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eb4c266cfdd2ba37eb7969f19d92a7dd9aa4c21e6cf8725e1f9c181e03011bfd1d3f4ea4e9127

조지프 존 톰슨(Joseph John Thomson) 1856-1940


음극선관 실험을 통해 전자를 발견.

건포도가 박힌 푸딩 모양의 원자 모형을 주장.

동위원소를 발견하였고 질량 분석계를 발명.

기체에 의한 전기 전도에 관한 실험적 연구 및 전자를 발견한 것으로 1906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29b4c325eac43db47780d9b329d42838ddb856d1edec94b15008387a0cc07c2b58ef0c6ce7528c2e88f85b


1. 손재주는 없지만 직관은 천재적이었던 실험가


톰슨은 이론적 통찰력은 천재적이었으나 정작 손재주는 매우 부족해 실험 기구를 직접 만지면 고장내기 일쑤였다. 조수들은 톰슨이 기구 근처에 오면 "교수님, 제발 손대지 마세요!"라고 소리치며 그를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고 한다. 톰슨이 기구를 만지면 공기 누출(vacuum leak)이 생기거나 정밀한 세팅이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톰슨이 새로운 실험 아이디어를 종이 뒷면이나 봉투에 대충 스케치를 휘갈겨 건네주면 조수들은 톰슨의 의도를 파악해 실제 작동 가능한 정밀 기기로 구현해냈다. 톰슨에게는 에버렛(Ebenezer Everett)이라는 전담 조수가 있었는데 톰슨이 전자의 전하량과 질량의 비(e/m)를 측정하기 위해 음극선관을 설계할 때 에버렛에게 진공관 내부의 전극 배치와 자기장 장치를 어떻게 설계할지 구두로 상세히 지시했다. 톰슨은 머릿속으로 이미 물리적 모델을 완성한 상태였고, 에버렛은 그 지시를 바탕으로 유리관을 불고 금속판을 깎았다. 톰슨은 조수의 손을 빌려 자신의 설계를 완성함으로써 인류 최초로 아원자 입자인 전자의 존재를 증명해냈다. 훗날 사람들은 "톰슨은 생각하고 에버렛은 만들었다"고 평할 정도였다.






39b5df2bf6dd36993d80d4bc119f2e2def6a16054f361533c617211ed4


2. 노벨상 제조기. 카벤디시 연구소의 수장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카벤디시 연구소를 이끌며 7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해냈다. 그의 아들인 조지 패짓 톰슨도 노벨상을 받았는데, 전자의 회절 현상이 드브로이 파장과 일치한 것을 입증한 것이다. 아버지는 전자가 입자임을 증명해서 노벨상을 탔고 아들은 전자가 파동임을 입증해서 노벨상을 탔으니 부자가 힘을 합쳐 전자의 이중성을 완성한 셈이다. 그의 제자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핵물리학의 아버지 어니스트 러더퍼드였다. 그는 뉴질랜드에서 온 시골 청년 러더퍼드의 비범함을 단번에 알아보고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훗날 러더퍼드가 스승인 톰슨의 원자 모델(푸딩 모델)이 틀렸음을 증명(원자핵 발견)했을 때도 톰슨은 질투하기보다 제자의 성취를 진심으로 기뻐하며 학문적으로 지지해주었다. 반면 보어와는 그리 사이가 좋지 못했다. 보어는 당시 물리학의 성지였던 케임브리지의 톰슨 밑에서 공부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첫 만남에서 보어가 서툰 영어로 톰슨이 쓴 논문을 펼치며 손가락으로 "이 부분은 틀렸습니다(This is wrong)"라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당시 톰슨은 세계 최고의 권위자였고 성격이 온화했지만 자신의 업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새파란 외국인 학생을 살갑게 대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톰슨은 보어에게 연구 주제를 제대로 주지 않았고, 보어는 카벤디시 연구소에서 한동안 방황하며 "톰슨은 내 논문을 읽지도 않는다"며 투덜댔다. 결국 보어는 톰슨의 제자였던 러더퍼드에게로 옮겨갔고, 그곳에서 우리가 아는 '보어의 원자 모델'을 완성한다.






