쿤 아직도 우리는 (학생 시위가) 국가 이익과 사회 이익에 아무런 폐해가 없다고 할 수 있나? 동란이 아니라는 말인가. 여기 모인 사람들 중 누군가 동란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면 나는 개혁과 개방으로 나아가고 사회주의 건설을 추구할 방도를 찾을 수 없다고 본다.
리펑 나는 쯔양 동지가 학생시위가 고조된 데 대해 주요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상황이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책임도 져야 한다. 그가 북한을 방문중일 때 정치국에서는 쯔양 동지에게 의견을 물었고 그는 사회불안에 대한 덩샤오핑 동지의 대처방안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전문을 통해 분명하게 밝혔다. 그는 4월30일 귀국한 후 다시 정치국회의에서 덩샤오핑 동지의 발언뿐만 아니라 4월26일자 인민일보 사설에 쓰여진 ‘동란’이라는 단어도 승인한다고 재차 말했다. 그러나 불과 며칠 후인 5월4일 아시아개발은행(ADB)과의 회동에서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누구와도 상의 없이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덩샤오핑 동지의 발언과 4월26일자 사설의 정신을 회피하는 연설을 했다.
첫째, 명백한 동란 상황에서 그는 “중국이 큰 동란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둘째, 동란의 목적이 공산당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사회주의체제를 붕괴시켜려는 데 있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위대가 우리의 현 체제를 반대하지는 않으며 다만 그들은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시정하기를 바랄 뿐”이라고 계속 주장했다.
셋째, 극소수가 동란을 일으키기 위해 학생시위를 이용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든지 사태를 악용하려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이는 극소수가 이미 동란을 일으켰다는 당 중앙의 결정에 명백히 모순되는 것이다.
야오이린 나는 쯔양 동지가 어제(5월16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와의 회담에서 왜 덩샤오핑 동지를 언급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현 상황에서 본다면 그것은 모든 책임을 샤오핑 동지에게 씌우고 학생들이 샤오핑 동지를 주로 공격하도록 의도한 것일 수 있다. 이런 행동이 혼란을 더 악화시켰다.
자오쯔양 이 두가지 문제에 대해 나에게 해명할 기회를 달라. 아시아개발은행 간부들과의 연례회동에서 내가 한 발언의 기본적인 목적은 학생시위를 누그러뜨려 외국투자자들로 하여금 중국의 안정에 대한 신뢰를 강화하려는 데 있었다. 나의 연설에 대한 첫 반응은 긍정적이었으며 그때 어떤 문제도 인식하지 못했다. 양상쿤·차오스·후치리 동지들도 모두 당시 연설에 대한 반응이 좋다고 생각했다. 리펑 동지도 (내가 한 발언이) 잘한 일이며 그가 ADB 대표들을 만나면 (나의 발언을) 되풀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고르바초프를 만나 한 발언에 대해 말하겠다. 13차 당대회(1987년) 이래 다른 나라의 공산당 지도자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13차 1중전회가 당의 최고의사결정자로서 샤오핑 동지의 역할을 결정한 사실은 바뀔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나는 샤오핑 동지가 공식적으로는 비록 사퇴했지만 당내에서 계속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합법적이라는 사실을 국제사회가 더 잘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덩샤오핑 쯔양 동지, 5월4일 당신이 ADB와 만나 한 발언이 전환점이 되었다. 그때 이후 학생시위는 계속 악화됐다. 물론 우리는 민주적인 사회주의를 건설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서둘러서는 성공적으로 할 수 없다. 서구식 요소가 덜한 것을 원한다. 우리 10억명의 인민이 갑자기 다당제 선거를 채택하면 문화대혁명때 봤던 전면내란같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나는 여러분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이견을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종전의 입장에서) 물러나느냐 않느냐 하는 점이다.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그들(시위대)의 가치관에 굴복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4월26일자 인민일보 사설의 정신을 철저히 고수해야 한다.
나를 포함해 원로인 천윈(陳雲)·리셴녠(李先念)·펑전(彭震) 동지들은 작금 베이징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대한 걱정으로 노심초사하고 있다. 베이징이 계속 이렇게 가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선 베이징의 불안을 해소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다른 성`지역`현에서 생긴 불안도 해소할 수 없을 것이다.
