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갤이 따로 없는 이유로 철학갤에 올려 둔다.

이 글의 목적은 단순하다.
이미 정리된 입장을, 현대작가의 작업과 관련하여 되풀이해보고 검증해보는 식이다.
그리하여 예술의 원리란 것이 사실상 가공에 해당되는 것이며, 그것은 현실(세계)에 열려있는 것에서 해석하는 문제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개인의 주관이 분명히 들어있으니, 그 점을 고려하고 읽길 바란다.





한 예술가는 시대의 분위기, 사건, 환경을 먹고 자란다.
전제를 깐다는 것은 시대의 분위기를 깔고 들어가겠다는 것이다.

물론 시대의 분위기를 깔지 않아도 된다.
기성 작가의 작품을 전제로 깔고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패러디가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한 예술가가 시대의 분위기와 사건을 먹고 자란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더 나아가, 한 예술가가 전제를 깐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는 단순하다.
두 문장을 결합하면 된다.
한 예술가는 시대의 분위기와 사건을 먹고 자라며, 그것을 전제로 깐다.

그러한 특성은 이창동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다음의 인터뷰를 보자.
<U>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46374</U> (전문)

허문영: 3월 초에 김혜리씨와 인터뷰를 하면서 이 영화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생각은 털어놓으셨다. 하지만 개봉 전이어서 영화 안으로 깊이 들어간 질문은 아직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이르지만 이 질문을 먼저 꺼내야겠다. 이 영화의 소재 중 하나는 유괴다. 위험한 소재다. 사회적으로 위험하기 이전에 영화적으로 위험하다. 영화 안에 유괴가 들어온 순간부터 다른 모든 것들은 삼킬 위험이 있다. 어떻게 이 소재에 이르게 됐는지

이창동: 청문회 열기가 한창이던 1988년 <외국문학>이란 계간지에서 이청준 선생의 <벌레 이야기>라는 소설을 읽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즉각적인 느낌은 ‘이게 광주 이야기구나’란 것이었다. 청문회에서는 광주학살의 원인과 가해자를 따지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이제 화해하자는 공론화 작업이 동시에 이뤄지고 있었다. <벌레 이야기>에는 광주에 관한 내용이 암시조차 없는데도 나는 광주에 관한 이야기로 읽었다. 그 소설이 독자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피해자가 용서하기 전에 누가 용서할 수 있느냐, 라고. 그리고 가해자가 참회한다는 것이 얼마나 진실한 것이냐, 그리고 그것을 누가 알 것이냐. 다른 한편으로는 이청준 소설의 큰 미덕인데, 그 이야기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것을 느꼈다. 어찌 보면 되게 관념적인 이야기인데 그게 늘 내 마음속에 있었던 것 같다. 아마 내 개인사와도 관련이 있었겠지. 그러다가 <오아시스>를 끝낸 뒤 밀양이라는 공간의 느낌과 그 이름이 이루는 아이러니한 대비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게 나도 모르게 <벌레 이야기>와 결합된 것 같다. <벌레 이야기> 안에 유괴가 나온다. 그런데 이야기했다시피 유괴라는 게 너무 전형적인 사건이라 참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다른 것으로 바꾸려고도 생각해봤는데 한 여자가 당하는 고통,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는 아주 억울하고 고통스런 비극, 이게 유괴 이상의 사건이 없었다. 유괴는 어떤 특정인이 저지르는 것이긴 하지만, 처음에는 범인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둘러싼 모든 사람이 가해자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병으로 아이를 잃는다든지, 교통사고로 잃는다든지 하는 것과 또 다르다. 또 사회가 그 범인에게 범행을 떠미는 느낌도 있다.


다음의 굵은 선을 다시 써내리면 다음과 같다.
1.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를 읽으며, 즉각적으로 '이것이 광주 이야기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2. 그 이야기가 늘 마음속에 있었던 것 같다. 아마 개인사와도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3. 너무 전형적이라 부담스러워서, 다른 것으로 바꾸려고도 생각해봤다. (고통, 비극, 유괴)


어떤 작가는 어떤 사건에 계속 몰두하는 경우가 있다.
이창동의 경우는 5.18이 그런 경우인 것 같은데, (이는 놀런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다. 놀런의 영화에서는 주로 죽은 아내에 대한 상실감이 나타난다)
이 경우, 5.18은 이창동에게 영향을 끼친, 시대의 분위기와 사건이 된다.
이창동은 5.18을 전제로 깔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해, 이창동의 뇌리에는(기억에는) 언제나 그 사건이 정보로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어떤 문학 이론이든 간에, 결국 인간의 인지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자극을 받고
2. 자극이 직관으로, 오성으로, 앎으로 거치게 된다.
3. 이것은 정보로 저장이 된다.
4. 어느 순간 이는 때에 맞춰 출력이 된다.

글쓰기도 이 과정의 일부가 된다.
그러니 세계에 대한 해석이 되는 셈이다. 작가는 언제나 세계에 열려있는 것이다. (세계와 주고받는다.)
하지만, 간혹 작가가 세계에 열려있지 못한 경우도 있다. 인셉션 같은 경우처럼, 과거가 현재를 지배해버렸을 때다. (일단 이는 제끼자)

어떤 식으로든, 위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즉, 이 말은, 작가가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전제까는 그것에 대한, 자신의 귀결을 정리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출력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언제나 그렇게 한다.

하지만 항상 그렇게 보여지지 않는 이유는 기억의 메커니즘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는 세계에 열려있기도 하지만, 기억에 열려있기도 하다. 그러니 현실을 살면서도, 기억을 회상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럴 때 작가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쓰거나 한다. 또 느낌에 열려있기도 한다.
자위형 글쓰기는 느낌 중에서도, 자위와 관련된 느낌이다. 가령 성욕, 성과 관련된 판타지, 죄책감, 우울함에 대한 반응으로서 반사적 운동이 된다.


하지만 관건은 전제를 깔고 쓴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한 작가의 글을 보면, 그 작가가 어떤 전제를 깔았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
대개 쓰레긴지 아닌지는 거기서 결정된다. 왜 김기덕은 예능에 나와서 예비영화인들에게 영화보다 현실을 더 봐라고 하는가?
김기덕이 하는 말은 단순하다. 당신의 전제를 이미 굳어져버린 영화에 두지말고, 현실에 두라고 말하는 것이다. 김기덕이 현실의 온도를 느껴라는 것은 그런 뜻이다. 시대의 분위기를 먹고, 시대의 사건을 먹고 자라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