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공부 잘하고싶고, 잘생기고싶고 , 돈많이 벌고싶고 사랑받고싶다.
그런데 누구나 그것을 바라지만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것을 모두 성취하며 사람마다 성취하는 정도가 다 다르다.
무엇이 그러한 삶을 가르는 것일까?
노력의 차이? 열정의 차이? 의지?
그러면 그러한 차이는 또 어디서 기인되는가?
어려서부터의 성공경험, 좋은 부모님으로부터의 교육, 훌륭한 지도과 같은 후천적 학습요인 또한 있을 것이고
또 선천적인 유전형질의 환경에 대한 유불리가 있을 것이다.
그런 차이의 기원을 찾다보면 깨닫는 것이 있다.
하나같이 나(자아)가 통제 할 수 없는 타율적인 요소다.
공부를 예로 들어보자.
A학생은 최상위권이며 대부분의 시험에서 만점을 맞는다.
B학생은 하위권이며 대부분의 시험에서 60점을 맞는다.
무엇이 두 학생간의 성적차이를 만들었는가?
두 학생 모두 만점을 맞고 싶어한다.
그런데 왜 A학생은 그 마음 곧대로 실제에서도 이루며
B학생은 실패하는가?
그것은 바램의 차이가 아닌 두 학생이 지니고 있는 실질적 능력, 환경등에서의 차이다.
A학생과 B학생과의 전체 삶을 훑어보자.
유아기때부터 부모로부터 풍족한 사랑, 그리고 뛰어난 교육을 받은 A학생은 또래집단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였고, 자연스레 그는 학습이 주는 큰 성취감과 주위로부터의 인정을 받았다.
학습의 선순환이 십수년동안 지속되어 그는 현재도 최고의 성취를 누리고 있다.
반면 B학생은 부모로부터 사랑은 받았지만, 교육은 받지 못했다. 부모님은 자식들은 알아서 큰다는 방임적 양육주의자였고 그는 자연스레 또래집단에서 평범한 학생이 되었다.
그는 학교에서 시키는 공부만을 했으며 , 공부를 함으로 얻는 성취감을 느끼기엔 많이 부족했다.
인내만을 요구하고 보상은 얻기힘든 공부에 자연스레 멀어졌고 그는 하루의 여가 대부분을 게임에 투자하게 되었다.
그렇게 게임은 그에게 달콤한 보상을 주었고, 점점 그는 게임에 중독되었다. 그러나 사회는 게임중독자를 원하지않는다. 그는 삶의 대부분을 비가치재에 투자했고 실패했다.
A와 B학생의 삶에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여기서 A와 B를 바꿔보자.
B가 A의 삶을 살았더라면 , 최상위권 B학생이였을까?
A가 B의 삶을 살았더라면, 하위권 A학생이였을까?
A와 B라는 자아는 삶을 따라갈 뿐 구분짓지 못한다.
그리고 삶은 어떤 조건을 가졌는가에 따라 구분지어진다.
그러한 조건은 자아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결국 삶의 차이는 자연으로부터 어떤 조건을 받는가에 결정되는 것이며 자아는 주어진 조건에 따라가는 존재다.
실제 인간의 활동, 즉 정신은 물리계로 환원될 수 있으며 자연의 필연성/우연성에 놓여져있다.
그렇기에 자연의 원칙을 뛰어넘는 자유의지란 존재할 수 없다.
실제 대다수의 과학자,철학자들은 자유의지를 부정하거나 자유의지를 소극적으로 정의하는 것으로 알고있다.
총균쇠에서 근대화된 유럽문명과 여전히 석기시대의 삶을 유지하고 있는 아프리카인들의 차이는 그들의 인종적 특수성에 비롯된 것이 아닌 환경적 차이로부터 발생했다고 한다.
정의론에서 존 롤스는 가진 자들은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운」좋은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부를 사회에 베풀어야 한다고 했다.
자유의지를 부정함으로써, 내가 앞서 물었던 「삶의 차이는 어디서 기인되는가?」에 확실히 대답할 수 있게되었다.