철로 점거, 폭행, 파괴와 약탈 등 이런 것들이 동란이 아니면 무엇이 동란이란 말인가. 사태가 계속 이렇게 진행되면 우리는 심지어 가택연금에 처해질 수도 있다.
이 문제를 심사숙고한 끝에 나는 인민해방군(PLA)을 불러들이고 베이징, 정확히 베이징의 시내지역에 계엄령을 발동하기로 결론내렸다. 계엄령의 목적은 동란을 한꺼번에 완전히 진압하고 사태를 조기에 정상화하는 데 있다. 이것은 당과 정부의 피할 수 없는 책무다. 나는 엄숙히 이 문제를 오늘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제안하고 여러분들이 이 문제를 논의하기를 바란다.
자오쯔양 결정은 안하는 것보다 하는 것이 낫다. 하지만 샤오핑 동지, 나로서는 이 계획을 실행하기 어렵다. 나는 곤란하다.
덩샤오핑 소수는 다수에 굴복해야 한다.
자오쯔양 당의 규율에 따르겠다. 소수는 다수에 굴복해야 한다.
계엄령에 대한 반발
계엄령은 발동된 후 베이징의 다섯개 구에만 적용됐다. 그러나 계엄령은 수도 베이징은 물론 중국 전지역과 세계 각지에 걸쳐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22사단 병력이 시내로 진주했지만 대다수는 변두리에 멈춰섰거나 시내 거리에서 봉쇄되는 바람에 목적지에 도착하지는 못했다. 5월20일 계엄군에 내린 첫 지시문에서 양상쿤은 계엄군이 공격받는 한이 있더라도 무고한 시민에게는 총부리를 겨누지 말라고 명령했다.
각 성 당국은 관할지역에서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조치를 취하면서 베이징이 절실했던 지지를 표명했다. 5월21일 천안문광장의 학생 지도자들은 승리를 선언하고 광장에서 철수하는 방안을 투표로 결정했지만 동맹휴학을 계속하기 위해 새로 광장에 모여드는 (투쟁)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입장을 번복했다.
베이징 외곽의 대학에서 많은 학생들이 시위대에 합류했다. 계엄령이 발동되기 전날밤 철도부는 5만6,888명의 학생이 5월16일 오후 6시부터 5월19일 오후 8시 사이에 165편의 열차를 이용해 베이징으로 들어왔다고 중난하이(中南海·중국 지도부의 집무실 및 집단거주지) 에 보고했다.
이같은 학생들의 대거 유입이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던 당국에는 더 큰 압박으로 작용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차표도 없이 승차하기를 요구했다. 이들은 열차내 방송시스템을 접수하고 승객들에게 동참을 구했으며 차량의 안팎에 전단을 붙이고 심지어 공짜 음식을 요구했다.
5월22일 천안문광장에 집결한 5만명 중 대부분은 베이징 밖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베이징 시내 대학 학생들은 대부분 학교나 집으로 돌아갔다. 공식기록은 적어도 319개 학교에서 각각 광장에 대표를 보낸 것으로 나타나 있다.
5월 21일 원로들의 후계자 논의
5월21일 덩샤오핑은 다시 당 원로들을 소집했다. 젊은 영도그룹이 사태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당 중앙 서기처의 ‘1989년 5월21일 중요 회의 대화록’의 발췌문. 덩샤오핑의 판공실에 의해 기록 목적으로 서기처에 보낸 문서.
덩샤오핑 최근의 동란 와중에 자오쯔양은 자신의 입장을 완전히 드러냈다. 그는 명백히 동란 편에 서 있다. 실제 발언에서도 그는 분열을 조장해 왔으며 당을 분열시키고 동란을 비호해 왔다. 우리가 여전히 사태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자오쯔양은 동란을 자극했으므로 그를 계속 놔둘 이유가 없다. 후치리도 더 이상 상무위원 자리에 걸맞지 않다.
