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안스님과 현각스님은 화계사 숭산스님의 제자로 두 스님 모두 외국인 신분으로 스님이 되었습니다. 2009.07.10 첨언)
2008.05.13 08:41
청안스님 법문
오늘은 개인과 업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나"라는 생각을 가진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실로 무엇인가?
그것이 오늘의 주제입니다.
가르침이라는 것이 늘 그러했듯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서 시작해 봅시다.
우리에겐 이미 자신에 대한 이미지가 있지만
핵심적 질문이며 실은 선의 정수라 할 만한 것은
"나는 무엇인가?" 라고 진실로 묻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에 대하여 집착하지 말고
진정한 나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명한 예를 하나 들어보죠.
여기 자신이 용감하다고
생각하는 강한 남자가 하나 있습니다.
강한 그는 큰 차를 몰고 과속으로 갑니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이 나타나 차를 세웁니다.
그 순간 강한 남자는 어린아이로 돌변하여
"아이쿠, 죄송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용감하다고 자처했던 그가 경찰은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경찰을 만난 순간 딴 사람이 됩니다.
만약 계속화여 용감한 척하고 경찰에게
거만하게 굴었다면 딱지 떼고 벌금을 물었겠지요.
간단한 예지만 이것은 우리가 평소 지나던
자아감이 어떤 특별 상황에 부닥쳤을 때
우리의 인간관계와 기능은 그것이 옳다고
확인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엄마들은 아기를 낳으며 생각하지요.
"나는 내 자식을 정말 사랑해!"
그런데 이삼년만 지나 보십시요.
아이에게 고함을 지르고 꿈에도 생각지 못한 말까지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이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라 여겼는데
한 순간 경계가 다가오고 엄청난 분노가 일어납니다.
언제나 자신과 함께 하고 절대 잃어버리지 않으리라 여겼던
자애로운 모성은 그때 찿을 길이 없어요.
이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잃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 우리가 얻을 수 없는 것은 무엇이고
잃을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먼저 나에 대하여 이미 이해하고 있는 것을 볼까요.
영어로는 나를 "I" 라고 부릅니다.
헝가리어로는 나를 "In"이라 하고
한국어로는 "개인, 제가, 내가, 나는" 이라고 해요.
한국어는 정말 대단해요. 나 자신을 상대나 상황에 따라 크게
4가지로 표현하니까요.
우리에겐 5가지 감각이 있어요. 만약 우리가 눈,귀,코,혀,몸을 잃게
되면 힘들 것입니다.
또한 6번째 감각인 사고가 있어요.
동양에서는 사고가 감각기관과 연결되어 있고
두뇌에서 생성되고 인식된다는 설명을 이해하는데 그다지 어려움이 없습
니다.
처음 여섯개의 차원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밑에서 부터 시작하여 눈,귀,코,혀,몸이 있지요.
우리는 여기에 편안하게 선을 그을 수 있어요.
그리고 여기 마음이 있습니다.
흥미롭지요. 눈은 시각, 귀는 청각, 코는 후각, 혀는 미각, 몸은 촉각과
관련이 있어요.
이와 같은 작용으로 우리는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일일이 쓰진 않고 모두 그냥 "C"로 표시하겠습니다.
현대적 사고를 빌어 인간을 정보의 집합체로 본다면 몸을 돌아다니는
5가지 정보가 있습니다.
이러한 정보를 한데 묶으면 육체적 존재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눈,귀,코,혀,몸과 6번째 요소인 마음(mind)이 없다면
육체적인 실체가 있다 해도 사람으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마음은 흥미로운 것으로서 사고가 있고 생각하는 식(識) 즉, 의식이 있어
요.
그 작용은 무엇일까요?
이 방에 계신 여러분은 모두 컴퓨터를 사용할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처리장치 즉, CPU(중앙처리장치)입니다.
여기에서 당신의 말과 생각이 만들어집니다. 아시겠지요?
(칠판의 설명 공간이 모자람을 확인하면서) 아! 벌써 공간이 모자라는군
요.
20년 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 의식은 컴퓨터의 CPU에 해당되고 오감은 키보드, 모니터, 프린터
역할을 하지요.
즉, 컴퓨터 작업에서 들고 나는 포트 역할을 합니다.
그곳을 통해 데이터를 받고 세상으로 내 보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을 복합 유기체로 생각하는 것은 냉혹한 일이 아닙니다.
자신을 탄탄한 "나"로 생각하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 보면 단지
사고,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만이 있을 뿐이고 이러한
6식(六識) 위에다가 무언가를 붙여 놓았어요.
이것을 "꼬리표(Label)"라 부르는데 우리는 여기에 "나" 또는 "에고" 라
는 꼬리표를 붙였지요.
이런 정보 처리 위에 결정권자가 있는데 이를 7식, 즉 분별식이라 합니다
.
이것은 개념적 사고 위에 있습니다.
개념적 사고를 여기에 배치하죠.
여기에서 개념과 말을 형성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언어 감각이 옳다면
당신의 CPU는 매우 고성능이라 하겠습니다.
여러가지 과제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고
멀티미디어도 가능하지요.
언어 기호를 시각화할 수도 있지요.
이것이 바로 개념적 사고의 마음입니다.
그 다음에 분별실이 있어요.
바로 이곳에서 선악이 탄생합니다.
즉, 여기 이 단계까지는 개념만을 형성하여
"이것은 마이크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분별식은 "이것은 좋은 마이크다"라고 하죠.
한 사람은 "그는 중앙아프리카인이다"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은 "나는 중앙아프리카에서 온 그가 좋아" 라고
하는데 이것이 분별식입니다.
분별식 뒤에 8식인 장식(藏識)이 있습니다.
이들 식(識)에는 모두 산스크리드어, 팔리어, 중국어 이름이
있지만 일일이 설명하지는 않겠어요. 경전을 읽으면 다 알수가 있습니다.
장식은 당신의 메모리로써 기억을 합니다.
즉, "나는 이 중앙아프리카만을 만난 적이 있고 내가 좋아했다"
이 세가지는 하나로 녹아 있습니다.
의식, 분별식, 장식은 떨어질 수 없는 사이처럼 함께 작용을 합니다.
누군가를 보는 순간 처음 만난 것인지 두번째인지 3번 이상 만났는지 압
니다.
좋은 기억, 좋은 인상, 좋은 경험을 기억합니다.
중앙아프리카에 관한 당신의 기억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에 따라서
즉, 그곳에서의 즐거웠던 시간, 멋진 방문, 수 많은 코끼리를 보았던 일,
사파리에 갔던 경험이 있다면 중앙아프리카 사람을 좋아하게 됩니다.
하지만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즉, 사파리를 하는 동안 죽을 뻔
했다던가 하마에게 잡아 먹힐 뻔 했던가 악어에게 다리를 뜯길 뻔 했다면
중앙아프리카는 좋은 기억이 될 수 없죠. 긴 말할 필요 없이 좋다 나쁘다
는 생각 즉, 당신의 이원적 사고를 결정짓는 것은 당신의 기억입니다.
