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글 번역
미군의 전 세계적 침략에 반대했던 램지 클라크 전 미국 법무장관이 4월 9일, 뉴욕의 자택에서 가까운 가족들에 둘러싸여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향년 93세였다.
4.27타임즈는 평화활동가 램지 클라크를 추모하며 Liberation지에 실린 그의 동료 Gloria La Riva의 추모글을 번역 게재한다.

미군의 전 세계적 침략에 반대했던 램지 클라크 전 미국 법무장관이 4월 9일, 뉴욕의 자택에서 가까운 가족들에 둘러싸여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향년 93세였다.
앨버커키에서 10대 초반을 보낸 나는 그의 이름, 그리고 그가 법무장관이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나는 그때 우리가 친구가 되고, 그와 함께 일하면서 램지 클라크가 얼마나 위대한 인도주의자였는지를 배울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미국 법무부의 차관, 그리고 이후 장관으로서 램지 클라크는 1964년과 1968년의 두 역사적인 미국 시민권법과 1965년의 투표권법 초안을 작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연방 분리 명령의 핵심 집행자였다. 앨라배마에서 미시시피까지의 인종차별 테러에 직면한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제임스 메러디스를 개인적으로 동반한 램지는 인종차별의 강력한 반대자였다. 법무부에서 그는 의회부터 FBI와 J. 에드거 후버에 이르기까지 정부 내부의 억압적인 정책에 자주 직면했다.
정부 밖에서 램지는 전쟁과 제재의 피해자들을 만나기 위해 수십 개국을 돌며 미국의 외교정책을 담당했다. 1972년 북베트남에서 미국의 폭격에 반대하던지, 1989년 미국의 침공으로 인한 실제 사상자 수를 집계하기 위해 파나마의 영안실과 엘 초릴로의 폭격당한 주민들의 시체 수를 세어보는 것이던지 간에, 램지는 미국의 침략이라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수없이 목숨을 걸었다.
그는 검열이 없는 전쟁 영상을 확보하기 위해 1991년 미국의 걸프 전쟁 당시 강력한 폭격을 맞은 이라크 전역을 2000마일이나 여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전쟁과 점령까지의 12년 동안 램지는 미국의-전쟁에서의 폭격보다 더 치명적인-이라크 전면 봉쇄에 맞서는 국제적인 캠페인을 주도했다.
모든 대륙에서 램지 클라크는 부정의와 가난으로부터 인민과 국가를 지켰다. 그는 미국의 전쟁과 제재가 인류에게 가장 큰 위협으로 존재한다고 봤다.
그는 미국의 정부와 체제를 “금권 정치”라고 표현했고 미국에서 증가하고 있던 부정의와 억압을 비난했다. 1960년대에 램지는, 오늘날 운동에서의 집회 구호가 되기 수년 전부터 “우리가 아는 미국 감옥제도의 폐지”를 요구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사형제도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램지 클라크의 인권 옹호의 특징은 인권이란 평화, 평등, 그리고 사회경제적 정의에 대한 권리를 의미한다는 그의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었다. 그는 단순한 인권옹호자 그 이상의 일을 하였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
1927년 12월 18일에 태어난 윌리엄 램지 클라크의 아버지 톰 C. 클라크는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미국 법무장관을, 1949년부터 1967년까지 대법관을 역임했다. 그의 어머니 메리는 램지, 톰 주니어, 그리고 여동생 미미를 보살폈다. 그의 형은 램지가 4살이었을 때 6살의 나이에 폐렴으로 죽었다. 램지는 그의 아버지가 1937년 워싱턴 D.C.의 법무부에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댈러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비록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13살의 나이로 해병대에 입대하려고 했지만, 그의 입대가 허락된 것은 전쟁의 마지막 해인 17살 때였다.
개인 변호사로 개업한 그는 곧 법무부에 들어가 1961년부터 1969년까지 경력을 쌓았다.
시민권의 확고한 옹호자이자 인종차별의 반대자
1961년 램지 클라크는 케네디 행정부에서 법무부 내 국토국을 맡는 법무차관보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첫 업무는 남부에서 시행되는 짐 크로법으로 인한 인종분리(아파르트헤이트)와 인종 차별주의적 폭력을 행사하는 폭도 및 주 정부로부터 시민권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는 1954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 그리고 앨라배마주를 상대로 한 브라운 vs 교육위원회 판결의 현장 집행 책임자였다. 그들은 판결 이후 8년 동안 공립학교의 인종차별 정책을 폐지하는 것을 연기하거나 거절하고 있었다. 램지는 1962년과 1963년에 직접 그곳에서 판결의 이행을 감독하기 위해 일했다.