74ed8373b38076ac7eb8f68b12d21a1d9453e81ba3


3. 정원 가꾸기 마니아


톰슨은 연구실 밖에서는 열렬한 정원사였다. 특히 희귀한 식물과 꽃을 수집하고 키우는 데 진심이었는데, 동료들은 그가 복잡한 물리 방정식을 풀 때보다 정원에서 잡초를 뽑을 때 더 행복해 보인다고 말할 정도였다. 톰슨은 정원에서 동료들과 산책하며 단순히 꽃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식물의 형태와 성장을 물리적 구조와 연결해 질문을 던지곤 했다. 톰슨은 식물의 잎이 줄기에 붙는 방식이나 꽃잎의 개수가 피보나치 수열을 따르는 것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동료들에게 "이 식물이 햇빛을 최대한 받기 위해 선택한 이 기하학적 배치가 우리가 연구하는 원자 내부의 전자 배치(Electron configuration)와 어떤 공통점이 있지 않겠나?" 같은 질문을 던지며 토론을 유도했다. 식물이 중력을 거스르고 위로 자라는 힘이나, 덩굴식물이 나선형으로 휘감아 올라가는 '나선성(Helicity)'을 보며 물리학적 에너지 효율성에 대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토론하곤 했다. 톰슨은 식물의 '변이(Variation)'에 대해서도 깊은 통찰을 보였다. 그는 같은 종류의 식물이라도 정원의 위치(일조량, 토양 상태)에 따라 다르게 자라는 모습을 보며 동료들과 논쟁했습니다. 특히 그는 "환경이 소립자의 궤도를 바꾸듯, 환경이 식물의 형질을 결정짓는 결정적 변수"라는 관점을 가졌다. 당시 영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진화론은 뜨거운 감자였고, 톰슨은 정원에서 변종 식물을 발견하면 동료들을 불러 모아 "이 변이가 우연한 돌연변이인지, 아니면 생존을 위한 필연적 선택인지"에 대해 물리학적 인과율을 대입해 토론하는 것을 즐겼다. 이 토론들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 곳은 그가 거주했던 트리니티 칼리지의 'Master's Lodge' 정원이었다. 톰슨은 매일 오후 4시경, 연구소 동료들과 학생들을 자신의 정원으로 초대해 차를 마셨다. 이때 대화의 주제는 물리 방정식에서 시작해 결국 정원의 식물들로 옮겨가곤 했다. 제자인 러더퍼드는 스승의 식물 사랑을 재밌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루해하기도 했다. 톰슨이 "이 꽃의 변이가 놀랍지 않은가?"라고 물으면 성격 급한 러더퍼드는 "교수님, 꽃 이야기는 그만하고 알파 입자 이야기나 하시죠!"라고 대꾸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럼에도 톰슨은 아랑곳하지 않고 식물의 줄기를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고 한다.





39b5df2bf6dd36eb3fed8ee0459c2732f208827610b2bad011197168f76e82ad4886ad7566eade5ac0e035a68621e826cee699a0ff79d091a8


4. 크리켓 광팬


톰슨은 운동 신경은 부족했지만 데이터에 강한 물리학자답게 크리켓의 '전략과 통계'에 매료되었다. 톰슨은 자신이 소속된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 크리켓 팀의 열렬한 팬이었고, 경기가 있는 날이면 연구실 창밖으로 운동장을 내다보거나 직접 경기장을 찾아가 복잡한 경기 기록지를 분석하며 관람하곤 했다.
 그는 투수가 던지는 공의 회전과 궤적(스핀)을 보며 공기 역학적인 호기심을 느꼈고, 이를 제자들과 대화할 때 물리 법칙의 예시로 들기도 했다.
 재밌는 점은 톰슨이 그토록 아꼈던 제자 러더퍼드는 뉴질랜드 출신답게 크리켓보다는 거친 럭비를 훨씬 좋아했다는 사실이다.




