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이 시를 쓴 이유를 말해보자.
결국엔 개인적인 해석이다. 허나, 이렇게 써도 무방하다고 본다.
이창동은 5.18을 염두에 둔다.
박하사탕이 그랬고
밀양이 그렇다
시도 그렇다.

그러면 시는 왜 그러한가?
박하사탕은 시대와 인물의 정체성에 대한 영화다. 결국 한 인간의 정체성이 뭐였냐는 것이다.
그러니 영화가 돌아 돌아 도달하는 과정은, 어떻게 정체성이 형성되었는가를 보는 과정이다. 그래서 5.18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 때의 5.18은 사건 자체로서 5.18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데이터가 스며들어 추상적 찌꺼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그런 관계적 지식이 머리속에 남아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밀양도 그렇다. 위에 언급된 것처럼,
광주학살의 원인과 가해자를 따지는 문제에 있어
피해자가 용서하기 전에 누가 용서할 수 있느냐, 라고. 그리고 가해자가 참회한다는 것이 얼마나 진실한 것이냐,
이 질문이 주를 이루면서 밀양으로 나타난 것이다. 전제가 광주학살에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시도 그렇다. 시는 왜 그런가?
밀양이 피해자의 입장에서 다뤘다고 해보자.
이번에 시는 가해자의 입장에서 다룬다. 가해자가 살아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는 어떠한 사람인가?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그들은 어떻게 이 사건을 보아야 하는가? 그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미자는 처음에 두둔하려 하고, 도망치려 한다.
하지만 곧, 결국, 가해자인 손자를 경찰서로 보내기로 한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는, 보라는 것이다. 가해자의 옆에 있는 당신들이 이를 한번 보라는 것이다. 당신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라는 것이다.
더 적날하게 말해보자. 5.18이 지나고, 가해자는 지금 어디있는가? 그 가해자의 옆에는 누가 있는가? 보라는 것이다.

결국 이창동은 5.18을 계속 염두에 두고 있다. 한 작가가 시대의 분위기/사건을 먹고 자란다는 말은 여기에 있고, 전제를 깐다는 것도 여기에 있다.
물론 반드시 5.18로만 가지 않아도 상관없다. 본질은 현실에 토대를 둔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시대의 분위기와 사건이란 뜻이다.
이는 모든 예술의 출발점이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셈이다. 김기영도 현실에 토대를 두고, 마르케스도 현실에 토대를 둔다. 김기덕도 그렇다.


이제 당신에게 물어야 될 것은 이런 질문이다.
당신이 전제까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어떤 시대의 사건을 먹고 자랐는가? 어떤 시대의 사건을 전제 깔고 있는가?
당신의 주제의식, 소재는 거기에서만 나온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당신의 세계에 대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물음은 어떤 발화에서던 작동한다. 모든 말은 전제를 깔고 나온다.
어떤 작품을 만들 때에, 그는 의식적으로 그것을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쓴다면 몽롱한 상태에서 쓰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세계를 변화시키든 뭐든 하기전에, 일단 해석부터 해야한다.
세계를 해석하는 것에서, 그 다음의 방향의 실마리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세계를 해석하는 문제는 지나치리 만큼 중요하다.






- 위에 조금 더 보충하려다, 난삽해져서 밑에다 따로 옮겨둔다.
이창동 감독이 '시'를 만들게 된 배경, 실마리를 볼 수 있는 인터뷰가 있다.

이창동 감독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취지를 밝힌다.
<U>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263&aid=0000000468</U>
그렇습니다. ‘밀양 준비할 그런 뉴스에 접하게 됐어요. 그때 고민이 됐죠. 이런 사건이 발생한 도시에서 영화를 찍으면서 현존하는 사실을 피한다는 마음에 걸렸어요. 물론 그런 성격의 사건은 우리나라의 다른 곳에서도 종종 일어납니다. 도시만 그런 것은 분명히 아니죠. 하지만 그게 엄연히 실제 벌어진 현실인 상황에서, 거기로부터 눈을 돌려 약간 초월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스스로 납득이 되질 않았던 거에요. 그래서 밀양프로젝트를 아예 엎을까도 고려했고, 실제로 때문에 잠시 쉬기도 했어요. 왜냐면 밀양이라는 영화가 제기하는 중요한 물음 하나가 일상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런 현실이 일상이란 말이니까요. 그렇게 오래 고민하다가 결국 원래대로 하게 되었던 거죠. 그런데 불필요한 의무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후에도 언젠가는 이야기를 다뤄야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사건이 저를 계속 찔렀다고 할까요.”
-
<o:p></o:p>
여기서 눈여겨 봐야할 것은 모티브를 발견한 지점이다.
사실을 피한다는 것,
뉴스를 접했다는 것,
영화가 제기하는 물음 중 하나가 일상이었다는 것,
그 사건이 계속 자신을 찔렀다는 것,

이것들은 사건 자체로서 이창동 감독을 찌르는 것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이창동 감독의 필터와 관련된 것이다. 자신의 프레임과 그 유사한 것으로서 관련 사건들이 계속 들어오는 것이다.
범죄 사건은 언제가 가해자/피해자의 구조를 띈다. 설령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 처럼, 따지고보면 가해자-가해자/피해자-피해자, 뒤섞인다고 하여도, 어느 순간에는 누가 더 가해자의 형태를 띄고 있는지를 찾아낼 수 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는 좀 더 가해자-피해자의 구도가 명확하다. 다시 말해, 박찬욱이 시를 찍었다면, 욕망의 흔들림을 넣으면서, '나 착한놈인데 어쩌다 이래됐냐'식으로 갔겠지만, 이창동 감독에게서는 그런 게 개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창동 감독은 좀 더 엄격하다. 가해는 가해인 것이다. (꼴리게 한 건 니 책임이다, 따위가 통하지 않는다.)

내 요지는 단순하다.
1. 이창동 감독은 밀양에서 중고생 성폭행 사건을 접했다.
2. 그것에 반응한 것이 분명하다.
3. 하지만 그것은 잘 생각하면, 역시 이창동 감독의 고민거리인 '가해자-피해자'의 관계와 관련된다.
이는 이창동 감독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고민거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창동 감독은 그것에 대해 좀 크게 동요되고 있는 듯 하다.
그리하여, 밀양에서 그 사건을 접했을 때, 그것은 작품 밀양과 연관되는 것으로서, 또 다른 버전이 되는 셈이다.

즉 이창동 감독은 세계에 열려있다. 헌데 그 세계는 5.18이 원형이다. 이후에 이창동 감독에게 들어오는 세계는 계속해서 그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이 세계 자체가 5.18과 무관하지 않게 되어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5.18은 상징적으로 가장 강력한 모습일지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이창동 감독의 세계가 계속 이런 식으로 맴돈다는 것은 아니다.
한 예술가가 내적 구조가 바뀐다는 것은, 그가 어떤 세계를 품고 있느냐의 말과도 직결된다.
예술가는 전제를 까지 않는 이상 절대 작품을 만들 수 없다. 어떤 전제를 품느냐가 그 예술가의 작품 세계를 결정한다.


일단 여기까지 해두자.
예술을 한다는 것은 골치가 아픈 일이다. 그 세계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내비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