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다.
지금 당장 당신의 밖을 쳐다보라.
당신이 강남역 한 복판에 있으면 '무수한 사건들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잘 생각해보자.

1. 역 주변의 노점상
2. 역 주변을 걸어다니는 남자/여자
3. 역 주변의 건물 (빵집, 옷집, 학원)
4. 역 주변의 행사 및 들려오는 노래 소리
5. 역 주변 도로의 차들

당신은 이것들 각각을 따로따로 인식할지 모르겠지만,
잘 생각해보자. 이들은 저마다 그들 입장에선 '사건'을 겪고 있는 중이다.
그들 각각에겐 그 사건이 진행중인 사건인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이 모두를 동시발생인 것이라고 사유하지는 못한다.
이론상 가능하다. 하지만 당신이 강남역을 지나갈 때, 당신의 머리 속에는 이 모든 동시다발적인 사건은 들어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 역시, 당신의 세계와 관련해서 일부분만 포착하기 때문이다.

가령, 당신은 '영어학원에 가야된다'라는 목적을 갖거나,
지나가는 '일부 사람들을 본다'라는 부분적인 활동만 하는 등, 부분적으로만 받아들일 뿐이지,
이 모든 사건이 동시에 들어온다는 식으로,
즉, 무수히 발생하는 동시발생적 사건들을 모두 동시에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아주 한정적이다.



잘 생각해보자.
당신이 이걸 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보자.
당신은 이걸 알아도, 실제로 현실을 마주했을 때는 이것을 극복할 수가 없다.
당신은 '동시발생'이라는 것을 알아도, 지금 당장 강남역에 가게 되면, 방금 말했던 '일부분'에만 주목하게 된다.
당신은 절대로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인간 생체 껍데기의 특징적 한계다. 그렇게 볼 수 밖에 없다. 지각의 조직화 원리라고 불러도 상관없을 것이다.


무수한 견해, 무수한 데이터, 무수한 사건은 '동시다발'적으로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당신은 그 중에서 일부분만 바라보고 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넌센스다.
의미는 개뿔. 그런 게 어딨겠는가?
당신은 단지 선택을 해야한다. 당신의 앞 길에 따라, 또는 당신의 현재 상황의 좋고 싫음에 따라, 또는 당신의 피로를 극복하는 것에 따라,
당신은 선택하는 일만 남는다. 머리 속을 들여다보자. 당신은 선택만 할 수 있다.

아무리 외부에서 당신을 제한두고, 배척시키려고 해도,
그것을 인지적 체계로 바라보면, 엄청나게 거대한 인지 체계의 배열 속에, 당신이 포함되냐 안되냐의 문제로 전락하게 된다.
즉 타자의 '인지'가 당신의 인지 속에선 일부가 되어 개입되고 충돌을 시도하며, 당신은 그것을 고려한 다음 선택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들어선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누가 당신을 왕따시킨다고 가정해보라.
그러면 그의 인지 그물을 볼 때 당신은 '배척해야할 인물'에 속하게 된다. 이것이 그의 인지 그물이다.
헌데 이번엔 당신의 인지 그물을 보자. 이 때에 당신은 그의 그물을 당신의 일부로 포함한 다음 그물을 펼치게 된다.
즉 당신의 그물에는 '저 사람이 당신을 배척하려 한다'라는 요소가 들어오게 되고, 당신을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이 설명은 좀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쉽게 말해, 근본적으로는 모든 게 당신의 선택에 달렸다는 얘기가 된다.
상대방의 지랄도, 칭찬도, 아부도, 묻어가려는 것들 모두도, 그의 입장에선 하나의 선택이지만, 이것이 당신의 입장으로 넘어오면 당신의 선택이 된다.
(주체적이다는 말은 이 때 쓰는 것이다. 당신의 선택이 타자의 그물에 복속되는 게 아니라, 타자의 그물을 부분으로 포함하여 고려할 때 주체적이게 된다.)




생물체의 특징은 동시다발적 사건을 수용하지 못한다는데 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부분에 집중하는 것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 때 중요한 키워드는 선택이다. 물론 환경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선택의 항목'을 지정하고 영향주는 것에 환경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어떨 땐 환경이 지배적이기도 하다.


인간의 세계가 특이하다는 감각을 갖고 살아야 한다.
지랄 떨지 말고, 지금 당장 무수히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사건과 당신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감각적으로 느껴보라.
그리고 나서 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스스로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