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 (3) 으로 나눠썼다.
다만, 글이 난잡해서 읽기가 짜증날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그거에 대해선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무시하라.
좀 더 쉽게 설명할 수 있을 때, 설명할 것이다.
'상'이라는 글자를 두고 어떤 의미를 놓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상'을 그림으로 본다. 이미지들.
여기에 '현재의, 또는 현재 '나타난' 이라는 의미로서 '현'이 강조되고 합쳐지면
'현상'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살면서 하는 대부분의 일들은 '마주친 현상'을 어떻게 대할 것이며, 그것을 뭐라고 볼 것인가? 라는 문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철학자들은 여기서 불변의 것, 동일한 것, 순수한 것, 등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어떤 사람들은 거기서 불변의 것은 없으며 끊임없이 생성하고 변하는 것이 있을 뿐이라는 얘기를 건넨다.
이미 링 위에 올라가서 전투를 시작한 선인들이 아닌,
그런 전투를 한 켠에서 지켜보거나, 또는 그런 작업에는 개의치 않고 그래서 뭐가 결국 적절하냐? 라는 식으로
단물을 빼먹는데 익숙한 사람은, 그래서 이러한 수많은 프레임들을 어떻게 봐야될지, 고민하게 된다.
철학의 난제는 이런 것이다.
1. 갑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갑이 하는 말도 맞는 것 같고
2. 을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을이 하는 말도 맞는 것 같다.
3. 그런데 갑이 하는 말을 옳다고 하면 을이 했던 말은 일부 받아들이지 않거나, 몇 개는 교정해야 한다.
역으로 을이 하는 말을 옳다고 해도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진다.
다시 말해,
성경이 한권 있다고 하자.
그런데 10명의 남자, 여자, (노인, 아이, 청소년, 대학생등 골고루 분포)가 그것을 '본 적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들은 저마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
어떤 부분은 기억하는데, 어떤 부분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 성경이 사라졌다고 해보자. 그리고 성경을 복원해야하는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이 10명이서 성경을 복원하는 작업을 한다고 했을 때, 과연 얼마나 복원이 가능할 것인가?
이미 그것에서 옳은 것이 있다, 라는 언급은 하기가 힘들어 진다.
단지 사태만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성경 자체가 옳은지의 여부는 있지만, 이 문제는 그런 관점에서 다루지 않겠다.)
둘러서 말했지만,
결국 이 문제는 '우리에게 맞고 그르고, 라는 것이 있다면, 그 맞고 그르고의 기준은 어디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에 그동안 '권위'로 취급되어왔던 것에, 권위를 제거해버리고,
다시 그것의 정당성을 물어보자. 그렇다면, 그것의 정당성은 어디에 있겠는가? 아이러니컬하게, 여기에서 진실의 기준은 사라져 버린다.
기껏해야 몸의 반응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도덕의 기원을 육체 및 감정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했던 접근은 이 글의 제목인 '이름-자리놓기'라는 것과 적절치 않다.
지금 내가 언급했던 모든 것은, 당신이 세상을 해석하고, 인식하는데 있어, 기존에 믿어왔던 입장의 '권위'를 블라인드 시켜버린다면,
당신은 '어떤 것이 옳은가?'하는 질문을, 다시 처음부터 정의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것으로 정의내리겠는가? 기준은 무엇인가?
아마, 우리가 해결해야할 것은, 이렇듯 자기만의 판단기준을 세우면서, 준칙을 만들어가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궁극적인 것이니, 아무래도 좋다고 보자.
그러면 여기서 내가 하고픈 말은 이것이다.
무수하게 쏟아지는 수많은 '타자'의 견해들 가운데서,
나는 어떻게 이것들을 '내 준칙'을 세우는데 활용할 수 있을까?
아마 가장 원초적인 동기는 '문제의식'일 것이다. 문제의식이 그런 타자의 관점을 자신의 것과 비교하게 추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서 마주침을 겪으면서 '실제로'느끼는 실전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당신은 왜 을은 틀렸고 갑은 맞았다고 판단 내리는가?