이 분별식에서 정말 재미있는 것은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한다는 것
입니다.
이는 우리 의식의 근원적 이분법으로써 컴퓨터에 비유한다면 우리를
조종하는 통제장치죠.
컴퓨터에선 통제장치가 아주 단순합니다.
그저 이쪽, 저쪽으로 가라고 신호만 보냅니다.
이분법적 의식도 이와 같습니다.
"나는 이것을 원하고 저것을 원치 않아"
"이 사람은 가까이 하고 저 사람은 멀리 해야 해"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 우리가 들어서는 순간 이 의식은 하도 빨리
작용해서 이 사람에겐 다가가고 저 사람에겐 멀어지길 원하여 우리 몸은
본능적으로 그쪽으로 향합니다.
강의실에 들어서거나 집에 갈 때 즉,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 들어설 때는
소위 집단 역학이 작용합니다.
이는 인간이 서로 관계하는 방식으로써 다음 강의에서 충분히 논의할
것이며 여기 이것들에 달려 있습니다.
좋아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버스 안에서도 공간 점유방식을 지배합니다.
(유전 주: Safety zone 의 확대 공간)
여자친구를 찾는 젊은 남자는 본능적으로 늙은 사람보다는 젊은 여자에게
가까이 가고 안정된 친구를 찾는 늙은 사람은 동년배에게로 가죠.
이것이 인간의 기본 심리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이것은 알라야(alaya) 이것은 마나스(manas).
이것은 비지나나(vijnana)라고 해요.
우리 기억은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와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컴퓨터 비유법을 쓰는 것은 여러분이 다른 생각, 다른 그림,
다른 비유법을 생각 해 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컴퓨터가 아닙니다. 하지만 물리학자나 생명공학자조
차도
인간과 기계의 주요 차이점이 무엇인지 묻고 있습니다.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네?
(청중: 사고 능력이요)
사고라! 기계가 생각이란 것을 하도록 프로그램할 수 있잖아요.
(청중: 감정인가요?)
아니오!
(청중: 갈등인가요? 지성인가요? 열정?)
아니오!
(청중: 자비심?)
실은 로봇에게 자비심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공상과학소설 이야기가 아니라 감정상태를 감지하도록
프로그래밍하는 것입니다.
(의식?)
이런 의식을 생각하면 아닙니다. 실은 체스게임에서는 때로
기계가 사람을 이기기도 합니다.
IBM 컴퓨터가 세계 최고의 체스 고수 3명과 대결하여 2명을 이겼습니다.
1명에겐 졌죠.
인간에게는 실로 매우 흥미로운 무언가가 있어요.
그것을 찾지 못하면 다음 생에 우린 기계가 될 것입니다.
(청중: 기계는 아이를 낳을 수 없지요)
아니 낳을 수 있어요. 생식이 가능해요.
기계가 기계를 만들어내는 것을 생각하면 아기를 낳는거죠.
로봇이 우리 자동차를 만듭니다.
현대자동차, 기아, 대우, 삼성 중 어느 공장에 가 보아도 기계가
기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청중: 기계는 메모리가 한정되어 있지요)
아니요. 한정된 메모리와 기억은 기계와 인간이 공유합니다.
(청중: 감정은요?)
아니요. 기계가 감정을 갖도록 프로그램할 수 있습니다.
실은 부모님은 우리가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안 그래요?
아이가 잘못을 저지른 후 모른 척 하면 부모가 아이한테
"너는 미안해 해야 하는거야"라고 가르쳐 줍니다.
위대한 사람도 잘못을 했으면 머리를 숙이라고 배웁니다.
아시아에서 저는 본 적이 있어요.
지위가 높은 사람이 넥타이에 정장을 하고 나와 국민에게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구하더군요.
서양에서는 불행히도 그런 전통이 사라졌습니다.
(청중: 인간 내의 의식이 변하잖아요)
아니요. 명확하지 않아요.
이제 사람과 기계의 근본적인 차이점과 불성(佛性)이라는 것에 대해
설명 하겠습니다.
컴퓨터는 사람과 똑같은 의식으로 "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컴퓨터는 프로그램을 요하고 내적 성찰이 불가능하죠.
스스로를 변화 시키지도 못합니다.
인간은 존재의 근원적 핵심을 안으로 성찰함으로써 해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컴퓨터에게 "나는 무엇인가?"를 말하라고 아무리 가르쳐도 깨달음을
얻진 못할 것입니다.
단지 이 질문을 끝없이 반복하겠지요. 하지만 사람은 생각을 넘어설 수
있고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우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계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욕구도 지식도 없습니다.
우리가 불성이라 부르는 이것은 맑은 거울과 같은 의식으로서
지금 당신 안에서 당신 말을 듣고 있고 이것을 이해하고, 처리하여
사용하기를 원합니다.
이를 근거로 우리도 똑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밖에는 모든 것이 다 다릅니다.
개개의 경우마다 하드디스크의 내용은 다릅니다.
통제장치와 통제하는 프로그램도 다릅니다. CPU 작동법도 다릅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법은 대체로 같지만 개별적으로는 각자의 눈,
시각, 안식(眼識)에 따라 사물을 다르게 봅니다. 우리가 업이나 인과라고
묘사하는 모든 것이 다 다르지만 오직 불성 즉 인간의 본성만이 동일합니
다.
무엇이 이것을 증명해 줄까요?
첫째. 어떤 사람이 깨달은 사람이라 일컬어지고 우리가 그들을 현자로
받아들이고 그들이 더 지혜롭기에 우리를 가르친다는 사실이 있지요.
또한 자비심이라 불리는 소박한 녀석이 있지요. 즉 우리가 다른 사람과
어떻게 연대하는가?
이는 우리 모두가 지닌 본질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고 차이점에 매어 있다면 우리는 절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될 수도 없고 그의 감정을 느낄 수도 없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사고가 너무나 강렬하여 코 앞에 있는 사람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요.
생각이 끊어지면 마음은 허공처럼 비어있고 거울처럼 맑아져서
다른 사람을 비출 수 있어요.
그때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고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가끔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지각할 수도 있어요.
우리 모두가 그런 불성을 지녔어요. 그런데 왜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까요
?
우리가 대부분의 경우 불성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이 모든 것에
자신을 동일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나"라고 "나 자신" 이라고 이름 붙여 놓았지만
이것은 그저 우리의 기계일 뿐입니다.
만일 "나는 무엇인가?"라고 진정으로 묻는다면 곧바로 무념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질문이 우리의 이분법적 사고, 모든 기억과 모든 인지를 다 흡수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의 눈,귀,코,혀,몸은 맑아지고 종국에는 사고 역시 명료해집니
다.
기계는 반야심경을 이해할 수 없지만 사람은 반야심경을 수행할 수 있습
니다.
비록 속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말이죠.
반야심경이 설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에겐 본래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고, 혀도 없고, 몸도 없고,
마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자로서 매일 염송하는 반야심경을 잘 기억하십시요.
반야심경은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기능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의 시작부분을 기억하세요?