이날 모임에 앞서 5월17일 자오쯔양·리펑·차오스·후치리·야오이린 등 정치국 상무위원 5명과 양상쿤·보이보 등 원로가 참석한 가운데 계엄령 발동 여부를 표결했다. 투표권을 가진 5명의 정치국 상무위원 중 리펑과 야오이린은 찬성표를, 자오쯔양과 후치리는 반대표를 각각 던졌고(이로 인해 이후 축출됨) 차오스는 기권했다. 여기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보이보가 “덩샤오핑에게 결정권을 넘기자”고 제안했다. 컬럼비아대 네이선 교수는 차오스의 기권 표결은 당시 원로들의 강경한 입장을 감안할 때 사실상 계엄령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계엄령이 발동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분석했다.
천윈 리셴녠 동지가 나에게 상하이(上海) 출신의 장쩌민(江澤民) 동지가 적절한 후보라고 지적했다. 매번 내가 상하이에 갔을 때 그는 항상 나를 만날 때마다 온건한 인물이란 인상을 주었다. 당에 대한 충성심도 강하고 지식도 풍부하다. 그는 (상하이시 당서기로서) 상하이에서 (사태를) 잘 대처해왔다.
리셴녠 나는 4월26일자 인민일보 사설 이후 당 중앙의 정신을 추진하는 데 상하이가 가장 선도에 서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장쩌민은 (사설이 발표된) 다음날 1만명 이상의 관리들을 회의에 소집, 자유주의 경제이론을 보도해온 잡지 “세계경제도보”(導報)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그 조치로 그는 엄청난 대중의 압력을 받았지만 그는 확고하게 입장을 바꾸지 않고 원칙에 충실했다.
중앙의 당·정부·군이 계엄령을 발동했을 때 앞장서 실천에 옮긴 것도 역시 상하이였다. 이런 확고한 자세는 얻기 어렵다. 정치적 행동과 당에 대한 충성심에서 장쩌민은 일관된 사람이다. 그리고 물론 경제공작에도 좋은 솜씨를 갖고 있다. 상하이는 최근 몇년간 훌륭한 경제기반을 세웠다. 나는 그가 총서기감으로 좋다고 본다.
5월 27일 장쩌민을 총서기로 선출
5월27일 밤 덩샤오핑과 7명의 원로들은 덩샤오핑의 자택에서 다섯시간 동안 만나 자오쯔양 후임 총서기 문제를 결론냈다.
다음은 당 중앙 서기처의 ‘1989년 5월27일의 중요 모임 발언록’발췌문. 덩샤오핑의 판공실에서 기록을 위해 당 서기처에 제출한 문서.
덩샤오핑 나는 천윈과 리셴녠 동지와 (후계자 문제등을 )검토 해왔다. 그들은 새도운 영도집단이 11차 당 중앙위 제3차 전체회의(1978년말)의 정치노선과 원칙, 그리고 정책을 계속 수행해야 한다는 점에서 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새로운 영도집단은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서) 심지어 용어조차 (11차 3중전회의 노선 및 정책에 맞도록) 동일하게 해야 한다. 13차 당대회의 정치보고는 당시 모든 대표들로부터 승인받은 것이다. 단 한 단어도 바꿀 수 없다. 개혁과 개방정책은 몇십년간 바뀌어서도 안되며 끝까지 추진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새로운 당 중앙 영도그룹에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이다.
반대하지 않는다면 나는 새로운 정치국 상무위원을 다음의 여섯 동지로 구성할 것을 제안(提案)한다. 장쩌민·리펑·차오스·야오이린·쑹핑(宋平)·리루이환(李瑞環)으로 하고 총서기는 장쩌민 동지가 맡는다.
장쩌민을 총서기로 하고 리루이환과 쑹핑을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추가하자는 제안은 원로들에 의해 거수로 승인됐다. 그러나 이는 정치국 상무위원회만이 그같은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한 중국 공산당의 당헌을 위배한 것이다.
6월 2일 원로들의 천안문광장 진압 결정
6월2일 오전 당 원로인 덩샤오핑·리셴녠·펑전·양상쿤·보이보와 왕전은 정치국 상무위원들과 만났다. 당시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리펑·차오스·야오이린으로만 구성돼 있었다.
다음은 당 중앙 서기처의 ‘1989년 6월2일의 중요한 회의 대화록’의 발췌. 덩샤오핑의 판공실에서 기록을 위한 당 중앙 서기처에 제공한 문서.
