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인지적 한계를 알게 되면,
인간이 무수한 사건을 발생시킬 수 없다는데 도달하게 된다.
아마 이것은 '창작'하는 사람들에겐 의미있게 쓰일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들은 '만들어내야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만들어내지 못한다' 오로지 '변형'시키는 것만 가능하다. 이게 창작의 비밀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지 인간의 특징만 보유하고 있고,
인간의 내부로 외부의 사건이 들어온다는 것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이를 '들어온다'라고 표현하던, '접촉한다'고 표현하던, 거기서 거기다, 그냥 편한대로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이 때 사건은 다양한 감각과 관계를 총칭한 것이라고 해두자.

그러면 이제,
인간의 특징은 있는데,
인간이 사건을 발생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으로 전제를 해보자.

이 말에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인간이 사건을 일으키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 때문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자. 지금 내가 말하는 인간의 특징은, 선험적 조건에 가깝다. (거의 선험적 조건인데, 그 용어에 휘말리고 싶진 않다.)
그런데, 그 선험적 조건은 일종의 필터로서 작용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사건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즉 이 때의 사건은 '선험적 조건'과 대비해서만 파악하자. 그런 용도로만 쓰인다.

그래서 사건은 항상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으로만 취급하는 게 좋다.
그러니까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이렇게 처리해두자.
1. 분명 나를 제외한 외부의 것이 나에게 들어온다.
2. 그런데 그 중에는 사람도 있다.
3. 그 때 나는 그 사람도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4.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그 사람을 만든 건 아니라는 거다.

자 이제 구분해보자.
1. 나는 사건을 받아들인다.
2. 그리고 나는 반응한다.
3. 그럴 때 나는 누군가에게 사건이 된다.

하지만 3번을 주의하자.
이것은 그렇게 생각을 해볼 수 있다는 것이지, 딴 소리가 아니다.
사건은 오로지, 내게 들어오는 것으로서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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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정리하고 나면,
내 외부의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이것은 어떤 원천이다. 끊임없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 외부를 뭐라고 부를까? 현실이라고 불러보자. 이 현실은 특이한 성질을 지녔다.
뭐냐하면 끊임없이 사건을 만든다. 그리고 역동적이다. 계속 움직인다. 그리고 동시다발적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 시간이 11시 50분인데, 지금 이 시간대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이 몇 개나 될까?
그것은 부르는대로 대응하게 될 것이다. 지금 거리에는 차가 다니고 있고, 누군가는 섹스를 하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밥을 먹을 것이고, 누군가는 클럽에서 부비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잘 생각해보라. 이게 현실이다. 현실은 유동적이고 끊이질 않고 분절되지 않는다. 그냥 다양하다. (아주 다양하다 설명하기 힘들만큼)

그리고 당신은 그 중에서 일부를 포착하고, 채택하고, 또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이것들은 당신에게 '걸려든다'
어떤 이가 내게 댓글을 달았듯이, '왕따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질문한 이는, 그의 인지체계에 왕따와 관련된 사건이 걸려들은 것이다.
(이러니까 잔인하지 않은가? 누구는 왕따를 고민하고, 누구는 생각조차 안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이 글에서 단지, 현실이라는 것이 사건의 원천이라는 것만 알아두면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당신은 당신의 '인지'를 구별해내는 감각을 얻을 수 있을 뿐더러, 계속 유동적으로 흐르는 원천이 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다.
어쩌면 당신은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된다. 당신은 그저 들어오는 것을 고려하고, 선별하면 된다. 당신에게 걸리는 것만 잡아채면 된다는 것이다.

당신이 창작을 한다면 더 공감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끊임없이 뭔가를 만들어야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릴 수 있다.
하지만 기억하자. 당신이 만든다는 것은 구조적으로 보면 '인풋된 것을 가공해서 아웃풋시키는 단순한 과정으로 되어있다.

당신이 '귤'을 보면, 귤을 생각하고, '귤'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또 다른 식으로 '귤을 보고 나서, 사과를 연상시키고 '귤과 사과'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그런데 당신은 창작을 하게 되면, '만들어야한다'는 강박증 때문에,
당신의 인풋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당신은 인풋을 조작하려고 한다. (창작하는 사람은 내 말의 의미를 알 것이다.)
그럴 때 당신은 '텅 빈'느낌을 갖게 되고, 멍해지고,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왜 그럴까?
그것은 단순하다.
당신이 뇌가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창작하지 않는다. 인간은 단지 '선별'한다. 생각해보라. 수많은 소설들은 대부분 가공된 것이다.
통일성을 위해 '생략하고 제외시키는' 과정 자체가 이미 가공아닌가? 그렇게 만들어낸 드라마는 대개 가공된 것 아닌가?
통일성 자체가 가공이 들어간 것인데, 창작이란 게 뭐겠는가? 창작은 결국 가공이다.

그 때 당신은 지금 내가 말한 '원천'을 생각하게 된다.
왜 김기덕이 피에타를 만들었을까? 그의 사건은 다른 소설에 있는 게 아니라, 현실에 존재한다. 현실에 사건들이 드글드글 대는데, 김기덕은 거기서 특정한 사건에 주목했던 것과 같다. 그리고 김기덕이 접근한 방식은 아마도 단순했을 것이다. 자기에게 걸려든 사건을 가지고 '가공'해내는 것이다.
김기덕이 '사건'을 만들어낼 필요도 없을 뿐더러, 그것은 불가능하다. (끽해야 기억을 회상시켜서 채워넣는 것인데, 그렇게 따지면 최초의 기억도 현실의 사건을 토대로 한다. 따라서 그것도 현실이라는 원천에서 길러낸 것이다.)



이번 글을 어떻게 쓸지는 알아서 할 일이다.
창작하는 사람들은 이 글이 특히 좀 의미있다고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그들에게 '소재'와 '취재'가 왜 기초과정이 될 수 밖에 없는지 정당성을 부여한 글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예술을 하려는 사람, 특히 드라마를 하려는 사람은 현실에 눈을 둬야할 것이다. 특히 현실이 '원천'이라는 생각을 갖고 접근해야 한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끊임없이 사건을 유동적으로 생성한다는 이유에서 아주 유동적인 것이다.
당신이 다른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소재를 얻는다면 필시 '닫힌' 느낌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작가의 작품은 현실이라는 원천에서 길러서 '구획'을 잡은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것에서 현실을 느껴선 안된다. 누군가의 구획된 것이 무슨 현실이겠는가? 현실은 유동적이다 동시다발적이고 다양하다.


지금이 12시인데, 지금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는 동안에는, 당신 친구는 티비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라.
사건은 동시다발적이다.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과 타자는 항상 구별되는 것이다. (적어도 외적으로는)


그리고 이를 염두에 둔 상태에서 창작을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