관세음보살이 초월적 지혜에 든 상태에서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가지
덩어리, 즉 오온이 본래 공함을 지각했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평소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습적 사고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죠.
인습적 사고에 대한 집착이 우리가 겪는 온갖 고통을 만들어 냅니다.
실은 이곳 즉 우리의 통제장치 안에서 무지, 즉 온갖 잘못된 견해를
만들어 내고 이러한 무지에 근원하여 성냄과 욕망이 일어납니다.
그리하여 선과 악, 긍정과 부정을 가름하고 그에 따라 매력을 느끼거나
멀어지지요.
실은 멀어진다기 보다는 비난을 하지요. 대상을 멀리 밀어내거나
가까이 하려 합니다.
이런 의식에는 욕망형과 분노형이 있어요. 좋아하지 않는 것은
파괴하려 하고 욕망의 대상으로 원하는 것은 증식하려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미혹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깨달은 이들이 지혜는 우리에게 이것의 존재와 기능을
알려주고 이는 단지 우리의 두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온 존재
온 삶을 위한 것입니다.
왜냐?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실은 다음 생의 조건들을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죽음의 순간 우리의 눈, 귀, 코, 혀, 몸,
사고는 즉, 6식은 그 위의 분별식, 장식과 분리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두뇌와 감각기관 등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죽음과 함께 이 6식의 활동은 완전히 지워집니다.
(유전 주: 백(魄)
그리고 남은 이 두 가지가 다음 생으로 이전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료한 기억과 분별이 중요한 것입니다.
다음 생에 제대로 태어나기 위해서 말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제대로 태어나는 일은 가르침에 가까이
태어나는 것,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절간의 개나 고양이로는 부족합니다.
절간의 개나 고양이를 보면 예불을 들을 수 있어도 몸은 짐승의
몸입니다.
그들을 보면 우린 말하죠. 이 생에 잘해서 다음 생엔 인간의 몸을 받아라
.
절간의 동물도 불자의 업이 있긴 하지만 수행이 명료하지 못하고
음식이나 안락함에 집착하여 개나 고양이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중국에 유명한 선사가 있었는데 동안거가 끝나자 학생들 즉 비구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자네들이 죽으면 어떻게 다시 태어날까?"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자
선사는 말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나는 재가 신도의 집에서 일하는 소로 태어날 것이다"
문제는 선사가 왜 그런 말을 했는가입니다.
우리는 절간의 개와 고양이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 소와 재가자의 집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나요?
스님들이 시주를 받는 것은 법을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법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거나 열심히 정진하지 않거나
수행 방향이 올바르지 못하면 이미 받은 시주를 되돌려 주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재가자를 잘 섬기기만 하는 동물로 다시 태어나 시주를 갚는
것입니다.
소는 무엇을 할까요?
그저 외양간에 서 있거나, 걷거나, 사료를 먹고는 우리에게 우유를 주고
종국에는 고기, 가죽, 뼈까지 모든 것을 줍니다.
만약 사람들이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그와 같은 업보를 받을 수도 있습니
다.
과거의 기억이나 분별식과 동일화하는 한 우리는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 놓아버리고 이 두가지와 더 이상 동일화하지 않는 순간
우리는 자유인이 됩니다. 간단한 일입니다.
그 다음엔 "모른다"로 돌아갑니다.
니르바나나 천국 등의 개념을 생각하지 마세요.
이들은 다 우리 CPU가 만들어 낸 것으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옛 선사가 말씀하셨어요. "깨달음에 대한 생각조차 큰 잘못이다"
왜냐하면 생각하면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때 즉시 하나가 되어 얻을 수 있으며
그것은 사고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닙니다.
식(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며 참선 중에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도 여러분은 저를 믿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점검하고 관찰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잘 관찰하고 재검, 삼검하시기를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이 설명대로 그리 되고 있는가?
만약 제 설명이 맞는다면 그를 사용하여 수련은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만약 제 설명이 맞지 않으면 그냥 버리세요. 믿지도 말고 따르지도 마세
요.
하지만 제 설명이 맞는다면 그를 사용하여 의식을 더 맑고 자비롭게 하시
고 제대로 수련된 사람이 되십시요. 수련은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엄청난 가능성입니다.
지구상의 다른 존재들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
오직 인간만이 불성을 즉, 깨달음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고를 넘어서서 말이죠. 반야심경의 만트라인
"카테 가테 빠라까테 빠라상가테 보디 스바하"는 문을 통과하여
부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어요.
그것은 인간의 위대한 가능성이며 저는 한 사람도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그것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세상엔 "나"라는 아상으로 부터 오는 문제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진정한 자신을 증득하지 못한다면 외적인 해결책은 없습니다
.
올바른 대안도 없어요. 지난 이천여년 동안 인류는 수도 없이 많은
대안들을 실행했지만 결과는 대동소이하게 나쁜 상황을, 심각하고
극적인 상황을 초래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겐 단 하나만이 존재하고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고 있어요.
의식이 변화하지 않는 한, 세상의 진정한 모습을 깨닫지 못하는 한,
외적 해결책은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을 증득했을 때 그것은 당신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
모든 것이 하나가 됩니다.
우리는 같은 본질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본질, 나의 본질, 모든 중생의 본질, 모든 이름과 형태의
본질은 결국은 하나입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그 허공처럼 공한 깨달음에 근거하여 당신의 마음,
나의 마음, 모든 이의 마음이 거울처럼 명료해 집니다.
허공처럼 공한 본질이며 실체죠.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진리를 지각합니
다.
하늘은 파랗고 나무는 푸른 것을 봅니다.
어떤이는 얼굴이 하얗지만 노란 얼굴, 붉은 얼굴, 검은 얼굴, 갈색 얼굴
도 있죠.
그 자체로 더 좋고 나쁜 것은 없어요. 단지 색이 다를 뿐입니다.
진리는 거울처럼 명료합니다.
빨간색이 오면 빨간색만 보입니다.
하얀색이 오면 하얀색만 보입니다.
그것 뿐이에요.
동유럽에서는 빨간색이나 붉은 별을 보여주면 공산주의와 관련 되었다는
생각을 하죠.
그런데 뮌헨에서 붉은 별을 보여 주면 사람들은 하이네켄 맥주를 생각합
니다.
서유럽으로 가서 하얀 별을 보여주면 나토(NATO)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것은 다 사람의 생각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과거 언젠가 어떤 사람이 작은 붉은 별을 하이네켄 로고로 하자고
제안해 그리 되었고 또 언젠가 어떤 사람이 붉은 별을 공산주의 로고로
하자고 해서 그리 된 것입니다.
어떤 훨씬 큰 붉은 별이 사용되었고 낫과 망치도 공산주의 상징으로
하자고 해서 그리 된 것입니다.
언제라도 이전에 공산주의였던 나라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그것이
존재함을 알 수 있어요.
그들의 마음속에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입
니다.
기억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구별하는 것도 나쁜 것이 아
닙니다.
하지만 그것과 동일화하거나 집착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언행을
가져오고 미혹된 사고를 초래합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헝가리 시골 마을에서 누군가 붉은 별을
크리스마스 트리 꼭대기에 달았어요.