리펑 어제 베이징 시당위원회와 국가 공안부가 정치국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두건의 보고서는 계엄령 발동후 동란을 조직하고 음모를 꾸민 자들의 주요한 목적이 천안문광장을 당과 정부를 상대로 마지막 담판을 위한 사령부로 점거하려 한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광장은 이제 학생운동의 중심이자 전국의 중심이 돼버렸다.
정부가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광장에서는 강한 반발이 일 것이다. 계엄령 발동후 다음과 같은 사실이 확인되었다. 즉, 계엄군을 막기 위한 결사대를 조직하고 베이징 공안국으로 몰려가기 위한 공격대를 모으고 기자회견을 열고 주위에 전언을 전달하기 위해 비호대(나는 호랑이 그룹)를 모집하는 등 이 모든 행위들이 광장으로부터 모두 계획되고 집행되었다는 것이다.
반동분자들이 계속 광장을 반혁명적인 의견을 조장하고 풍문을 양산하는 중심지로 악용하고 있다. 학생자치연맹(AFS)과 노동자자치연맹(AFW) 등 불법단체들이 광장에 확성기를 설치한 뒤 거의 24시간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을 공격하고 정부 전복을 부추기고 미국의 소리(VOA)와 홍콩·대만 언론들의 왜곡된 보도를 되풀이해서 방송하고 있다.
반동분자들은 자신들이 광장에서 물러나기를 거부하면 결국 정부가 진압할 것으로 믿고 있다. 그들의 음모는 “피가 인민을 일깨우고 정부를 분열 및 붕괴시킨다”고 떠들어대면서 갈등을 일으키고 유혈사건을 야기하는 것이다. 며칠전 이런 반동분자들은 (광장 남쪽의) 인민영웅기념비 앞에 공공연히 여신상을 세웠다. 오늘 그들은 또 다른 단식투쟁을 시작할 계획이다.
동란이 시작되었을 때 미국대사관은 공세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 일부는 CIA의 첩자들이다. 거의 매일, 특히 밤에 그들은 천안문이나 베이징대 등 대학가를 돌아다녔다. 그들은 학생자치연맹의 지도자들과 자주 접촉하며 그들에게 충고도 해 주었다. 동란에 직접 관여하는 중국민주동맹(CAD)은 미국이 중국에 맞서기 위해 이용한 앞잡이다. 우리나라의 쓰레기같은 이놈들은 뉴욕에 본부를 둔 채 친국민당(KMT)인 중국우호협회와 협력해 소위 중국민주화운동지원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들은 또한 학생자치연맹 지도자들에게 돈을 줬다.
동란이 시작되자마자 대만의 국민당 정보기관과 중국 밖의 적대세력들은 방문객과 여행객,`사업가 등을 가장한 첩자들을 중국으로 물밀듯 들여보냈다. 그들은 소위 말하는 민주화운동을 전면적인 공산주의와 독재에 대항하는 운동으로 확산시키는 일에 직접 개입을 시도했다.
그들은 또 지하 간첩들에게 사태의 추이를 긴밀히 추적하고 모든 정보를 수집하도록 지시했다. 대만에서 온 국민당 첩자가 베이징·상하이·푸젠(福建) 등지의 동란에 개입했다는 증거가 있다. 동란이 국내외 반동세력들의 제휴로 발생했다는 사실과 그들의 목적이 공산당을 타도하고 사회주의체제를 전복려는 데 있다는 사실이 점점 명백해지고 있다.
왕전 이런 개자식들! 그놈들은 천안문같은 신성한 공간을 오랫동안 유린하고 있다. 그놈들은 정말 자업자득이다. 샤오핑 동지, 지금 당장 군대를 보내 이런 반혁명분자들을 체포합시다. 도대체 인민해방군은 뒀다가 무엇에 쓸 것인가. 그들은 단지 (시위대를) 둘러싸고 앉아 밥만 축내고 있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반혁명분자들을 붙잡아야 한다. 우리가 지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반 인민들이 이반할 것이다. 공산당을 전복시키려는 자들은 누구든지 죽음을 당하고도 땅에 묻히지 못할 것이다.
