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에서 시작하는 개업 세무사의 생활 #8 - 전문직 갤러리 (dcinside.com)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제품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소득세 업무가 막바지에 이른 5월의 끝자락
다른 사무실은 연일 야근의 연속, 심지어 새벽까지도 불이 밝혀져 있는 사무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내 사무실은 6시 정시퇴근이 가능했다.
가끔
-5월엔 세무사들 바쁘다고 하는데... 너는 안 바쁘니?
하며 걱정하시는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라
저렴한 산업용 전기를 축내며 유튜브로 8시까지 때우다가 사무실에 들어가곤 한다.
개업 반년까지는
'준비되어 있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 라는 마음으로 업종별 세무실무를 했지만
1년이 조금 지난 지금. 그런 열정은 사라졌다.
계기는 뭐였을까...
아, 병원과 약국이었다.
기장을 맡길 세무사를 찾고 있다는 피부과 개원예정인 의느님의 전화에
[눈물의 똥꼬쇼!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싸고 친절한 서비스!]로 온갖 어필을 했다.
그러나, 문제는 나는 병의원을 해본 경험이 없다는 데에 있다.
실무서를 통해 책으로만 찾은 정보가 다였기에...
말을 하는 나와, 내가 뱉는 목소리와, 내 목소리를 듣는 내 귀가 뒤죽박죽이 되어
사실 나도 내가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아니 무슨 소리를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말이 말을 먹고, 그 말에 내가 삼켜지고...
과면세 얘기를 하고, 현금매출누락 같은 얘기를 했던가, 개중엔 분명 헛소리도 섞여있었을 것이다.
개원의나 개원예정이라면, 아니 일반인들도 알법한 상식선 수준의 이야기를 굳이, 굳이 쓸때없이 힘주어 이야기했더랬나 그랬더랬나.
그 와중에 내 몽롱한 의식 속을 깨우는 한 마디 단어가 들렸다.
-그러면, 기장을 맡기고 싶은데... 이것만 하나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기장'이라는 단어와 '맡기겠다'라는 단어가 날카롭게 귓전을 파고 들었다.
부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보증 서달라는 것은 아닐테니까.
그 누구보다도 친절한 목소리로 그러겠노라고 답변했다.
-의료기관개설신고하고 의료장비현황신고도 부탁드릴게요.
-네?
-의.료.기.관.개.설.신.고하고 의.료.장.비.현.황.신.고요
스타카토처럼 굳이 힘주어서 단어를 끊어 뱉는 의느님의 언사가 심히 불쾌했지만
중요한건
차마 '물론 해드려야죠'소리가 입에서 나오질 않았다.
'애초에 내가 해줄 수는 있는건가? 해준다고 해도 되는 건가? 아니, 애초에 우리가 해주는게 맞는 건가?'
물음표의 연속이었다.
한 3초간의 정적.
라디오에서 3초간 방송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소위 방송사고라고 하는데
지금 나도 방송사고가 실시간으로 진행 중이었고, 내 사고도 정지 중이었고. 아무튼 그랬다.
-아, 세무사님 잘 모르시는구나. 다른 세무사님들은 다 해준다는데. 피부과 쪽은 경험이 없으신가보다~
실무서에서 의료기관개설신고를 하고 보건소에 뭐 하고 뭐 어쩌고 저쩌고를 보긴 했던 것 같은데
문제는 그걸 세무사가 해준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렇다, 우리가 수험생 때 '세무사는 4대보험 업무도 해준다'라는 얘길 듣지 못한 것처럼
이것도 그런가보다. 다 해주나보다.
-...아... 저희가 그것까지 해드리긴 어렵습니다. 이게 본래ㅡ
-죄송해요. 아무래도 다른 전.문.성있는 세무사님한테 맡겨야 할 거 같아요. 수고하세요~~
뭔가 자괴감과 모멸감이 들었다.
헌터헌터에서 무슨 입단테스트 1라운드 컷 당하는 엑스트라가 된 기분이었다.
한번 재롱 좀 떨어봐~ 맘에 들면 기장 맡겨줄게~ 라고 해놓고, 그냥 떠보기만 한 것이다.
그 사건은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었고
동시에 병의원 약국업종은 내게 신포도와 같이 보였다.
저 업종은 손이 많이가
원장들이 까다로워
국장들은 짠돌이야
세금 나온다고 하소연 들어야돼
세무조사 단골 업종이라 피곤해
등등의 이유로 신포도의 산도를 한층 더 높이기 마련이었다.
그랬거나 어쨌거나, 한 번 인연이 닿지 않은 업종은 자연스레 기피하게 되었고
병의원 쪽도 공부해서 고오급 업종의 기장과 고오부가가가치 컨설팅도 해봐야지~ 라고 청사진을 그렸던 신규개업세무사의 꿈도 와장창 엔딩을 맞게 된다.
