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재학교와 과학고 학생들이 이공계특성화대학을 외면하고 종합대학으로 몰리는 이유는 더 이상 돌려 말할 필요도 없이 답은 하나다.
의대 대문 때문이다. 그럴듯하게 포장된 진로 탐색, 학문적 다양성, 지리적 이슈와 같은 말들은 사실상 전부 변명에 불과하고,
현실에서는 의대로 도망칠 수 있느냐 없느냐 이 한 줄로 모든 선택이 갈린다.
이공계특성화대학은 구조적으로 반수나 휴학시 장학금제한,재수강시 학점상한선 제한 등 불이익을 주며 의대 진학을 위한 수능준비를 어렵게 막아놓은 곳이고,
종합대학은 언제든 수능을 다시 보든 반수를 하든 논술을 보든 의약계열로 갈 수 있는 탈출구를 열어놓은 곳이다.
영과고생 입장에서 이공계특성화대학은 한 번 들어가면 의대라는 선택지를 스스로 불태워버리는 장소이고, 종합대학은 안전장치가 달린 중간 기착지다.
이게 현실인데 아직도 왜 이공계특성화대학에 안 가냐 고 묻는 건 상황 인식 자체가 안 돼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흔히 나오는 말이 있다. 국비 지원 받은 거면 돈 토해내고 의대 가면 되는 거 아니냐는 주장이다.
이 말이 왜 틀렸는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기회다.
영재학교와 과학고는 정원이 극히 제한돼 있고, 국가 세금으로 운영되며, 이공계 인재를 길러내겠다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설계된 교육기관이다.
그 자리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다른 학생이 이공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기회를 하나 통째로 가져가는 행위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최고 수준의 교육과 인프라를 제공받고, 연구 경험과 심화 교육까지 다 누린 뒤 의대로 진학하고 돈 토해 냈으니까 괜찮지? 하고 의대로 가버리는 건,
이미 시스템을 한 번 붕괴시킨 뒤에 뒤늦게 통행료 내고 빠져나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해 이공계로 성장하지 못한 학생이 원했던 간절한 기회는 돈으로 환불되지 않는다.
그래서 장학금을 토해냈다고 해서 정당성을 인정받거나 면제부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이 나오는 거다.
이건 도덕의 문제이며 구조적인 불공정의 문제다.
지리적 이슈로 의대가 아닌 서울대 등 종합대학으로 간 영과고생들이 실제로 무엇을 겪는지도 직시해야 한다.
이들은 대학 1, 2학년 동안 고등학교에서 이미 끝낸 내용을 다시 배운다.
미적분, 선형대수, 물리학 기초, 화학 기초를 다시 듣는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반복해서 배우는 과정에서 학문에 대한 몰입과 긴장감이 유지될 리 없다.
전공이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이미 한 번 통과한 구간을 다시 걷고 있기 때문에 열정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게 흘려보낸 2년은 개인에게도 낭비이고, 국가에게는 더 큰 낭비다.
국비를 들여 조기 심화 교육을 시켜놓고, 정작 대학에서는 그 효과를 전혀 살리지 못하는 구조가 되는 셈이다.
그 결과 남는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차라리 의대 갈까? 이 생각이다.
그래서 영과고생의 종합대학 진학은 지리적 선호도 있을수 있지만 애초부터 순수한 학문 선택이라기보다 의대 진입을 위한 대기실에 가깝다.
이공계특성화대학에 합격해놓고 반수나 재수를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공이 안 맞아서라는 말로 포장하지만, 현실은 두 가지뿐이다.
의약계열로 가기 위한 것이거나, 서울의 종합대학으로 옮기기 위한 것이다.
특히 서울에 있는 종합대학의 의대, 그리고 전국 종합대학의 의약계열이 목표인 경우가 압도적이다. 이공계특성화대학은 연구 중심으로 설계돼 있고, 의대 진학을 제도적으로 차단해 놓았기 때문에, 의대를 염두에 둔 학생에게는 애초에 오래 머물 공간이 아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이공계특성화대학 신입생 중 영재학교·과고 출신 비율은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의대라는 출구를 막아놓은 구조가 유지되는 한,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종합대학으로 이동할 것이다.
이 모든 흐름을 종합하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단순한 진학 트렌드가 아니라 국가 예산 낭비이자 이공계 인력의 구조적 유출이다.
영재학교와 과학고에 투입되는 예산은 이공계 연구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장기 투자다. 그런데 그 결과물이 대거 의약계열로 빠져나가고 있다면,
그건 투자 실패를 넘어 정책 실패다. 이공계 인재 풀이 붕괴되면 연구 경쟁력이 약화되고, 기술 자립이 흔들리며, 산업 기반이 약해진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국가 경쟁력은 필연적으로 하락한다. 그래서 이공계 처우 개선 문제는 단순히 이공계도 잘해주자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국가의 존망과 직결된 시급한 문제다. 연구를 선택한 사람이 의대에 간 사람보다 더 가난해지고, 더 불안정해지고, 더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누가 이공계를 선택하겠는가.
지금의 구조를 방치하는 것은 영과고생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이공계 붕괴를 묵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영재학교와 과학고를 아무리 유지해도 그 끝은 계속 의대로 향할 것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가 전체가 떠안게 될 것이다.
의대가 우수 인재를 선점하려는 단기적 욕심으로 영과고 출신을 무비판적으로 흡수하는 순간, 이공계 인재 풀은 계속 말라가고 국가는 장기적으로 경쟁력을 상실한다.
영과고생이 수시로 의대지원시 불이익도 더 크게 만들고 수능으로 지원시에도 졸업후 몇년간은 감점을 유지해야 된다.
수능이라는 공정한 시험을 봤으니 모두 같은 출발선이라는 주장도 현실을 외면한 말이다.
출발선 이전에 이미 막대한 국가 지원과 교육 자원을 선점한 집단이 있기 때문이다.
그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 선발은 공정이 아니라 국가적인 방임이다.
영과고 졸업 후 일정 기간 내 의대 진학에 제도적 불이익을 주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조치가 아니라, 국가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이며, 이공계 인재 유출을 방치할 경우 국가의 존망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논의되고 실행되어야 할 사안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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