크리스마스 트리 꼭대기에 하트 모양이나 별을 다는 것은 오랜 관습입니
다.
그런데 그가 공산주의 상징을 사용했다 하여 사람들이 기소를 했고 그는
법정에 서서 해명을 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구 독재체제를 선전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것을 크리스마스 트리에 사용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미혹된 생각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실체를 증득하여 진리를 받아들이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진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진리를 받아들이면 그 다음에는
기능이 나옵니다.
그것은 명료한 사고, 명료한 감정, 명료한 말, 명료한 행동을 만들지요.
진정한 자성을 증득한 후의 문제는 진리를 보는 그 마음을 어떻게
유지하는가입니다.
모든 존재들을 위해 기능할 만반의 준비가 된 마음을 어떻게 유지하는가?
여기서 문제는 "나는 무엇인가?" 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이것은 무엇인가?" 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어떻게 도와 드릴까요?" 입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실은 제 설명보다 훨씬 더 단순해요.
그러나 수행을 하지 않으면 우린 절대로 그것을 증득할 수 없지요.
그리되면 지구상에서 우리들 사이에 문제는 계속 남아있게 됩니다.
서로 다른 믿음 간에 문제가 생기고 우린 변형된 존재로 남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겪는 고통이라는 문제의 근본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로부터 비롯된 것으로써 분리되고 고립된 존재라는
자아개념에서 나오지요.
이는 우리 모두가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오늘의 도입부 강의를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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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현각스님 수행시 인터뷰, 지도법사 인가시의 법문
유전 (mindbank) | 2009.05.17 17:49
숭산스님의 외국인 제자들 중에 청안스님 법문은 내가 두어 차례 올린 적이 있었고,
현각스님은 하버드 출신으로 유명해진 탓에, 또 그다지 올릴만한 내용도 없어 그만 두었는데, 작년 겨울 동안거를 지나 올해 대중들에게 법문(한국어로)을 하면서, 완전히 바뀐 것을 보고 그야말로 밥값을 제대로 하고 나왔다는 흐뭇한 마음으로 요즘 어떻게 지내는가 찾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의 깨달음에 대한 법문이나 글은 찾을 수 없었고 꽤 오래 전에 있었던 대화록이 있어, 읽어 보니 아주 재미 있게 쓰여져 있습니다. 그야말로 재미입니다. 또 수행승들의 자세에 있어 그 마음가짐이 훌륭했다 라는 생각이 들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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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인사동에 봄비가 내리고 있다. 길은 질퍽거리고….
이런 날 이국땅을 떠도는 스님으로서 어떤 기분이 드나. (나는 무심히 궁금해서 물었는데 그는 선적(禪的)기습을 받은 걸로 오해한 것인가.)
현각스님 : 옛날엔 그런 질문이 무서웠다. 왜 사느냐, 왜 먹느냐, 왜 죽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비 오는 날엔 특히 더했다. 참선 공부가 그런 공포로부터 벗어나 진리의 세계로 '나가는 곳(exit) ' 을 알게 해줬다. 예수님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라고 말했다. 이제는 개안(開眼) 한 기분이다." (오해에서 비롯되었든 어쨌든 상대가 이렇게 나오니 내친걸음이다.)
기자 : 지금 창밖으로는 무슨 진리가 보이는가.
현각스님 : 마실 땐 마실 뿐, 들을 땐 들을 뿐, 볼 땐 볼 뿐 오직 '할 뿐 마음' 으로 진리를 찾는다. 진리는 바로 앞에 있다. 예수님도 가르쳤다. 어린 아이 같아야 하나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 미래, 과거를 생각 않는 어린 아이 같은 '할 뿐 마음' , 곧 오직 이 순간을 사는 존재의 마음이 바로 진리의 세계다. (창밖에) 아저씨들이 일(포장공사) 하는 소리 그 자체가 금강경보다 더 깊은 진리다. 비 오는 날답게 들을 뿐, 볼 뿐, 맡을 뿐이다. "
기자 : '배고프면 밥 먹고, 마려우면 변소 간다.' 는 평상심의 도는 무분별의 경지를 체득해야 할 수 있는 말인데 그런 경지를 느껴봤나.
현각스님 : (인터뷰 장소에 빗대어) 지금 그냥 차를 마시고 있다. '예' 하면 거짓말이요, '아니오.' 해도 거짓말이다. '예' 나 '아니요' 는 대답이 되지 않는다." (평상심의 실천만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공부의 정도를 논하는 것은 사실 수행자에게 결례다.)
기자 : '부처님 오셨다' 고 거리가 분주한데 부처는 왜 오는가.
현각스님 : 당신 때문에 왔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다시 오는 게 잘못됐다. 안 아프면 약이 필요 없지 않은가.
기자 : 아무도 안 아픈 그런 세상이 오겠는가.
현각스님 : 그래서 오직 공부할 뿐이다.
기자 : 하루 일과는 어떻게 보내는가.
현각스님 : 오직 공부할 뿐이다.
그는 오전 2시45분에 일어나 혼자 5백번 참배하고 3시40분에 대중스님들과 백팔배를 시작으로 6시까지 아침 예불과 참선을 한다.
낮에는 은사인 화계사 조실 숭산 스님의 책 편집, 경전 번역, 한국말 공부, 등산 등을 하며, 저녁 예불과 참선을 마치고 오후 9시30분 잠자리에 든다.
기자 : 안거(스님들이 여름. 겨울철 90일간 선방에 틀어박혀 화두를 붙잡고 정진하는 수업. 이 안거의 질과 양이 그 스님의 공부역량을 가늠하는 방편이 되기도 한다) 는 몇 차례를 했는가.
현각스님 : 모두 열두 번 했다. 그 중에는 미국의 선 센터인 홍법원에서 세 차례 한 것도 있다. 안거 중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 묵언을 지켰다."
기자 : 붙들고 있는 화두는 무엇인가.
현각스님 : '내가 무엇인가' '이게 도대체 뭔가(이 뭐꼬) ' 이다.
기자 : 그래 스님 스스로는 자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고개를 숙이고 취재수첩에 열심히 끼적거리고 있는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쳐다보니 파란 눈이 나를 응시하고 있다. 그리곤 한마디 툭 던졌다.
현각스님 : 이 얼굴이 대답이다. (조금 후에 ) 그냥 앉고, 차를 마시고,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로마병사가 예수님에게 '너 누구냐' 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병사를 쳐다봤다. 말로 하면 그 존재를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기자 : 유학승이 뭔가 깨친 것처럼 자꾸 말하니까 선적(禪的) 즐거움이 그럴 듯하다.
현각스님 : 앉고, 차를 마시고, 얘기하고 있다. (다시 조금 후에) 말 없는 그 가르침이 얼마나 기쁜지 아직도 사람들은 모른다. 말 없는 대답이 폭발적인 설명이다.
기자 : 예수를 자주 거론하는데, 대학원에서 비교종교학을 연구한 걸로 알고 있다. 기독교와 불교를 새롭게 만나게 하는 역할도 할 수 있겠다.
