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영 암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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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암살 이전과정3. 사건 발단4. 암살 전개과정5. 암살 이후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의 귀순이후 북한이 공언해온 보복위협이 현실로 나타나면서 국민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어젯밤 일어난 귀순자 이한영씨의 권총피격 사건이 북한 보복의 신호탄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 사회의 대북 경각심이 새롭게 점검돼야 할 시점입니다.
- 사건 다음 날 김종진 KBS 뉴스 9 주말앵커의 오프닝 멘트 중에서.
1997년 2월 15일 밤 9시52분경 북한 최고위층 귀순자 이한영이 권총으로 피격당해 같은달 25일 밤 9시02분경 사망한 사건.

이한영은 임시거처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시범현대아파트 418동 1402호에 들어서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앞 14층 복도에서 북한 사회문화부 공작원들에 의해 피습을 당했다. 무기는 대남 간첩들이 주로 사용하는 벨기에제 베이비 브라우닝 권총으로, 실탄 1발이 이마에 관통하였다.



사건을 목격한 대학선배 부인은 밖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무슨일인가싶어 비디오폰으로 확인한 결과 괴한 2명이 이한영에게 권총을 겨누고 이 중 한 명이 실탄을 발사한 뒤 도망쳤다고 증언했다. 쓰러진 이씨에게 "누가 그랬느냐"고 묻자, 그는 손가락 두 개를 펴보이며 "간첩, 간첩"이라고 말한 뒤 의식을 잃었다. 분당차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졌으나 뇌사상태에서 산소호흡기에 숨을 의지하다가 10일 후 사망하였다.(KBS, MBC, 동아일보 자료 참고)



이 테러는 당시 대서특필된 황장엽 전 북한 노동장 비서의 망명으로 인한 보복 테러의 일환이었기도 하였다. 당시 수사당국은 전단지 100만장을 뿌려가며 범인을 추적했지만 검거에는 실패했다.

이는 당연히 국가안전기획부가 핵심 요인 보호를 소홀히 한 탓이다. 비록 언론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등 위험천만한 행위를 하기는 했으나 보호 책임이 있었던 국가에서 제대로 보호를 하지 못한 탓에 사망한 것.[1]
2. 암살 이전과정[편집]
1996년 10월8일. 당시 거처를 옮기고 같은해 가을부터 언론과의 접촉을 잠정 중단한 그는 돈벌이를 찾으며 오퍼상을 차려 재기를 노릴만한 새로운 사업을 구상중에있었다.


사건에 앞서 이한영은 아내에게 혹시라도 자신이 총에 맞을때를 대비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몇몇 전화번호를 적어주면서 "언제, 어디서든 뒤에서 총을 맞을지도 모른다" 며 항시 긴장을 풀지말라고 당부했고, 그는 사건발생 1년전 신변이 노출된 이후로 매우 자주 불안에 떨었다고한다.

이한영의 부탁에 의해 97년 2월말까지 약 2달간 자신의 집 방 한칸을 임시로 내어준 대학선배와 사건발생 보름전쯤인 97년 1월말쯤하여 두차례 술을 마시면서도 담담하게 "선생님. 저는 언제 총에 맞아죽을지도 몰라요." 하는 말을 하였다고한다.
자신의 신변을 걱정했다는 게 주위 인물들의 증언이다. KBS에서 함께 근무했던 한 친구는 "한영이는 평소 매우 쾌활했지만 두려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불안하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 96년 추석 때는 여행을 계획했다가 잠수함사건으로 취소하는 등 남북간에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매우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였다" 고 말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휴대전화만을 사용, 거처의 전화 사용을 삼갔다고 한다. 그를 찾는 전화가 오면 "연락만 할 수 있다, 전화가 오면 연락해주겠다" 는 식으로 응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