또한, 당신은 희랍철학자들처럼 '불변의 것'이 있다고, 접근하고 싶은가?
그렇게 되면 당신은 당신이 아닌 관점은 '부정'을 하거나, 최소한 '영향력이 없다'라는 식으로 등급을 낮게 분류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당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최상급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당신이 가수라고 하자.
그러면 당신은 장르를 하나 추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다른 음악도 음악이지만 '힙합과 소울'이야 말로, 음악의 정수, 라는 식으로,
'본질'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본질주의는 창의성을 말살시킬 여지가 있다.
본질을 찾아다니다가, 그렇게 본질에 가깝지 않은 것을 의식적으로/무의식적으로 배제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시대에 적합하게,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고, 다양한 융합이 창의력으로 인정받는 시대에선,
어떤 프레임으로 현상을 대하는 것이 올바를까?
그것은 '유형'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 유형은 현상 자체가 어떤 '개체' 또는 '사물자체'라는 것에서, 어떤 것들이 덧붙여진다는 인식을 일종의 전제로 삼는다.
당신은 여기에 '술어 또는 속성'들을 하나씩 덧붙인다.
그리고 이것이 언어로 표현될 때 당신은 '수식을 넣거나, 술어를 첨가한다'라는 등으로 말할 수 있게 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세상을 본질로 보는 것도 아니라,
세상을 일종의 유형들로 보는 것. 그래서 일종의 공간들로 생각하는 것 (이런 사고의 위험성은 있으나 실전적인 점도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인식의 작업이 '언어'로서 '이름-자리놓기'로 표현되는 것이다.
(당신은 이것이 규정내리는 작업이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당신이 내리는 것이다.)
아직 나는 유형으로 접근한다는 게,
실제로 무엇인지 언급하지 않았다.
이 접근은 일종의 '배정하기'와 관련된 접근이다.
당신은 어떤 것을 느끼거나, 어떤 것을 '아하!'하면서 깨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여기에 속하는 군. 이것은 이거군. 이것은 여기에 가까운데.'하면서, 컴퓨터 폴더에 파일을 집어넣듯,
무미건조에하게 '드래그'하는 식으로, 접근하게 된다.
그리고, 당신이 언제 느낄진 모르겠지만, 이 접근에 대해서 한번쯤은 고민하게 될 것이다. (이 접근은 가치판단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용자가 가치판단에 영향 받는 것을 방어한다. 즉 그는 단지 '드래그'하고, '박제'시키고, '업데이트'시킬 뿐이다.)
아마 이 글을 읽고,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고민은, 그 사유의 계기가 있긴 하지만,
'속성'에 대한 고민을 몇번 해본 사람이 해볼법한 생각이다.
기억할 것은 이것이다.
1. 당신은 단지 속성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그것이 어떤 위상을 부여받아야되는지, 그것만 판단한다.
2. 그리고 당신은 단순히 '드래그'한다.
3. 당신은 오로지 그 '유형'을 본다.
4. 당신이 위계를 부여할지 안할지는 당신의 선택에 달렸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할 것은 이것이다.
나는 아직 유형으로 접근하는 게 뭔지 자세하게 언급하진 않았다.
하지만 분류, 폴더, 드래그, 라는 용어를 통해서,
내가 무엇을 언급하고자 했는지 감은 왔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실전에서, 이렇게 적용한다는 것이다.
일단 나는 그것에 대해선 쓰지 않았다. 언젠가 시간이 나면 쓸 계획이다. (디씨가 글자수 제한이 있는 것 같다.)
나타나는 이미지,현상에 대해서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유형으로 접근해 분류해야 한다는 것. 어떤 것에 내포하는 속성을 이해하고 확인하고 그것이 어느 쪽에 명명되는지 가까운지 분류할 것. 분류. 폴더 드래그
유형으로 접근해서 분류하는 것의 위험성은 무미건조하게 단지 사실만을 다룰 뿐, 가치판단을 배제해야하는 작업이라 나라는 사람의 성향을 그러하게 바꿀 여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