그 답은 자아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 「운」이다.
그런데 누구나 그것을 바라지만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것을 모두 성취하며 사람마다 성취하는 정도가 다 다르다.
무엇이 그러한 삶을 가르는 것일까?
노력의 차이? 열정의 차이? 의지?
그러면 그러한 차이는 또 어디서 기인되는가?
어려서부터의 성공경험, 좋은 부모님으로부터의 교육, 훌륭한 지도과 같은 후천적 학습요인 또한 있을 것이고
또 선천적인 유전형질의 환경에 대한 유불리가 있을 것이다.
그런 차이의 기원을 찾다보면 깨닫는 것이 있다.
하나같이 나(자아)가 통제 할 수 없는 타율적인 요소다.
공부를 예로 들어보자.
A학생은 최상위권이며 대부분의 시험에서 만점을 맞는다.
B학생은 하위권이며 대부분의 시험에서 60점을 맞는다.
무엇이 두 학생간의 성적차이를 만들었는가?
두 학생 모두 만점을 맞고 싶어한다.
그런데 왜 A학생은 그 마음 곧대로 실제에서도 이루며
B학생은 실패하는가?
그것은 바램의 차이가 아닌 두 학생이 지니고 있는 실질적 능력, 환경등에서의 차이다.
A학생과 B학생과의 전체 삶을 훑어보자.
유아기때부터 부모로부터 풍족한 사랑, 그리고 뛰어난 교육을 받은 A학생은 또래집단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였고, 자연스레 그는 학습이 주는 큰 성취감과 주위로부터의 인정을 받았다.
학습의 선순환이 십수년동안 지속되어 그는 현재도 최고의 성취를 누리고 있다.
반면 B학생은 부모로부터 사랑은 받았지만, 교육은 받지 못했다. 부모님은 자식들은 알아서 큰다는 방임적 양육주의자였고 그는 자연스레 또래집단에서 평범한 학생이 되었다.
그는 학교에서 시키는 공부만을 했으며 , 공부를 함으로 얻는 성취감을 느끼기엔 많이 부족했다.
인내만을 요구하고 보상은 얻기힘든 공부에 자연스레 멀어졌고 그는 하루의 여가 대부분을 게임에 투자하게 되었다.
그렇게 게임은 그에게 달콤한 보상을 주었고, 점점 그는 게임에 중독되었다. 그러나 사회는 게임중독자를 원하지않는다. 그는 삶의 대부분을 비가치재에 투자했고 실패했다.
A와 B학생의 삶에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여기서 A와 B를 바꿔보자.
B가 A의 삶을 살았더라면 , 최상위권 B학생이였을까?
A가 B의 삶을 살았더라면, 하위권 A학생이였을까?
A와 B라는 자아는 삶을 따라갈 뿐 구분짓지 못한다.
그리고 삶은 어떤 조건을 가졌는가에 따라 구분지어진다.
그러한 조건은 자아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결국 삶의 차이는 자연으로부터 어떤 조건을 받는가에 결정되는 것이며 자아는 주어진 조건에 따라가는 존재다.
실제 인간의 활동, 즉 정신은 물리계로 환원될 수 있으며 자연의 필연성/우연성에 놓여져있다.
그렇기에 자연의 원칙을 뛰어넘는 자유의지란 존재할 수 없다.
실제 대다수의 과학자,철학자들은 자유의지를 부정하거나 자유의지를 소극적으로 정의하는 것으로 알고있다.
총균쇠에서 근대화된 유럽문명과 여전히 석기시대의 삶을 유지하고 있는 아프리카인들의 차이는 그들의 인종적 특수성에 비롯된 것이 아닌 환경적 차이로부터 발생했다고 한다.
정의론에서 존 롤스는 가진 자들은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운」좋은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부를 사회에 베풀어야 한다고 했다.
자유의지를 부정함으로써, 내가 앞서 물었던 「삶의 차이는 어디서 기인되는가?」에 확실히 대답할 수 있게되었다.
그 답은 자아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 「운」이다.
운빨
주말 아침부터 현타오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