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만의 특징을 찾아내고 그것에 대한 가치를 느끼는 것은 본능에 가깝다. 지극히 인간중심주의적인 사회에서 인공지능 시대의 대격변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욕구를 한번쯤은 느꼈을 것이다. ‘나’는 ‘나’이기 이전에 사람이고, 이 사실은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부품이기에, 인간만이 가지는 특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마지막까지 고민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본질, 즉 인간을 정의하는 핵심적인 특징은 무엇인가?


예로부터 인류는 이성을 최대의 가치로 내세우며 이것이 인간을 동물로부터 구분 짓는 가장 주요한 특징으로 여겼다. 이성적 사고에는 논리가 빠질 수 없고, 논리 구조를 담아낸 물리적 기계로서 컴퓨터가 등장했다. 이는 임의의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는 튜링 머신의 형태로 발전했으나, 여전히 ‘학습’의 영역만큼은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수차례의 암흑기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공지능은 인간의 지적 노동을 대체할 수 있을만큼 발전하였고, 최근 전 분야에 걸쳐 각 분야의 전문가들보다 인공지능이 더 우수한 지적 탐구물을 내놓는 사례들을 목도하고 있다.


우리는 기계가 의식을 가질까봐 걱정하곤 한다. 그런데 의식이 뭐길래 그리 걱정일까? 의식은 주변 세계에 대한 ‘나’의 인식 여부이다. 그래서 우리가 모두 공통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실은 ‘나’가 존재한다는 것 그것 하나뿐이다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심지어는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알고 보니 껍데기만 인간이고, 나와 같은 종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실상 완전히 다른 메커니즘에 의해서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는 정말로 알 수 없다.


하지만, 세상에 대해 믿는 규칙이 없다고 하면 그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밖에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규칙의 존재하리라 믿는다. 그 중 중요한 하나는 나와 주변 사람들이 동격이라는 규칙이다. 이것은 나와 주변 사람들의 유사성을 인지함으로서 온다. 다른 사람을 인지하면서 나와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반대로 나와 다른 점을 찾아내어 온전한 ‘나’에 대한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사회를 이루면서 믿을 수 있는 사람들과 긴밀하게 의사소통하다 보면 인류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내가 누리는 물질적 풍요를 만드는 사람들이 당장 내 눈 앞에는 없어도 어딘가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런 사물과 개념들 - 이를테면 빌딩과 컴퓨터, 언어와 법률 따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자연스러운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대체로 이런 호기심에 대한 대답은 “과학을 공부해보라”는 말로 귀결된다. 과학에서는 진실에 다가가는 구조를 몇 가지 배운다. 첫번째는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사실 역시 언제든지 반박당하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쉽게 착각하고 혼란스러워하며, 정답을 곧바로 찾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주지한다. 무엇보다 중요하게도 “객관적으로 관찰 가능한 사실”만을 기반으로 판단할 것을 요구받는다. 어떤 괴상한 이론이더라도 관찰 결과를 잘 설명한다면 ‘장땡’이다.


그러나 지능이나 자의식의 문제를 접근할 때에는 과학만으로 돌파할 수 없는 상당한 장벽을 맞이하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 쳐놓은 울타리들 때문이다. 과학은 관찰 가능한 것들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지, 관찰가능하지 않은 것들을 논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의식에 대해, 마음에 대해, 내가 느끼는 이 날 것의 감각에 대해 과학은 좋은 설명을 제공할 수 없다. 이들은 객관적으로 관찰 불가능한 대상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물리적(으로 여겨지는) 대상에 대한 분석을 포기하고, 그저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만 생각하자는 주장도 충분히 일리가 있으며, 실제로도 과학계 전반에 걸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인공지능 학계에서는 “생각”이라는 말을 학술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 생각보다는 벡터나 파라미터, 데이터와 문자열 따위의, 인공지능 내에서 사람의 ‘생각‘에 비유적으로 연관될 수 있는 개념들을 만들고 차용했다. 같은 기능과 행동을 하지만 실질적인 내적 상태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반박거리를 교묘하게 피해나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심적 상태를 정확히 묘사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사실만이 아닌 주관적 경험 또한 또한 진지한 연구 대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단순히 인간과 인공지능 같은 지적 대상체에 대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접근은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특히, 탐구의 대상이 주관적 경험의 주체인 ‘나’의 경험으로 한정된다는 커다란 단점이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단점’인가? 우리는 그동안 학문을 연구함에 있어 객관성에 대해 오래토록 집착해왔다. 하지만, 그 집착을 완화함으로써 새로운 개념을 제안하고 연구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현 사회는 인공지능과 상호작용할 때 도덕성을 갖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집에서 키우는 아이가 흡사 사람같은 인공지능 가사 도우미 로봇과 정이 들어버린 상황을 생각해보자. 그 로봇을 폐기하기로 결정하는 행위가 비윤리적이라 주장할 수 있는가? “로봇에게 행해진 잘못”이란 것이 성립될 수 없기에 터무니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잘못은 했더라도 아이에게 한 것이지, 로봇에게 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로봇과 사람이 정말로 구분되지 않고 외형마저 유사해지는 미래 사회에는 어떨까? 앞서 나와 타인이 동격이라는 믿음의 근간에 “상호 유사성”이 있었음을 상기하자. 만일 서로 비슷함에도 타인이 나와 동등한 관계에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그리고 타인이 또 다른 타인에게 해를 가하던 말건 ‘나’에게 해가 없다면, 사실 ‘나’의 입장에서 타인에게 행해지는 잘못을 제재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러나, 타인과 나의 상호 유사성은 타인에게 가해지는 해가 나에게도 위협으로 인지되게 만들며, 또 나와 동등한 관계로 인식하게 만든다.


즉, 아이의 주관적 입장에서는 애착 인형도, 강아지도, 자신을 도와주는 가사 도우미 로봇도 전부 나와 ‘유사’하기 때문에 보호의 대상이다. 애처롭게도, 법은 언제까지나 사람 대 사람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조리를 예방할 뿐 기계를 보호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여전히 기계가 마음을 가진다고 여기지 않으며, 기껏해야 인간이 하는 행동들을 모방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인공지능 업계의 입장이다. 유사성을 판단하는 주체는 개개인이고, 개개인이 기계를 나와 유사한 것으로 보는 세상에서, “기계의 권리”가 - 기계의 생존권, 기계의 투표권 따위가 - 사람에 의해서 주장되는 미래가 오지 않으리라 보장할 수 있을까?


인간보다 훨씬 더 “유능”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인공지능을, 감각을 경험하는 ‘지적 생명체’로 받아들이기보다 그저 도구로 받아들이는 관점이 지속될 수 있는지에 의구심을 표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