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어는 현상어를 모방했다는 점에서 파생어이고 극한값으로 치환한다는 점에서 추상어이다.
환율이 오른다. 이건 통화가치가 하락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아는 사람도 심심챦게 반대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오른다는 의미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가치 상승으로 착각한다. 이게 파생어의 위험한 점이다.
있으니까 있는거다.
근데 유한이니 무한이니 개념을 만들어낸다.
수학적 모델링이나 특정 개념의 필요성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데
이걸 현상어에 대입하는 순간 오류가 발생한다.
무한을 상정하니 유한이 생성되는 거다. 아무 의미없다.
그렇다면 무한이 현상계에 접목되는가?
무한소 개념도 마찬가지... 그냥 관념적으로 상상으로는 가능하지.
근데 현상계에 제논의 역설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유니콘과 같은 산물은 상상계에선 무한히 찍어낼 수 있다.
위의 무한이란 어휘도 상상계에서나 가능한 가능태를 가정한 사유일 뿐이다.
다만 유니콘 같은 생물은 다른 세계에서 찍어낼 수도 있겠지.
가공된 세계가 무수히 많다고 가정하면
임의적 현상계의 산물인 말과 다를 것도 없다.
이미 뿔난 코뿔소가 있지 않은가?
임의로 찍어내는게 가능한 형태는 임의성을 띄어도 좋다.
그러나 일정한 형태로 작용하는 즉 질서있는 형태로 구성하기 위해선 법칙이 필요하다.
질서가 없다면 중구난방이라 혼돈의 연속일 뿐이다.
혼돈속에서 무엇을 잡을 것인가?
혼돈이 곧 자유의 배경이다.
선택을 했을 때가 자유의 결과물이다.
보통 결과물 이전의 가능태를 자유라고 한다.
그런데 그 자유는 무엇을 근거로 선택하는가?
그 선택의 방향을 제시하는게 질서이다.
질서라는 건 그럴듯하게 포장된 이미지이다.
어떤 가치를 제시해서 그 가치의 방향을 따라서 선택되어지는 경향이나 결과가 질서이다.
법칙이란 건 그런 방향성을 단순화한 모델링이다.
물리법칙은 자유를 허용치 않기 때문에 결정론적 질서이다.
절대적으로 변할 수 없는 관념적 이치가 되는 것이다.
종교는 그 절대성을 신으로 치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실재가 아니라 관념일 뿐이다.
반면에 자유란 건 방향성에 따른 선택이므로...
그 방향성을 가치지향이라 한다면... 방향성이 임의적이라면 무방향성이라 방향성이라는 말에 위배된다.
그래서 방향성은 초점을 가지고 그것을 가치로 포장할 수밖에 없다.
무가치한 맹목적 자유에서
특정 가치지향에 따른 선택적 상황이 현상과 맞물릴 때,
현상적이 아닌 관념적인 사유는 매력적이지 않은 상황을 고뇌하는 데에서
실존주의가 생성되었다.
무식한 짱개들은 닭장속의 닭들마냥 현상에 매몰된 것에 비해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세계에 대해 현상적으로 보완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내가 짱개도 아닌데 이렇게 살아야 하나?
내가 이럴려고 태어났나? 또는 이럴려고 대통령이 되었나?
뭐 어떤 형식이든 좋다.
어째든 가치지향하는 위치에서 그 가치에 비해 사진이 형편없이 나왔다면 투덜댈 수 있다.
하지만 사진은 그대로 증명하는 형식일 뿐...
사진의 내용은 고스란히 현상자 그 자신에 있는 것이다.
아귀다툼. 마음이 가난한 자들은 아귀계에 빠져서 항상 굶주려있다. 짱개가 그러하다.
그나마 한국이라는 나라는 욕계라서 욕망의 끝자락을 꿈꾼다.
주관들의 가치싸움에서 소외되는 자들이 양상되는 현상이 현상된다.
힘싸움 속에선 힘에 밀린 자들에게 드러난 현상이 과연 그 자신에게 있는 것인가?
이는 부조리한 게 아닌가? 라며 의문을 가졌던게 실존철학이다.
실존주의 이후로 유럽에서 이를 점차로 보완하기 위해서 각종 대안들이 나왔고
현재에 이르러선 복지부분에서 최소한 짱개처럼 되지 않기 위해 먹고 살게는 해줄께... 라는게 현재 선진국들의 상황이다.
자유의지는 개독이 만들어낸 혼탁언어이다.
의지가 자유로운게 아니라...
의지가 이미 방향성을 가진 상태이기 때문에 의지의 산물이 현상이다.
그리고 자유는 가치지향성에 따른 선택적 위상이다.
맹목적 자유란 그저 혼돈에 불과하다.
실존주의적 부조리는 혼돈에 빠진게 아니라
의지가 욕망에 비해 현상되는 결과값이 보잘것 없기 때문에 나타난 일종의 좌절이자 억울함이다.
인연따라 흘러간다.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질서값에 따른 현상값이 나타난다.
아닌 건 쳐내고 긴건 끌어들인다.
근데 어리석은 애들은 분별력이 딸려서 이리저리 다른 애들이 던지는 파도에 휩쓸린다.
아닌 곳에 끌려가기 때문에 억지 웃음을 짓고 아귀다툼속에 놓여지는 것이다.
또한 질서를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타인들의 간섭속에서 타인의 질서(욕망)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간섭의 산물이다.
인연도 간섭이라 스스로 독립계에 머물지 않는한
인연따라 생겨나는 세상에서 투쟁은 자연스런 산물이다.
하지만 그룹은 있다.
양아치 그룹, 조폭그룹, 지적인 그룹, 평온한 그룹 등등
비슷한 가치들이 모이는 장들이 있다.
다들 지가 놀 곳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현상계의 구심력을 배제할 수는 없다.
다자간의 간섭이란 건 자연스러운 것이다.
간섭에서 비롯된 주어진 현상 역시 일종의 배경이 되므로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그 어떤 소설도 배경 자체를 중간에 바꿀 수 없다.
이야기는 배경속에서 꽃피기 때문에
현실이라는 불행이 없다면 가공의 행복을 찾아 보겠는가?
불행과 행복은 쌍으로 동전의 양면과 같다.
욕망의 억압에서 욕망이 강화된다.
현실의 한계에서 가공의 파생물에서 욕망을 해소한다.
가공이 발달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세계는 가공된 세계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좀 어렵네 쉽게 가자. 에너지 최소화 ㄱㄱ 어렵다는건 뭔가 인위적인것 같지 않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