현각스님 : 종교에는 우리 편, 다른 편이 원래 없다. 나는 예수님의 뜻에 오를 수 있는 방법을 불교에서 찾았다. 기독교는 교파가 수많이 갈리면서 정치적인 종교가 돼 예수님의 깊은 뜻을 잃게 됐다.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길을 보여주지 않고 '오직 믿어라' 하는 감정적인 가르침만 줘 만족을 못했다. 그러다 각자가 체험 수행에 모든 것을 거는 선불교를 알게 돼 눈이 다시 떠졌다.
기자 : 그 체험이라는 게 엄청난 고행을 수반한다. 나중에 부처와 내가 따로 없는 경지, 곧 부처를 만나면 부처도 죽일 수 있는 힘을 얻을 자신이 있는가.
현각스님 : 앉고, 차를 마시고, 대화하고 있을 뿐이다.
기자 : 세상은 고해인가 불국토인가.
현각스님 : 지금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기자 : 고해 아닌가.
현각스님 : 집착하는 마음 때문에 그렇다. 기독교의 원죄 의식이 불교에는 없다. 본 성체는 순수하다. 생각에 집착하니까 고해다.
기자 : 스님들이야 머리 깎고 산에 들어가 버리면 그뿐이지만 속인들이야 그리 쉽게 생각을 놓을 수 있는가. 스님들을 보면 속인들의 약을 올리는 것 같다.
현각스님 : 올바른 공부를 하면 집착을 놓을 수 있다. 올바른 정치를 하면 나라를 제도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를 지옥에 보내게 된다.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아야 한다. 그러면 속인과 스님이 따로 없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고, 벗은 사람에게 옷을 주는 마음이 공부다. 그런데 지름길로 가고 싶으면 머리를 깎아야 한다. 예수님도 '진리를 알고 싶으면 여러 가지를 놓아버리고 나를 따르라' 고 가르쳤다.
그는 공부를 북한산 등산 코스로 비유했다. 어느 길로 오르든 맨 꼭대기는 같고 거기서 보이는 사방의 전망도 같다고 했다. 북한산 꼭대기론은 그가 생각한 것과 같은 의미로 내가 가끔 써먹는 레퍼토리 중 하나다. 묘한 인연이라고 했더니 그는 "우리 마음이 같은 모양" 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러나 말로만 그러면 도움이 안 된다" 고 덧붙였다. 뜨끔하다.
기자 : 선불교는 중국에서 나왔으나 한국에서 공부가 가장 활발하다.
그런 한국스님들이 지난 번 조계종 사태 때 액션 스펙터클을 보여줬는데 감상이 어땠는가.
현각스님 : 한국사회는 갑자기 변했고 지금도 변하고 있다. 종교계의 싸움도 국회에서의 싸움이나 경제계의 다툼처럼 사회적 변화에 따라 일시적으로 금이 간 것이라고 본다.
기자 : 크게 실망하지 않았나 싶어서 물었다.
현각스님 : 좋게 바뀌고 있지 않나. 물론 안 싸우면 좋겠다. 남에 대해 뭐라고 할 수는 없고 나는 구름처럼, 물처럼 운수납자의 길을 걸어 갈 것이다.
기자 : 한국스님들 중엔 공부를 잘 안하는 스님들도 있다. 겪어보니 어떻던가.
현각스님 : 다른 사회와 마찬가지로 스님사회에도 공부를 하는 스님과 안하는 스님의 스펙트럼이 있다. 그런데 도시(서울 수유리 화계사) 에 있을 땐 잘 몰랐는데 산에 가서 보고 깜짝 놀랐다. 묵언,불식,장좌불와 하는 분들이 많았다."
기자 : 공부를 안 하는 스님에게 한마디 해주겠나.
현각스님 : 스님,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는 한국 스님사회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자신의 입장을 고려했겠지만 사실 스님들 공부는 제 혼자 하는 것이다. 쌀만 축낸다는 손가락질을 받든, 해탈을 하든 말든 모든 게 제 행위의 결과일 뿐이다.
기자 : 학교 공부를 많이 했던데 선수행과 병행해 불교학 쪽에도 관심을 기울이면 괜찮지 않을까 싶다. 서양에 포교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고.
현각스님 : 나는 선에 전념하겠다. 하버드 신학대학원에서는 학자들이 죽도록 연구만 하는데 대부분 '죽은 말' 이다. 사구활구(死句活句) 로 표현하면 테레사 수녀가 활구다. 물론 학문연구는 대단히 중요하다. 포교는 지금의 나의 문제는 아니다.
기자 : 화두 말고 마음에 새겨둔 경구 같은 건 있나.
현각스님 : '오직 모를 뿐' 이라는 말이다. 이 말이 어떤 존재든 가장 깊이 있게 이해하는 길로 생각된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 고 하도 그러니까 제자가 '선생님은 자신을 아느냐' 고 되물었다. 소크라테스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가 모른다는 걸 잘 안다' 고 말했다. 농부들 웃음을 서울대나 하버드대 교수들은 모른다. 모르는 마음 자체가 '참 나' 다.
기자 : 타고난 백운(白雲:이판승을 백운, 사판승을 청산 靑山)이라고 한다)이다. 나중에 어느 산사의 주지 자리를 맡기면 어쩔 텐가.
현각스님 : 그런 걸 맡기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도망갈 것이다.
기자 : 70, 80세쯤에 고승이 됐다고 치고, 그 때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은가.
현각스님 : 그 때가 되면 와서 물어봐라.
기자 : 날이 더우면 소매를 슬쩍 걷듯 파적의 평심이 필요하다. 취미는 뭔가.
노래방엔 가봤나.
현각스님 : 오로지 보살행, 오직 공부할 뿐이다. 소변보면서도 공부한다. "
독자들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쓰는데 그는 이 말을 정색하고 하지 않고 웃으면서 했다. 수행하는 자의 진정성을 나타내기 위해 반농(半弄) 을 한 것이다.
기자 : 너무 그러지 말고. 스님도 인간이고 아직 젊은 축인데. 노래도 안 듣나.
현각스님 : 화계사에 있을 때 베토벤이나 구스타브 말러를 좋아해 그들의 곡을 크게 틀어 놓고 들었다. 로큰롤도 들었다. 바깥에서 스님들이 큰 소리로 '미국스님, 왜 그러십니까.' 그러면 '그냥 공부하고 있습니다.' 하고 같이 소리치기도 했다. 요즘은 그러지 않는다. "
기자 : 아무쪼록 큰스님이 되길 바란다.
스님을 이렇게 신문에 불러내는 것도 공부에 방해가 되는 줄 안다. 화끈하게 한 5년쯤 묵언도 하고 그 이상의 공부도 해 어느 날 선시가 펑펑 터져 나오기를 바라겠다.
현각스님 : 그렇게 깊이 있게 가겠다. 이미(서울 화계사에서 계룡산 무상사로) 도시에서는 도망쳤다. 이 순간의 할 일을 잘 하다보면 언젠가 나는 사라질 것이다."