0797ef12eddd35b561b1e9bc18ee2c34178f9460c2202c52956137a01f58339e323bfb7589


5. 주식 투자와 재테크의 귀재


당시 물리학자로서는 드물게 그는 주식 투자에 상당한 재능이 있었고, 검소한 생활 습관과 영리한 투자를 병행해 사후에 상당한 액수의 유산을 남겼다. 톰슨은 사후에 당시 돈으로 82,000파운드(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60억~80억 원 사이)라는 거액의 유산을 남겼다. 그의 포트폴리오는 상당히 다각화되어 있었는데, 현대의 자산운용가 못지않은 '가치 투자'와 '분산 투자'의 원칙을 지켰다. 그는 당시 가장 유망한 성장 산업이었던 영국 및 해외 철도 회사들(Railways)에 대거 투자했다. 이는 오늘날의 '빅테크' 기업에 투자한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영국뿐만 아니라 해외의 국채에도 투자하여 리스크를 분산했다. 그리고 당시 막 부흥하기 시작한 다양한 제조 및 산업 관련 주식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톰슨의 투자는 요행을 바라는 투기가 아니었다. 그는 매일 아침 거시 경제 지표와 기업들의 실적 보고서를 꼼꼼히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실험 데이터를 분석하듯 주식 시장의 흐름을 분석한 것이다. 그는 시장이 공포에 질려 있을 때 우량주를 사고, 과열되었을 때 파는 원칙을 고수했다. 동료들은 그가 물리학 실험 기구는 잘 못 다뤄도 주식 차트와 재무제표를 읽는 눈만큼은 누구보다 정확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그는 평생 화려한 삶을 멀리하고 검소하게 살았다. 교수 월급과 강연료 등을 차곡차곡 모아 투자 자금으로 활용했다. 당시 카벤디시 연구소는 국가 지원이 넉넉하지 않았다. 연구소장으로서 그는 연구 비품을 사고 우수한 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해 항상 '돈' 문제에 밝아야 했고, 이것이 개인적인 자산 관리 능력으로도 이어졌다. 또한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학업을 중단할 뻔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그를 경제적으로 철저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분석도 있다. 그는 장학금을 받지 못해 학업을 중단할 위기에 처한 학생들을 위해 사비로 지원책을 마련하거나, 연구소 직원들의 복지를 세심하게 챙기는 등 리더로서의 책임감이 매우 강했던 인물이다. 한편 그의 제자였던 러더퍼드는 스승인 톰슨이 주식으로 큰돈을 벌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물리학자가 어떻게 그렇게 돈에 신경을 쓸 수 있느냐"며 농담 섞인 핀잔을 주기도 했는데, 정작 러더퍼드 본인은 돈 관리에는 젬병이었다고 한다.






7ced8272f5ca75ac20b5988a02d92b3029e7fa787278dbc4b5d678e36e9c3b51401e4f47fb40f585c96f10ebd020027464a87435f82e064e1a988d872adacacef052


6. 트리니티 칼리지의 중재자


톰슨은 성격이 원만하고 신중했기 때문에 당대의 괴팍한 천재들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자주 했다. 특히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톰슨보다 16살 아래였지만, 두 사람은 동료 펠로우로서 수십 년간 교류했다. 두 사람은 트리니티 칼리지의 교수 식당인 하이 테이블(High Table)에서 거의 매일 저녁을 함께 먹으며 대화했다. 러셀은 수학과 논리학 뿐만 아니라 물리학의 최신 발견에도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톰슨으로부터 '전자의 발견'과 '원자 구조'에 대한 설명을 직접 들으며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확장했다. 러셀은 이후 대중을 위한 과학 해설서인 <상대성 이론의 ABC>를 썼는데, 이 책을 집필할 때 톰슨이 보여준 물리학에 대한 태도와 직관이 큰 영감을 주었다고 밝혔다. 훗날 러셀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톰슨을 "아주 친절하고 유머러스하며, 어떤 주제로 대화해도 지루할 틈이 없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대립했는데 당시 톰슨은 카벤디시 연구소장으로서 영국의 승리를 위해 과학적 역량을 총동원해야 한다고 믿는 애국적인 인물이었던 반면 러셀은 열렬한 반전주의자로 활동하며 징집 반대 운동을 벌였다. 1916년 러셀이 반전 활동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자 트리니티 칼리지는 그의 펠로우 직위를 박탈했다. 톰슨은 당시 대학의 원로로서 이 결정에 가담하거나 방조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러셀의 천재성을 아까워하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전쟁이 끝난 후 1925년 러셀이 다시 복직될 때 톰슨은 이를 환영하며 오랜 감정을 씻어낸다.



그 밖의 유명한 인물들과의 교제


윌리엄 브래그, 로런스 브래그(부자 노벨상 수상자): X선 회절 연구로 유명한 브래그 부자 역시 톰슨의 제자이자 동료였다. 톰슨은 이들이 연구를 수행할 수 있도록 카벤디시 연구소의 자원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프랜시스 애스턴 (질량 분석계 발명): 애스턴은 톰슨의 조수로 일하며 그의 연구를 도왔던 인물이다. 톰슨은 손재주가 없었지만 애스턴은 기계 제작의 달인이었다. 톰슨의 직관과 애스턴의 기술력이 만나 '동위원소'의 발견이라는 대업을 이뤄냈다.