덩샤오핑 이번 사태의 원인은 국제적 환경과 관련이 있다. 서방세계 특히 미국은 모든 선전기제를 선동공작에 쏟아부었고 소위 중국내 민주주의자와 재야세력, 즉 사실상 중국의 쓰레기같은 놈들을 격려,`후원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직면한 혼돈상황의 근원이다. 일부 서방국가들은 우리를 비난하기 위해 인권이란 것을 이용하거나 사회주의체제가 비이성적이며 불법적이라는 말을 하기 좋아한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노리는 것은 우리의 주권이다. 힘의 정치를 구사하는 서방국가들은 인권에 대해 말할 자격조차 없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전세계 인민들의 인권을 강탈했는가. 또 얼마나 많은 중국 인민들이 아편전쟁 기간(1840~1842)에 그들로부터 인권을 침해받았나.
양상쿤 우리가 광장으로 진입해 질서를 회복하고 어떻게든 동란을 중단시키는 것이 우리가 개혁을 포기하고 세계와 멀어져 문을 걸어잠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덩샤오핑 그 누구도 중국의 개혁과 개방이 계속되는 것을 중단시킬 수 없다. 왜 그런가는 아주 간단하다. 개혁과 개방 없이는 우리의 발전은 멈출 것이고 경제는 곤두박질칠 것이다. 우리가 (개혁과 개방정책에서) 후퇴하면 생활수준도 떨어질 것이다. 개혁의 여세는 멈출 수 없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 점을 고수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경제개혁만 인정하고 정치개혁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정치개혁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조건 즉, 네가지 기본원칙이 옹호되는 상황하에서다. 네가지 기본원칙이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毛澤東)사상, 사회주의, 인민민주전정(專政), 공산당의 일당지배 등이다.
양상쿤 계엄군 병력이 인민대회당·중산(中山)공원·인민문화궁과 공안부 청사로 진주했다. 모든 장교와 사병들의 정신상태는 천안문광장을 청소(소개)할 준비가 완전히 돼 있다. 거의 보름 동안의 정치사상 공작을 통해 모든 장교와 사병들은 이번 투쟁의 엄중함과 복잡함을 이해하게 됐으며 계엄령의 필요성과 합법성도 이해했다.
리펑 나는 즉시 천안문광장을 청소하기 위해 군대를 진주시키고 확고하게 동란과 확산되는 문제를 종결시킬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차오스 광장에 있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물러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광장 해산은 유일한 선택이며 꼭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해산 발표가 다수의 시민·학생들이 용인하고 지지하는 바와 걸맞을 것으로 희망한다. 광장 해산은 수도 베이징에서 정상적인 질서를 회복하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
덩샤오핑 여러분 모두와 동의하며 계엄군이 오늘밤 청소계획을 수행해 이틀 안에 마무리할 것을 제안한다. 해산작업을 진행할 때 모든 학생과 시민에게 상황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돌아갈 것을 요구하고 설득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떠나기를 거부한다면 그들은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
6월4일 천안문사태 유혈진압
천안문광장은 지리적으로 수도 베이징의 중심, 그리고 중난하이의 동남쪽에 있다. 중난하이에는 청 왕조 황제들이 사냥하던 공원이 있으며 지금은 공산당 지도자들의 집무실이 있다. 1919년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추구한 5·`4운동을 시작으로 천안문은 민중시위의 전통적인 장소가 되었다. 시위는 주로 학생들이 이끌었는데 베이징은 고등교육의 중심지여서 참가자들 중 학생이 특히 많았다.
병사들이 평상복과 제복을 입고 진입했을 때 시위대가 (계엄군의 진주를) 이해해 주기는커녕 분노와 폭력으로 대응했다. 유혈사태를 피해 보려던 당 지도부의 희망은 시위대의 저항과 그에 대한 계엄군의 감정적인 맞대응으로 틀어졌다.