그는 기자에게 '김치찌개는 입에 맞더냐' '미국의 가족들이 보고 싶지 않나' 하는 낮은 질문을 하지 않아 'deep level' 에서 얘기가 돼 고맙다고 했다.
그러나 기사를 정리하고 읽어 보니 그는 아직 공부 중인 스님이고 기자는 공부가 안된 사람이라 '깊은 수준' 의 근처에도 못 갔다. 오직 미안할 뿐이다.
[중앙일보 2000-05-14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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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각 스님 인가(지도법사) 법문
2001년 8월5일
쿵!
이것이 하나 입니까 둘입니까?
쿵!
하나도 아니요 둘도 아닙니다.
쿵!
단지 법상을 치는 것 뿐 입니다. 입을 열어 말을 하면 이미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그렇다면 법상을 치는 이점이 하나도 아니요 둘도 아니며, 어떤 말로도 표현 할 수 없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설명 할 수 있으며, 이것을 무엇이라고 이름 할 수도 없는데 무슨 방법으로 모든 중생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할!
(유전 중간 해석)
불립문자: 진리는 말이나 글로 세울 수 없다. 말이나 글로 표현하면 이미 진리가 아닌 거짓이 됨.
도가도 비상도 : 도를 도라고 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
유전: 그러나 중생이나 인간 대부분은 표현이라는 방편을 대중적으로 사용하고 있음. 눈높이로 설명하는 것은 거짓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그들의 근기에 따라 계속되는 배우고(學) 경험해야(習 익힐 습) 하는 과정을 모두 거쳐서 말이나 글이 필요 없어지기 전까지의 방편입니다.(2010/01/08)
(유전 중간 해석 끝)
2001년 8월 5일, 오늘 인가식에 참선 수행하시는 분들이 많이 오셨습니다.
사실상, 제 법문은 이것으로 다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참석하신 분들 중에는 이러한 선 법문을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도 계시리라 생각하여 몇 마디 더 하겠습니다.
요즈음, 저에게 새로운 스승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소개 해 드릴까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아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저의 왼쪽 어깨가 바로 훌륭한 저의 새로운 스승입니다. 몇 주전, 여름 결제 때 현정사 법당에서 저와 몇 분의 스님이 화두 참구를 하며 참선 용맹정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마철인 어느 날 밤에 저는 일이 생겨 잠깐 법당을 나와야 했습니다.
비는 오고 달도 없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에 법당에서 급히 나와 미끄러운 고무신을 신고 돌아서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아 계단을 더듬어 내리다 헛디디어 갑자기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비가 와서 미끄러운 계단 아래로 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계단이 높지는 않지만, 법당입구 계단에 자그맣게 문을 하나 만들어 놓았는데,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 떨어지면서 바로 그 문에 왼쪽 팔이 걸려 제대로 떨어지질 못하고 결국 왼쪽 어깨에 힘을 다 주어 바닥에 곧 바로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저는 비명을 질렀고 그 소리에 법당에서 스님들이 나오시고, 보살님들이 공양간에서, 그리고 절에서 일하는 처사님들이 방에서 텔레비젼을 보다가 그곳으로 올라 왔습니다. 몇 분 동안 그곳에 그렇게 누운 채 땅을 두들기며 이를 악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부축을 받아 몸을 털고 방으로 옮겨졌습니다.
두세 시간이 지나서, 제 팔이 완전히 탈구되어서 팔과 어깨를 연결하는 중요한 뼈가 어스러져 조각 조각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병원으로 옮겨져 금속선과 핀으로 부서진 뼈를 연결하고 맞추어야 하는 여러 시간에걸친 대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제까지 한번도 이러한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뼈가 부서진 일도 없었습니다.
몇 주를 거듭하여 참선 용맹 정진을 하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노력에 노력을 하고, 또한 선방의 모든 청규를 지키고, 환경과 사물을 법에 따라 정리함으로써 나타나는 그 경계에 아주 순수하고 분명하게 들어 간 순간 이 경계는 저에게 매우 중요한 무엇인가를 다시 가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이 경계와 내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여러 가지 면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일에는 그러한 면이 분명히 있었던 것입니다.
말할 수 없이 아픈 고통을 경험하며 흥미 있었던 것은 5분 여 동안 그와 같은 극도의 고통을 경험하고 그 고통으로 인해 말할 수 없이 힘겨워 하고 난 뒤 저는 마음이 아주 고요해 졌다는 것입니다. 문득, 내면에서 무엇인가를 깨달았고 모든 것이 환희스러운 경험이 되었습니다.
보살님들과 절에서 일하시는 처사님들 그리고 절에 와있던 사람들이 제 주위에 둘러서서 자신의 두 손을 꽉 잡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어떤 분은 튀어나온 제 팔을 보고 돌아서 멀리 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마음이 고요해져 가만히 있었습니다. 팔에서 오는 고통은 말할 나위 없이 커서 마치 몸의 반이 찢겨져 나간 것 같았고, 저의 팔이 그렇게 탈구되었다는 것이 전혀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실제로 팔은 몸에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처음 그 일이 있은 후 마음의 안정을 찾아, 이 일이 있기 이전에 저는 정진하고 있었고, 이 일이 생기기까지가 참선과 계속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로 생각이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고요하고 완벽한 경험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주위를 서성거리며 제가 처한 상황에 대해 아주 난감해 하고 힘겨워 하는 것 같아 그때 제가 " 모두들 그렇게 걱정하지 마세요" 라고 한 것 같습니다.
그들이 저보다 더 힘겨워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 모든 상황이 신기했고, 또 아주 관심있게 지켜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비록 고통은 극도에 달해 있어도 그것은 그저 고통일 뿐이었습니다. "고통"이라든가, 매우 불쾌하다거나, 방해가 되고, 나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은 단지 고통일 뿐이었습니다. 매사는 매우 단순하고 분명하며, 또한 고통에는 내면도, 외면도 없습니다.
그 고통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완벽한 경험이었습니다. 고통은 있었지만 그저 고통일 뿐이었습니다. 이 고통으로 인해서 움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이 고통으로 인해 문제된 것 또한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시 아픔으로 죄어드는 순간이 있었지만 이내 사람들에게 농담을 건네거나, 일상적인 이야기를 한다거나, 심지어는 현정사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흉내까지 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두 눈을 감고 염불을 외우며 실제로 편안함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기분 좋은 자유스러움이었습니다. 관행스님이 "왜 그렇게 웃으십니까?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십니까?" 하며 되물었습니다.
얼마 후, 사람들이 한 농부를 불렀습니다. 이 사람은, 소가 너무 딱딱하거나 너무 약한 땅을 밟아 충격으로 엉덩이가 탈골되었을 때, 그리고 소의 관절이 빠졌을 때 그 뼈를 접골하는 사람으로 산중에서 이러한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제 팔을 한눈에 보더니 상태가 너무 심하여 그 조차도 어쩔 도리가 없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계속 사람들과 농담을 하며 웃고 있었습니다. 그가 저를 부축하여 눕혀주시는 보살님께 "이 양반이 지금 어떻게 웃고 있습니까?"라고 하며 돌아갔습니다. 모두 그 자리에서 보셨어야하는데.