아인슈타인: 직접적인 사제 관계는 아니지만 1919년 에딩턴이 일식 관측을 통해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증명했을 때, 그 결과를 공식적으로 세상에 발표한 학회(왕립학회)의 의장이 바로 J.J. 톰슨이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가리켜 "인류 사고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취 중 하나"라고 극찬하며 아인슈타인이 세계적인 스타가 되는 데 보증인 역할을 했다.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이 공학에서 철학으로 관심을 옮기기 전, 톰슨의 실험실에서 항공역학 관련 실험을 돕기도 했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를 철학의 길로 이끌었는데, 이 과정에서 톰슨은 비트겐슈타인이 가진 '실험가적 기질'과 '집요함'에 대해 러셀과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톰슨은 그를 "매우 똑똑하지만 다루기 힘든 청년"으로 기억했다. 비트겐슈타인은 톰슨의 '기계론적인 세계관'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


케인즈: 톰슨과 케인즈는 트리니티 칼리지의 교수 식당에서 저녁마다 마주앉아 대화하던 사이였다. 톰슨은 물리학자였지만 주식 투자와 자산 관리에 능했고, 케인즈는 경제학자였지만 수학적 기초가 매우 탄탄했다. 두 사람은 자본의 흐름이나 통계적 확률에 대해 자주 의견을 나누었다. 톰슨이 주식 투자를 통해 거액의 유산을 남길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인 케인즈와의 대화가 일조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케인즈 역시 투자로 큰돈을 벌고 잃기를 반복했던 인물이라 두 사람은 연구실 밖에서 꽤나 현실적인 '재테크' 정보를 나누었다.
 또한 케인즈는 트리니티 칼리지의 재무 담당(Bursar)을 맡아 대학의 자산을 획기적으로 불린 것으로 유명하다. 톰슨은 당시 대학의 원로이자 학장(Master)으로서 케인즈의 과감한 투자 정책을 지지하고 승인해 주는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당시 러셀의 제명 사건 때, 케인즈는 러셀의 편에 서서 대학 당국에 항의했고 이때 톰슨은 대학의 수장으로서 난처한 입장이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 두 사람은 다시 손을 잡고 대학의 정상화를 위해 힘썼다.






19b5df2bf6dd36996face9b429d22c34b953b0cb957a21dfb56a14bb6e33d3d9a35e470e3ef3da


7.웨스트민스터 사원 안장


톰슨의 아버지는 맨체스터에서 서점과 출판업을 하던 사람이었고 당시 기준으로 보면 '상인 계급'이자 '중산층(Middle Class)'에 해당한다. 그가 1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계가 급격히 기울자 그는 공학자가 되기 위해 도제 생활을 하려 했으나, 다행히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톰슨은 명문가 자제는 아니었지만 압도적인 수학적 재능 덕분에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의 장학생이 되었다. 톰슨은 자신이 중산층에서 자수성가한 인물이었기에 오히려 출신 배경보다 실력을 중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가 연구소장이 된 후, 뉴질랜드 시골 출신의 러더퍼드를 받아들인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보수적인 학계였다면 "식민지 변방 출신"이라며 무시했겠지만 톰슨은 오직 그의 천재성만 보고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1908년 그는 과학적 공로를 인정받아 국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고 이때부터 그는 'Sir Joseph John Thomson'으로 불리며 사회적 신분이 상류층(Gentry)으로 공식 격상되었다.
 그의 신분 상승과 사회적 위상을 보여주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그가 묻힌 장소다. 톰슨은 사후에 영국의 성인과 영웅들만 묻힐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에 안장되었다. 그것도 아이작 뉴턴의 묘 바로 옆자리였다.






7beb8773b1d768f13abbd0b41484223817bc2a4bd102d3d0bf898f329a9002e82c009b75424db6bf42cfb63f1972c1


J.J. 톰슨은 제자인 로즈 패짓(Rose Paget)과 결혼 후 1남 1녀를 두었다. 딸인 조안 패짓 톰슨(Joan Paget Thomson, 결혼 후 이름 조안 차녹 Joan Charnock)은 주로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도서, 그리고 전기와 역사 관련 서적을 집필한 작가였다. 그녀는 남편 해리 차녹(Harry Charnock)이 러시아에서 오랫동안 거주했던 영향으로 러시아와 폴란드의 역사, 문화, 인물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이를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전기 및 역사서


《레닌: 그 사람과 그의 일》 (Lenin: The Man and His Work, 1968): 구소련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의 생애를 다룬 전기

《러시아 여행》 (The Russian Horse, 1970):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배경으로 한 작품

《폴란드 입문》 (An Introduction to Poland, 1972): 폴란드의 역사와 배경을 설명하는 입문서


아동 및 청소년 도서


《모스크바의 일가족》 (A Family in Moscow, 1958)

《러시아에 대해 알기》 (Getting to Know Russia, 1962)


《어린이를 위한 러시아 이야기》 (The Russian Twins, 1963)


가족 관련 기록


《우리가 기억하는 J.J. 톰슨》 (J.J. Thomson as we remember him): 오빠인 조지 패짓 톰슨(George Paget Thomson)과 공동으로 집필한 글이나 기록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아버지의 사적인 모습과 연구 환경을 증언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