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하지 말 것 .............. 이해하지 마라)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
그것은 다시 말해, 사람들을 쳐다보게 하는 것을 말한다.
더 정확히 말해, 사람들이 쳐다보게 되는 것을 말한다. (능동이 아닌 수동이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것, 그런 뉘앙스)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
시선의 대상이 되는 것
'쳐다봐야되는 대상'이 되는 것
쳐다보게 만드는 것
쳐다봐질 수 밖에 없는 것
쳐다보게 되는 것,
더 많은 유의어가 가능하다.
요지는 이들 유의어들에서 하려고 했던 말의 '뉘앙스'를 길러내야 한다.
그것은 이미지일 것이므로, 보다 완벽한 이미지를 얻기 위해선, 다양한 이미지들 사이에서 각각의 측면을 끄집어내야 한다.
마치 피카소가 하나의 그림을 수많은 관점으로 토막내서 그려냈듯,
하나를 얻어내기 위해선 다양한 측면의 것에서 그럴싸한 것을 끄집어내어, 뉘앙스를 얻어내야 한다.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될 것 같다는 말은, 그 사람을 쳐다보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람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다는 것,
그게 실전 현상계든 상상계든, 그를 쳐다보게 되는 것, 결국 그를 생각하게 되는 것의 시작이다.
이 시선의 목적이 된 사람,
다시 말해, 그 시선원천지의 (뭐라 할 말이 없다) 대상이 된 자는
이제 '타자의 욕망'의 고리에 들어가게 된다.
그 상대는 당신의 욕망을 기민하게 읽어내려 한다. 당신이 할 일은 그가 하는 모든 (우스꽝스런) 계산에 응해주는 것이고,
필요에 따라 당신이 그에게 역할을 배정해주는 일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한 대상을 좋아하게 되었다면,
그는 필시 '뭘 해야되지?' '저 사람은 어떤 타입을 좋아하지?' 등의 물음에 사로잡힌다.
그가 해답을 못찾으면 그는 괴로움에 빠진다.
그는 벽에 부딪쳤다 싶으면 물어본다 ("도대체 어떤 사람을 좋아해요? 이상형이 어떻게 되요?)
하지만 그걸 물어보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 물어보더라도 상대의 썰렁한 대답에 실망하는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아 모르겠다...'라는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적극적인 사람은 자신의 계산이 틀릴 수 있다하여도, 자신이 가장 '자랑스러운' 부분 (통계적으로 먹혔다고 판정난 부분)을 내비치거나,
어떻게든 알량한 전법을 쓴다. (설령 틀린다해도 애교로 봐달라는 식으로, 또는 자신감으로)
이 경우,
대상은 가만히 있으면 된다. 뭘 따로 할 필요가 없다.
상대가 보이는 유혹에, 적극적으로/또는 적극과 소극의 경계를 오가며, 응해주면 된다.
가령
"오빠 영화 좋아하죠?" 라고 묻는다면, "응 좋아하지"라고 대답하면 되고,
"주말에 시간 있어요?" 라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는데 불가능할 것 같진 않아"라고 하면 되고,
"오빠 저 이거 보러가요"라고 묻는다면, "그래 내가 전화할게"라고 대답하면 된다.
그러면 당신은 가만히 있어도, 연애를 한다. (물론 당신도 그 여성에게 관심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
약간의 정도를 내려보자.
이번엔 여자가 마음은 있어도, 적극적이지 못할 경우,
그 여자는 남자의 눈치만 살필 확률이 높다. 이 경우 남자가 여자에게 마음이 있을 땐 여자에게 '규칙'을 제공해야 한다.
왜?
그것이 바로 여자가 궁금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여자에게서 당신이라는 타자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려 한다. 따라서, 그 남자가 좋아하는 것을 하려고 한다.
그러니 그 남자가
1. 말 잘듣고
2. 시간 잘 내고
3. 화내지 않고
4. 애교 떨고
하는 등등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 여자는 거기에 맞추려고 한다. (일종의 동일시)
(물론 어떤 이는 여자들은 더 이기적이어서, 오히려 자기에게 맞춰야된다는 쪽으로 둘 것이지만,
그 경우는 당신과 그 여자 사이의 관계가, 여자쪽에 더 힘이 실렸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을 맞추는 것은 가능치 못하다.
다만, 저 남자가 싫어하는 것은 피하려고 하고 좋아하는 것 중에서 자기가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맞추려고 한다.
가령
가급적 화를 내지 않으려 하고
애교는 못떨더 라도,
남자가 하는 말에 집중하려 하는 등,
사소한 변화는 줄 수 있다.
하이라이트는 이 부분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키스를 하려고 할 때
키스는 어떻게 가능할까?
너무나 단순하게 간단하게, 또는 게임을 사용해서 벌칙으로 '키스하기' 같은 것을 하는 경우,
물론 여기에도 욕망의 논리는 있다. 일단 규칙을 걸어버리고 하자는 것은, 그 욕망을 내비치는 것이고, 그 욕망에 참여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왜 갑자기 그 여자가 그 게임을 해야하는가? 할 필요가 있는가?
그 여자가 참여했다는 것에는, 그러한 욕망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도 들어있다.
남자가 여자의 입술을 바라보고, 눈을 바라볼 때,
그 여자는 동요한다.
그리고 대개 남자가 신호를 줬을 때, 여자가 그 신호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수긍하는 쪽이 된다.
왜?
그게 남자의 욕망이고, 여자는 그 욕망을 욕망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자가 제시한 것은, 여자가 욕망해주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남자가 리드해야 여자가 따라가는 것이다. 이것이 '남자가 리드해야된다'의 내적논리다.
그런데,
남자가 여자의 입술을 바라보고, 여자의 눈을 바라봤는데,
자기 스스로 두려워서 그만뒀다고 해보자. '에이 아니다~'하고 넘겼다고 해보자.
그 때 여자는, 갑자기 "오빠 왜 그래 남자답지 못하게!" 하고 쪽, 달려들지 않는다.
여자도 마찬가지로 그만둔다.
왜?
그것이 남자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자에게 에고를 자각하게 하는, 즉 수치를 느끼게 하는 자극이 된다)
즉, 남자가 키스하지 않기로, 내비췄기 때문에, 여자는 그 남자의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
그러므로, 여자도 키스하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하게 된다.
이것이 "남자하기 나름"이라는 것의 내적논리다.
이를 강간에 악용하지 말라, 그것은 오독이다.
위는 둘간의 사랑, 동요가 있음을 전제로 하며, 그렇기 때문에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것이 성립되었을 경우 가능하다.
강간은 그런 '받아줌'이라는 논리 자체가 성립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강제가 되며 강요가 되는 것이고, 폭력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경우는 문제가 달라진다.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원하는 것이다.
헌데 원하는 방식이, '타자의 욕망'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서로가 서로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보는 것보다는,
오히려,
한쪽이 위를 맡고, 한쪽이 아래를 맡는 것처럼,
어느 한쪽이 좀 더 분명하게 '받아들이는 쪽'으로 세팅이 된다.
그리고 한쪽은 '자극을 주는'쪽으로 세팅된다.
이 힘조절을 잘 해야한다. 자극을 주는 쪽,은, 받는쪽이 받을 수 있는 만큼의 범위 내에서 자극을 조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감당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에도, 욕망해주는 범위가 있다. 그것을 고려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서 강박증은 성립되지 않는다. 오로지 히스테리 내에서 의도된 강박증이 존재한다.
이는 히스테리를 보호해주기 위한 강박이다. 100% 강박은 강간에 해당되는 것이고, 그것은 '문제'가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해했는데 어쩔; 재밌는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