정부의 공식 보고서는 덩샤오핑이 당초 광장 해산 과장에서 사망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라는 방침이 달성됐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사망자는 군이 서쪽 외곽에서 푸싱먼와이루(復興門外路)의 대로를 따라 광장으로 진입하면서 무시띠라는 곳에서 발생했다. 그곳에서 흥분한 병사들이 분노한 군중에게 폭력으로 대응했다. 이어 정부는 국제사회와 국내에서 엄청나게 요란한 반발에 직면했는데 그들은 덩샤오핑이 그토록 걱정한 최악의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고 을러댔다. 즉 피로 얼룩진 천안문사태의 대단원으로 인해 국내에서 개혁을 계속하고 대외적으로 개방정책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6월 5일 전국적인 항의시위 계속
6월5일과 10일 사이 중난하이는 각 성으로부터 지방의 반발과 긴급회동, 그리고 대응조치로 취한 공안의 배치 등을 담은 100건 가량의 보고서를 받았다. 각 성의 수도와 주요 시, 경제특구 등 181개 도시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다양한 형태의 시위가 있었는데 그 중에는 폭력 시위도 있었다. 6월8일쯤 일부 도시에서는 상황이 안정을 되찾았다.
6월9일 오후 덩샤오핑은 계엄군의 고위층 인사들과 면담했다. 그리고 국무원과 공안부는 각 자치기관에 공안요원들은 학생 지도자와 시민운동가들의 전면 체포 작전에 돌입하라는 지시문을 내려보냈다.
6월10일 이런 조직적 운동은 도처에서 시위활동을 효과적으로 진압했고 외형상으로는 전국이 평정을 되찾았다.
6월 6일 원로들의 평가
6월6일, 공식용어가 된 ‘반혁명 폭도 진압’이 이틀하고도 반나절이 지난 이날 이전보다 혈색이 좋아진 원로들(덩샤오핑·리센녠·펑전·양상쿤·보이보·왕전)이 당시 정치국 상무위원들(리펑·차오스·야오이린)과 만났다. 여기에는 전인대 상무위원장인 완리(萬里)와 총서기로 취임하기로 된 장쩌민도 참석했다.
다음은 당중앙 서기처의 ‘중국 공산당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6월6일)’의 발췌. 그날 모임의 녹음자료에서도 일부 보충.
덩샤오핑 우리가 반혁명 폭동에 확고하게 대처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 누가 알았겠는가. 인민해방군이 아주 고생했다. 우리는 정말 그들의 덕을 많이 봤다. 폭동을 부추겨온 이들의 음모가 도처에서 있었다면 우리는 내란을 겪을 뻔했다. 물론 우리가 이겼겠지만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됐겠는가.
리셴녠 우리가 반혁명 폭도들을 진압하지 않았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얘기라도 할 수 있었을까. 인민해방군은 정말로 중국 인민의 형제일 뿐 아니라 당과 국가의 든든한 대들보다.
양상쿤 반혁명 폭도들을 진압하는 데 비싼 대가를 치렀다. 베이징의 사회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지금 가장 급선무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가 대대적인 정치사상공작을 펼쳐야 한다는 의미다.
보이보 여기 몇몇 기사가 났는데 서방의 모든 대형 신문과 TV방송들은 천안문에서 벌어진 소위 6·4 대학살과 사상자 수를 보도하고 있다. 읽어 보겠다. AP통신은 ‘적어도 500명 사망’, NBC방송은 ‘1,400명 사망, 1만여명 부상’, ABC방송은 ‘2,000명 사망’, 미국 정보기관은 ‘3,000명 사망’, BBC방송은 ‘2,000명 사망, 1만명 부상’, 로이터통신 ‘1,000명 이상 사망’, AFP통신 ‘적어도 1,400명 사망, 1만명 부상’, UPI통신 ‘300명 이상 사망’, 교토통신 ‘3,000명 사망, 2만명 이상 부상’,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 ‘3,000명 사망’.
이같은 사망자 수가 전세계로 알려지면 충격이 커질수 있다. 이런 소문에 대해 지금 대응공격할 필요가 있다.
덩샤오핑 우리는 인민공화국을 전복하려던 야심만만한 놈들에게 죄의 정도에 따라 응당 벌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학생 시위자와 탄원서에 서명한 사람은 베이징 출신이든 중국의 다른 지역이나 해외에서 왔든 상관없이 용서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개인적 책임을 규명하려 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상황을 통제하는 과정에서 취하는 수단 방법에도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우리는 법, 특히 집회·결사·행진·시위·언론·출판등에 관한 법과 규정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법을 위반하는 활동들은 억눌러야 한다. 인민들이 하고 싶다고 언제든지 시위를 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인민들이 1년 365일 시위만 하고 아무 일도 안한다면 개혁과 개방은 어떻게 할 것인가.