지금도 병의원은 받지 않는다.
받질 못한다.
첫째로, 신규 업종을 하나 받으면 그 거래처 하나를 위해 아예 다른 기장방식을 새로이 공부해야 한다.
문제는 이러한 특수업종은 일정 숫자 이상이 쌓이면 수익성이 좀 나아지지만
그렇지 않고 가뭄에 콩 나듯, 듬성듬성 있으면 담당자는 스트레스만 받게 된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음식점 40개 담당자보다
음식점 20개 병의원 1개 포워딩 1개 건설사 1개 구매대행 1개 수출수입업 1개를 담당자가 훨씬 업무 스트레스를 받는 다는 것이다.
두번째로, 관련 업종에 대한 인풋, 즉 경험이 없다보니 고객한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차라리 의사도 젊고, 나도 젊고, 서로 마음이 맞아 으쌰으쌰하는 느낌으로 간다면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의사들은 워낙 계산이 빠르고, 그들만의 정보 네트워크 또한 공고하고, 인맥과 소개를 통해 세무대리인을 비교하는 경우도 많기에
내가 부족한 서비스를 제공하면 원장들은 귀신같이 눈치를 챈다.
자신의 부족함으로 언제 거래처가 떠나갈 수 있다는 불안감... 그리고 자괴감을 겪기가 싫다.
물론 사람이 처음부터 전문가가 어디있을까
수험생 수습 근무세무사를 거쳐 개업세무사가 완성되고, 분명 처음 맡아보는 업종도 있고
맡아서 하다보면 전문가가 되는게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병의원은 메이저 병의원 전문 세무법인들이 삼국지마냥 치고박고 싸우고, 신규 병의원 전문 세무법인들도 그 시장을 비집고 들어가느라 혈안이다.
H사, D사, J사, N사 등등... 정보에 어두운 나조차도 어디 출신이 어딜 만들었는데 그 출신이 또 나와서 그걸 만들고 거기서 또 나온 사람이 만들고...
그런데 나는 전문성은 쥐뿔도 없는데, 덜컥 병의원을 수임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병의원 전문 세무법인의 영업으로부터 내 병의원을 지켜낼 수 있는가?
아니면 전문성 없는 나에게 병의원을 10개씩 수의계약으로 던져줄 강력한 뒷배가 있는가?
없다. 뒷배도 없고 자신도 없다. 혹여 할 수 있다고하더라도 그 몇 안되는 1개의 병의원을 위해 컨설팅폼과 프로세스와 시뮬레이션을 돌려야하는가?
아, 그냥 귀찮다.
그래. 귀찮다.
.
.
.
힘들어 죽겠다, 야근이 힘들다. 오늘도 야근하겠다. 개업하고도 이렇게 야근할 줄 몰랐다는
단톡방 개업세무사 친구들의 넋두리를 보고
이대로 괜찮은가. 라는 상념에 휩싸인다.
시계를 보니 5시
10일 정도 남았지만, 신고가 남은 거래처는 오직 3개밖에 없었다.
자료를 안줬지만 굳이 독촉하지 않는다.
슬슬 퇴근각을 잡아볼까?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다.
070 도 아니다.
지역번호다.
느낌이 안 좋다.
-네. 세무사사무실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여기는 OO세무서 조사관 ㅁㅁㅁ라고 합니다. 혹시 빠리OO 담당자님 계신가요?
-네. 제가 담당하는 거래처입니다. 어떤 건으로 연락주신지 알 수 있을까요?
-아, 18년도 제1기 부가가치세 신고 내역 건인데, 매출누락이 의심되는 부분이 있어서 사장님께 과세자료 해명안내 보내드렸는데... 연락 아직 못받으셨나요.
오늘은 나도 단톡방에 야근한다고 힘들다고 카톡을 올려야겠다.
전갤수필 ㄷㄷ
오랜만이노
고생많으십니다 건승하세요
크 올만에오셨습니다
일단 개추ㅋㅋ
잘하노 이기야
아 시발 ㅋㅋㅋㅋㅋㅋㅋ
씨발 이글 보니까 때려치고싶노
이번 시즌끝나고 개업한 셈사입니다 요즘 집에 오면 잠이 잘 안오네요ㅠㅠ
어서 희망을..!!
부럽다
반년만에 보는듯. 글 잘쓴다 진짜 ㅋㅋ
신고기간에 세무사들이 직접 수임인들 과세자료 받으려고 9급 공뭔들에게 아양 떨어가며 자료 조회 요청하던게 생각나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