이러한 경험 속에는 저의 얼굴의 또다른 얼굴 즉, 진정한 스승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경험이 바로 우리의 진정한 스승인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숭산스님께서는 우리가 그러한 경험을 향하여 가도록 방향을 제시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숭산 큰스님께서 항상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경험인 것입니다. 모든 주장자나, 경전, 증명서와 법복 그리고 공안공부나 법문, 형식 이 모든 것이 스님께서, 근본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움직일 수도 없는 진정한 자성을 경험할 수 있도록 아집으로 가득 찬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고자 쓰시는 방편일 뿐입니다.
그러한 통찰력을 가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조건을 만들고 제어 할 수 있으면, 참선을 하면서 그 진정한 자성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혼잡하고 복잡한 일상 생활 속에서 빛을 발하는 참 스승의 얼굴을 본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숭산 큰스님께서는 중생들이 마음을 열어, 한 치도 되지 않는 곳에 있는 이러한 경험으로근본적으로 가까이 다가 갈 수 있도록 지난 55년간 혼혈의 힘을 기울여 오셨습니다. 그래서 형식과 경전과 공안과 그리고 호된 호통을 치셨지만 우리는 여전히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가르침이 숭산스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움직이지 않는 그 마음이 바로 이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스승이요, 우리가 예경하는 대상이며, 지금까지 항상 숭산스님께서 엄격하게 이끌어 오신 바로 그곳입니다. 또한 숭산스님께서는 한 길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어떤 방편을 쓰시고는 바로 다음주에는, 지난번에 가르쳐 주셨던 길과 정 반대방향으로 가시어 다른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스님께서 쓰시는 수 없는 방편에 집착하면 가차없이 호통을 치시어 곧 바로 근본적인 것으로 돌아가도록 하십니다.
그러한 방편으로 이끌어 오신데 대해 제가 숭산스님께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하는지를 말씀드릴 일화가 있습니다. 몇 년 전, 저는 고봉스님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한 것 을 영어로 번역했습니다. 친분이 있는 한국인 몇 분의 도움을 받으며 한 달이 넘게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부터 밤까지 번역을 하면서, 동시에 화계사에서 '선의 나침반' 편집에도 몰두 하고있었습니다.
그 때 선의 나침반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여쭈어 보기 위해 숭산스님을 뵐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선의 나침반에 대해 여쭙고 나서 가지고 갔던 고봉스님의 원고를 보여드렸는데, 겨우 노트 몇 쪽에 이야기를 다 썼을 정도로 원고분량이 매우 적었습니다. 스님께서 이 원고를 살펴보시더니 "양이 너무 작아, 너무 작아, 이것으로는 출판 할 수 없어, 내용이 더 많아야겠어."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많은 것과 방대한 것을 좋아하시기 때문에 이러한 말씀은 예상했던 바였습니다.
" 저, 스님 이게 전부입니다. 이 이야기가 전부이고 더 이상 번역할 내용이 없습니다."라고 제가 말씀드렸더니, 스님께서는 어깨너머로 방 뒤쪽을 가리키시며 " 뒷방에 있는 비구니 노스님이 고봉스님이야기를 잘 알아, 고봉스님을 오랫동안 모셨기 때문에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어, 그러니 그 스님께 물어봐, 그 스님이 말해주는 내용을 이 책에다 많이 실어서 출판하도록 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저는 그 비구니 스님께 부탁을 드리기로 하였고 무심스님께서 통역을 해주시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스님을 무심스님 방으로 모셔 왔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스님은 아주 기품이 있으신 분입니다. 빳빳이 풀먹여 다린 승복에 실크 스카프를 하시고, 한번 감아 맨 스카프 중앙에 진주 핀을 꽂을 정도로 우아하시고, 또한 굉장한 미모와 품위를 갖추신 아주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스님, 저희들은 스님의 스승이신 고봉스님의 책을 번역하여 전세계에 보내려 하는데 내용이 너무 부족합니다. 큰스님께서는, 스님께서 고봉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알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스님께서 저에게 말씀해 주시면 책에 그 내용을 넣겠습니다. 그렇게되면, 이 책은 전세계에 퍼져 고봉스님의 가르침을 많은 사람들이 읽게 되고 결국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스님께서 알고 계시는 고봉스님의 이야기나, 고봉스님으로부터 직접 들으신 내용이 있으면 저희들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 이야기를 아시는 분은 스님밖에 안 계십니다. 스님, 부탁드립니다." 라고 저는 말씀드렸습니다.
그 스님은 그 자리에 앉으신 채, 마치 우리가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저는 혹시 우리가 이 스님을 이해시켜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 스님은 귀가 어두워 잘 알아듣지를 못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한번 간곡하게 말씀드리고 무심스님께서 그것을 통역해 주셨습니다. "저희는 이 책을 전세계에 보내려 합니다. 숭산 큰스님의 가르침은 전세계에 퍼졌지만, 고봉스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저희들이 아는바가 그다지 없습니다. 이 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수행하는데 자극이 될 것입니다. 고봉스님께서는 입적하시고 안 계시지만 저희는 이 책으로 세상을 구할 수가 있습니다.
얼마 후, 마침내 스님은 "모두 잊었어, 모두, 나는 아무 것도 몰라. 그런 하찮은 이야기는 하나도 기억이 안나, 하나도." 라고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그래 좋아. 이 스님을 어렵게 방으로 한번 모셔 왔으니, 한번 더 말씀드려보자.'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번 스님께 부탁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무심스님은 스님 나름대로 간곡하게 말씀을 드리고, 저도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스님은 품위 있게 침묵을 지키시며 그 자리에 그렇게 앉아 계실 뿐이었습니다.
그러시더니 스님은 폭발하셨습니다.
마치 우아하고 자그마한 화산처럼, 스님은 폭발하셨습니다. " 내 스승은 아무 것도 말씀하시지 않았어!" 라고 하시더니 숭산스님께서 처음 출가 하셨을 때 받으신 법명을 언급하시며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 행원스님은 항상 뭔가를 만들어! 행원스님은 언제나 절을 짓고 탑을 만들고, 책을 만들고, 제자를 기르고, 선방을 만들고,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며 항상 뭔가를 만들어!! 그러나 내 스승 고봉스님께서는 아무 것도 만들지도 않았고, '말씀' 조차도 전혀 하신 적이 없어"라고 하시며 멈추려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고봉스님은 아무 것도 말씀하신 적이 없는데, 행원스님은 항상 이것저것 만들고, 뭔가를 만들고 있어. 내 스승은 아무 것도 만든 적이 없었어." 그러시더니 스님께서는 그곳에 앉으셔서, 고봉스님의 엄격한 생전의 모습을 회상하신 듯 마침내 빙그레 미소 지으셨습니다. 그때 우리가 스님의 머리에 설사 총을 겨누었다 하여도 그 스님은 미동조차도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이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분명하게 보이는 어떠한 벽도 없습니다. 스승은 어떤 확실한 방식으로 가르쳤지만, 표면상으로 보기에 그 제자는 그 방법이나 형식을 그다지 따른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이 스님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숭산 큰 스님에 대한 저의 사랑과 존경심은 훨씬 더 커졌습니다.