6월 중 시위자 일제검거
베이징에서의 민주화운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은 계엄군과 인민무장경찰, 그리고 자치 공안국이 분담했다. 다음과 같은 내부 기준들은 당시 붙잡힌 운동가들이 왜 신체적으로 학대당했는지를 잘 설명해 줄 것이다.
다음은 ‘사상을 통일시키고 시비를 구별하고 실질적인 조치로 계엄 업무를 완수하자’는 내용의 6월10일자 계엄사령부 문건 발췌.
계엄군이 베이징 주민들에 대해 느끼는 분노와 적대감을 일소하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상의 혼란을 명쾌하게 하고, 극소수 폭동세력을 다수의 베이징 주민들로부터 고립시키고, 인민을 향해 올바른 자세를 확립하기 위해 우리는 모든 장교와 사병들에게 자신들의 분노를 한 줌의 극소수 폭동세력에게 집중해 사악한 근거지를 박살내고 폭동세력들을 처벌함으로써 구체적인 조치로 계엄 임무를 마무리하도록 요청할 필요가 있다. 베이징 공안국 치안상황(치안상황)26`31`37호는 6월10일쯤 468명의 반혁명 폭동세력과 동란 야기세력들이 체포됐음을 보여준다.
6월17일, 이들 중 8명이 베이징에서 벌어진 반혁명 폭동의 와중에 폭행·파괴·강도·방화와 다른 형사 범죄 등을 저지른 혐의로 사형에 처해졌다. 6월20일께 체포된 반혁명 폭동자와 동란분자들은 831명에 달했다. 6월30일에는 1,103명이었다. 체포된 자들의 대부분은 임시 구금소와 임시 감옥에 수감됐다. 일단 베이징의 상황이 통제되고 전국의 각 성 당국이 지지를 표명하자 당 중앙은 전국적으로 운동가들에 대한 일련의 대책을 시행했다.
6월말 학원가 분위기
6월말 신화통신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학생들은 어디나 할 것 없이 공포와 침묵 속에 휩싸여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다음은 신화통신의 ‘전국 대학생들의 이데올로기 상태’라는 문건의 발췌. 6월29일 국내 상황에 관한 증거 문서.
테러 대학가에는 처벌과 검거에 대한 긴장된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학생운동 지도자들은 대학가를 떠났고 누가 언제 붙잡혔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가장 적극적으로 시위에 가담했던 학생들이 가장 불안해하고 있다. 일부 성에서는 단지 연좌시위로 교통을 방해한 학생까지 체포하도록 했으며 학생들은 너무 불안해 밤에 잠을 설치고 있다. 전반적으로 걱정스러워 하는 분위기다. 학생들은 “나도 처발받게 될까”라며 불안해하고 있다.
저항 전국적으로 5명 중 1명의 대학생이 여전히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들은 정부의 포고령과 폭동 진압 노력에 냉소적으로 저항하고 있다. 일부는 국내언론에 대해 ‘듣지 말고 읽지 말고 믿지 말고 묻지 말자’는 이른바 ‘4불론’을 채택했다. 어떤 학생들은 TV를 보면서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일부는 그들의 기숙사나 교실 벽에 ‘입 닥쳐’ ‘청천벽력’ ‘중국은 죽었다’ ‘정의는 어디로 갔나’ ‘정부가 동란을 초래했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질 것이다’ ‘또 다른 천안문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등의 글귀를 써놓기도 했다. 많은 학교에서 특히 남자 학생들이 광분하는 것 같았다. 밤에 불이 꺼지고 나면 그들은 비명과 울음으로 분노를 토해냈다.
침묵 3명 중 1명의 학생들은 의미심장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 6·4사태 이후 각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학생운동과정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돌이켜보라고 요구했다. 많은 학생들이 서클을 돌아다니며 제한된 몇가지 구체적 질문들을 해대고 있다. “어떻게 자신의 생각을 바꾸게 됐는가”라는 질문에 학생들은 침묵만 지키고 있다.
