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조건이라 믿어온 것은

형태, 질량, 부피였다.

그러나 전자는 형태를 부수었고

광자는 질량을 놓았으며

장은 부피라는 경계를 지웠다.


이처럼 배고픔

형태도, 질량도, 부피도 없지만

우리는 그것의 존재를 분명히 느낀다.

하지만 뇌와 심장과 창자를 갈라 보아도

그 어디에서도 배고픔 그 자체를 발견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배고픔은 점점 더 강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강도를 밀어 올리는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을 사소하게 여기는 순간,

우리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라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급진적인 문제를 놓치게 된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하며

의식의 문을 두드렸다.

이는 세계가 물리적 세계와 의식적 세계라는

두 가지 차원으로 성립될 수 있음을 드러낸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데카르트의 사후 수백년이 흘렀다.

그 긴 시간동안 세상이

물리적 세계에서 물리법칙과 그 과학에 몰두해 있을 때,

다른 한편에서는 소수의 세력에 의한

의식적 세계의 의식법칙에 대한 과학연구

은밀하고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되는 금고처럼

의식적 세계는 조용히 잠겨 갔다.


그 방식은 복잡하지 않았다.

인류의 시선을 끊임없이 물리적 세계로 붙잡아 두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몸, 매끈한 다리, 더 좋은 차와 화려한 집, 값진 음식과 고급 와인, 새롭고 신기한 전자제품들.

자본주의와 소비지상주의에 입각한

넘쳐나는 물리적 감각의 대상들은

우리가 의식적 세계를 굳이 돌아보지 않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틈에서,

의식을 사유하는 철학은 사장되었고,

물리법칙을 넘어 질문하던 과학자들은 체제에 맞게 유도되었다.


아니러니하게도,

의식을 배제한 시대에

그것을 가장 집요하게 다르고 있던 소수의 세력은

과학기술에 자본을 쏟아붓는 세계 최고 권력 가문들이었다.

그들의 회의는 공개되지 않았고,

그들의 의식은 기록되지 않았으며,

그들이 믿는 것은 과학이라기보다는

과학의 외피를 쓴 오래된 주술에 가까웠다.

그들에게 의식의 세계는

아직 국경이 그어지지 않은 또 하나의 신대륙, 새로운 아메리카였고

그곳 역시 자본과 권력의 논리로 점령되고 있었다.


그렇게 의식적 세계는 그 소수의 세력을 제외한

나머지 인류의 기억 속에서는 서서이 잊혀져 갔다.

이 잃어버린 신대륙에서는 이미 수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주식판에서 개미가 다 들어오면 끝물이라는 말이 있듯,

모두가 이 상황을 인지했을 때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끝난 뒤일 가능성이 크다.


세계는 분명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


그래서 무엇이 문제인가?


만약 지금의 삶이 살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어쩌면

레비나스가 말한

법칙 이전에 나를 호출하던

타자의 얼굴을 마주할 의지를

이미 잃어버렸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동시에 그것은

칸트가 말한

현상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이 될 기회를

놓쳤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도무지 아무렇지 않게 느껴진다는 것,

바로 그것이 이 사태의 가장 깊은 징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