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한 사람은, 지금까지와 같은 플라톤의 이상적 사유와 인식 체계에서 세계를 바로 보는 사람들의 특징에 대해서 대충 생각해보자. (아래 내용은 황산덕 선생의 '복귀'라는 글의 일부를 원용하여 작성한 것임을 밝혀둔다)


이러한 인간의 사유는 유동적인 현실을 그대로 대하지는 못하고, 그것을 어떤 형태로이든 고정시켜 놓고는, 그러한 상태가 언제까지나 계속되리라는 전제 밑에서 작용한다.우연히 한번 그러한 일이 있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있었기 때문이며, 앞으로도 그러한 상황의 밑에서는 그러한 일이 반드시 일어나리라고 기대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의 사유는 예외를 가장 싫어한다. 모든 것을 원칙대로만 파악하려고 하고, 언제나 ‘맞아 떨어지는’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다시 말하면, 완결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이며, 그러한 점에서 이러한 인간의 사유는 어디까지나 패쇄적이다.


이러한 인간의 사유는 우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의 그것으로서 총체적으로 대하는 일은 없다. 그것은 언제나 이 현실의 어떤 ‘국면’만을 상대하려고 하며, 그리고 이 때에는 일정한 ‘비교의 관점’을 먼저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서만 이 국면에 접근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교의 관점이 즉 ‘개념(槪念)‘이다. 가령 이 몸을 예로 든다면, 인간의 사유는 그 몸을 총체적으로 대상으로 삼지는 못하고, 가령 그것의 ‘길이’와 같은 어떤 국면만을 알아보려고 할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에 있어서는 m나 cm같은 ‘비교의 관점’을 미리 정해 놓는다. 이리하여 가령 178cm라는 답이 나오면, 우리의 사유는 그 목적을 달성한 것이 된다. 그리고 이 때에는 그 몸의 ‘무게’나 ‘건강상태’같은 것은 관심 밖의 것으로 취급된다. 그리고 이미 만들어져 있던 비교의 관점이 불편하다고 인정될 경우에는 다른 기준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리하여 가령 별의 거리를 측정하려고 할 때에는, m로는 불편하므로, 광년(光年)이라는 새 기준으로 바꾸기도 한다.
이러한 인간의 사유는 이와 같이 ‘비교의 관점’ 이라는 색안경을 끼고서만 현실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의 촉수에 걸려 들지 않는 것은 관심 밖의 것으로서 무시된다.


이와 같이 개념을 통해서만 작용하는 인간의 사유는, 그것이 대하는 이 세계가 그렇게까지 그 내용이 풍부한 것은 아니라고 자위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일 뿐이다. 이러한 인간의 사유가 아무리 쫓아갈지라도, 우리의 현실 또는 세계는 언제나 그보다 앞질러 있으며, 이러한 인간의 사유가 그것을 완전히 따라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의 사유가 내세우는 관점의 촉수에 걸려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있는 그대로의 현실 또는 세계 그대로의 전부가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