점차 모든 질문에 “나는 모른다”는 말이 정답이 되고 있다. 침묵은 날아오는 화살을 막아 주는 방패인 셈이다.
6·4사태 이후 중국 사회는 심각한 아노미 상태에 빠져 있다. 감각이 마비된 채 사람들은 어디서나 정치에 등을 돌리고 있다. 감수성이 풍부한 지식인들, 특히 이상이 충만한 젊은 학생들조차 1990년대에 들어서자 그들이 1980년대에 보여준 사회참여 노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대학가는 고요하다. 중국은 정신적 공허함을 감춰 주는 침울한 안개 속에 덮여 있는 것같다.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도덕은 죽었다. 부패가 싹트고 뇌물이 오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대학가에 알려져도 이제 학생들은 정치에 완전히 등을 돌린다. 학생들은 1980년대의 이상을 잃어버렸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운명에만 신경쓰고 있다.
-지난 6일 美 CBS-TV 전격공개, 자료 제공자는 前 공산당 고위간부
지난 6일 미국 CBS 방송은 1989년 6월4일 중국의 천안문(天安門)사태 당시 덩샤오핑(鄧小平)을 비롯한 최고지도부의 비밀 대화록 등을 전격 공개했다.
CBS 방송은 특히 장수 프로그램인 ‘식스티미니츠’(60분)에서 극비 문건의 유출자 장량(張良·가명)과의 인터뷰를 공개하는 등 문건의 진실성을 입증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장량은 자신이 개혁을 원하는 중국 공산당원이라면서 문건 공개를 계기로 천안문사태가 제대로 조명되고 개혁파가 힘을 얻기를 바란다고 문건 공개 의도를 밝혔다.
문건이 공개되면서 전세계 언론은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를 비롯, 홍콩·대만의 언론들은 연일 이 사실을 크게 보도했다.
그러나 신화통신(新華通信) “인민일보”(人民日報) 등 중국 관영 매체를 포함한 모든 언론들은 10일 주방짜오(朱邦造) 외교부 대변인의 성명이 나오기까지 단 한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문건이 워낙 민감한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신중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나흘만에 나온 중국 당국의 첫 공식반응은 문건이 날조됐으며 이같은 공작은 중국의 분열을 획책하려는 누군가의 음모라고 몰아붙였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깎아내렸다. 미국 정보기관이 문건을 날조했거나 공작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도 나왔다.
그들은 홍콩의 일부 언론을 통해 문건의 조작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제시하며 맞대응했다. 그러나 문건의 파장을 잠재울 만큼 완벽한 설명이 되지는 못했다.
그런 가운데 천안문 사태의 소극적 대응 책임을 물어 실각한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의 비서였던 바오퉁(鮑杉)은 베이징(北京)에서 서방언론과 만나 문건이 담고 있는 내용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혀 중국 당국을 궁지로 내몰았다.
이즈음 중국 공안당국이 문건의 조작 주장에도 불구하고 유출 여부에 대해 자체조사에 들어가 유출자로 의심되는 이들의 윤곽을 파악했으며, 개혁파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중국측의 주장대로 문제의 문건이 덩샤오핑의 지시로 정치국 상무위원 전원(당시 5인, 현재 7인)이 동의할 때만 열람이 가능한 만큼 절대 유출되지 않았다는 주장이 옳을 수 있다.
그러나 이번 문건 유출과 관련해 국내를 비롯한 상당수의 중국전문가들은 문건의 정교함과 담고 있는 내용의 깊이 등을 두루 분석한 결과 진본일 가능성이 높다는 데 의견을 모아가고 있다.
가뜩이나 미국에서는 2001년 1월20일 8년만에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중국을 전략적 동반자로 인식하는 빌 클린턴의 민주당 행정부와 달리 조지 W. 부시의 공화당 정권은 상대적으로 중국에 경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라고 스스럼없이 말하고 있다.
이처럼 국제정세와 역학구도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터져나온 천안문 페이퍼는 단순히 문건의 진위를 넘어서는 의미가 있다. 미국에서 정권교체기에 공개된 사실은 물론 폭로 시점, 그리고 문건의 내용 등을 두루 감안할 때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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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관리자 씨팔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