제가 본바에 의하면, 이 노비구니 스님은 숭산스님이 그러하시듯, 고봉스님의 합법적인 한 제자일 뿐이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이나 스타일에 대해서 분명하게 기억하시고, 분명하게 생각하고 계시며,그리고 스승이 기대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이렇게 우아하고 품위있게 위엄을 갖추고, 조용하고 엄격하며 깊은 통찰력을 가진 스승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봉스님께서 진정으로 법을 전수하여 주셨던 유일한 제자, 그 제자는 아주 활동적이고 아주 활기찬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스승이신 숭산 큰스님의 용기는 실로 대단하시고, 완전히 성취하신 분입니다. 그 스승과 아주 다르지만 마음은 완전히 같으신 분입니다. 마음은 같지만 행동은 다르게 하시고, 행동은 다르지만 마음은 같습니다. 이 것이 바로 우리에게 매우 교훈이 되는 점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용기를 보여 주시는 것이고, 또한 스승으로부터 받으신 모든 것을 완벽하게 소화해 내셨음을 가르치고 계심입니다.
그 가르침 자체가 분명하게 나타나도록, 활동적이고 교육적이며 자유 자재하신 스님의 타고나신 숙업에 따라, 그와 같은 용기를 대담하게 보여주시고 또 스님 스스로를 진실로 믿는 것은, 스승이신 고봉스님과는 달랐습니다.
숭산큰스님의 전체 법맥을 살펴보면, 이러한 특성과 관련된 점이 있습니다.
고봉스님은 그 스승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스승이신 만공스님은 화살같이 곧으시고, 조직적이시며, 승가 사회에 관심이 많으셨던 분입니다. 그래서 수덕사가 한국 불교를 보존하고, 비구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만공스님의 승가 내에 미치는 힘으로, 조직과 제도를 통해 비구 전통을 보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봉스님은 스님들에게 전혀 개의치 않았을 뿐 만 아니라, 좋아하지도 않았습니다.
만공스님 또한 스승이신, 어느 것에도 걸림이 없으셨던 경허스님과 같지 않으셨습니다. 스타일이 달랐고, 행동규율이 달랐으며, 모든 면에서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부처님에게로 향하는 그 마음은 모든 분이 다 일치했습니다.
어느 한 분도 스승을 완전히 닮으신 분은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점은 어느 한분도 스승이 하셨던 것을 똑같이 하도록, 또는 스승의 법에 미치지 못하고 있어서 그렇게 되도록, 정확하게 또는 완전하게 그리고 미미하게라도 스승을 닮아야 한다고 강요받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스승을 따르지 말고, 그 가르침을 성취하라. 스승에 집착하지 말고, 그 가르침과 하나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숭산스님께서는 항상, 국적과 언어에 상관없이 성취할 수 있는, 우리의 참 본성인 바로 모르는 이점으로 향하도록 이끌어 오셨고, 또 그렇게 하시기 위해 지금까지 여러 가지 다른 방편을 펴시어 가르침을 주시고 더불어 여러 가지 관념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 자체가 '참 본성인 모르는 점'이 아니요, 그 가르침 자체가 그러한 것도 아니며, 단지 "그 점"으로 향하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점을 가리키는 스승에 집착하면 참 본성인 모르는 마음을 절대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일상생활 속 어떤 지점에서 그것이 우리를 칠 것입니다.
이 지도법사 인가식을 위해서, 아주 단 시간에 할 수도 있는 것을 저는 여러 법사님들과 다른 스타일로 인터뷰를 많이 했습니다.
이 인터뷰에서는, 때로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법사님들께 다른 스타일과 다른 방법으로 하는 것을, 아주 간단 명료하게 대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숭산스님께서도 때에 따라서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한 방법을 몇 년 후에는 다른 방법으로 가르치십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일이고, 비밀스러운 사실도 아닙니다. 또한 이러한 것은 우리 모두가 지금까지 경험해 왔고, 힘써 노력해야 할 중요한 일입니다.
제가 처음 큰스님과 이와 같은 인터뷰를 시작했을 때 굉장히 고심하며 노력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면에서 제 마음은 여전히 너무 활동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숭산스님에 대해 정말 재미있는 점은 스님께서는 저의 활동적인 마음을 없애기 위해 어떠한 방편도 가리지 않고 쓰셨다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건데, 형식이나, 취향에 맞고 안 맞는 일, 싫고 좋은 그러한 경계에 들어가지 말고 숭산스님께서 모든 방편을 자유 자재로 쓰시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근본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면 큰스님께서도 스님의 스승이 그러셨듯이, 미래에 어떠한 것에도 걸림 없는 자재 하신 마음으로 열반에 드실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바로 우리 모두가 가져야할 마음입니다.
참구하는 그 정신, 진실로 내면을 들여다보
(글이 길어서 끝 부분이 조금 잘렸네) 댓글로 추가 함// 참구하는 그 정신, 진실로 내면을 들여다보는 바로 그 진정한 정신을 지키십시오. 그러나 실제로 그 가르침을 공부하고 있고, 행하고 있고, 경험하고 있다는 어떤 의식을 주는 확신감, 이런 형식적인 확신감은 필요치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제가 여러분 모두에게 말씀드려 용기를 불어넣어 드리고자 하는 점입니다. 분명하게 눈에 보이는 법회나 경전이나 공안 등과 같은 방편에 집착하기보다는 그 가르침이 가리키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기억하십시오. 만약 그 가르침이 근본적인 것으로 향해 있지 않으면, 가차없이 버려야 합니다. 숭산스님께서 항상 설하시듯, 근본적인 그곳으로 돌아가도록, 참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모든 중생을 도우십시오.
오늘 저는 여러 스승에 대해서, 좋은 스승, 나쁜 스승, 이런 스승, 저런 스승, 그리고 스승이 없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한가지 질문을 드리고 제 법문을 마칠까 합니다. 어떻게 진정한 스승을 찾으시겠습니까? 좋은 스승, 나쁜 스승, 믿을 수 있는 스승, 믿을 수 없는 스승, 한국인 스승, 폴란드인 스승, 미국인 스승, 유태인 스승, 아일랜드 카톨릭 스승 이렇게 수많은 스승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지금 어떻게 그 진정한 스승을 찾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진정한 스승을 찾아 고통에서 모든 중생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할! 오늘 해제 이튿날 많은 불보살님들께서 함께 모여 말씀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숭산 선사님. 스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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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인지 철학인지 넘나 철학적인것 같긴한데 잘봤구요 환기되는 기분이다
졸라 긴데 어렵지만 잘읽었음 개추 - dc 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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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좋은하루 되세요
길긴길다 ㅋㅋ 2개까지읽고 내렸음.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