1965년, 린든 존슨 대통령은 램지를 법무차관으로 임명했다. 흑인들이 투표권을 위해 앨라배마주의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 행진을 시작했을 때, 그들은 3월 7일과 9일 주 경찰에게 무자비하게 폭행당했고 KKK단과 백인 시민위원회의 테러에 직면했다. 3월 21일에 시작된 3번째 평화 행동을 위해 수천 명의 사람이 모였을 때, 램지는 앨라배마주 방위군의 연방 대리 하에 시위자들의 보호를 확실히 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1964년 6월, 미시시피주의 20세의 흑인인 제임스 채니와 백인 청년 앤드류 굿맨, 그리고 미이클 슈워너 등 3명의 시민권 운동가들이 미시시피주의 필라델피아에서 KKK 백색 기사단의 일원인 세실 프라이스 부보안관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더 많은 클랜 조직원을 모은 뒤 세 젊은이들을 석방했고, 풀려난 세 젊은이를 (경찰서 바깥에서)고문한 후 살해했다. 그들의 시체는 8월에 발견되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전국적 혐오에 직면했고 시민권법의 촉매제 중 하나가 되었다.
램지 클라크는 제임스, 앤드류, 마이클의 시신이 발견되었음을 전하기 위해 제임스 채니의 가족을 방문하였다. 어린 벤은 겨우 12살이었다.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램지에게 “이 모든 것을 바꾸려면 제가 대통령이 되는 게 좋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벤과 그의 가족은 죽음의 위협을 피하려고 뉴욕으로 이주했다. 17세의 나이로 흑인 해방 운동가가 된 벤 채니는 범죄에 연루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플로리다에서 3번의 종신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다. 램지는 벤과 벤이 형을 잃어버린 트라우마에 대해 절대 잊지 않았다. 그는 플로리다 가석방 위원회에 벤의 석방을 성공적으로 청원했고, 벤은 13년 만에 석방되었다. 그 후 그는 램지의 법률 사무소에서 수년간 사무원으로 일했다.
램지 클라크는 원칙주의자였으며, 반전 운동가나 반인종차별 운동가들보다 더 큰 위험은 그들이 저항하고 있는 부정의라는 의견을 고수하였다. 그는 J. 에드거 후버와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의 거듭된 요구에도 불구하고 흑인 해방운동의 리더인 스토클리 카마이클(이후 콰메 투레)의 도청 인가를 거절한 것으로 유명하다. 램지는 스토클리 카마이클을 “베트남 전쟁 중의 병역 기피 방조 및 사주” 혐의로 기소하라는 정치인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램지가 리처드 닉슨의 당선과 함께 법무장관에서 교체된 후 그는 범죄, 가난, 그리고 인종 불평등의 진짜 원인에 초점을 맞춘 “미국에서의 범죄 : 그것의 본질, 원인, 예방, 그리고 통제에 대한 관찰”이라는 독창적인 책을 썼다. 그는 극도의 인종차별주의자인 FBI 국장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후버 씨는 내가 장관이었을 때 킹 박사에 대한 FBI의 도청을 인가하는 것을 내게 거듭 요청했다. 그 요청들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킹 박사가 살해당하기 이틀 전까지도 그런 요청이 있었다.”
CBS의 유명한 기자인 마이크 월리스는 전국적인 TV 프로그램에서 J. 에드거 후버의 반대편을 위협하는 협박 전술에 대하여 폭로하면서 “후버에게 맞서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 램지 클라크뿐이었다.”라고 논평했다.
헌신적인 국제주의자
1969년 변호사로 복귀하면서, 램지는 미국 외교정책 피해자들의 주요 보호자가 되었다. 그는 팔레스타인부터 인도와 남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억압받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표현하기 위해 120개 이상의 국가를 여행했다. 그는 미국의 폭격, 제재, 그리고 점령에 대한 지속적인 반대자였고, 미국과 전 세계의 사람들을 결집시키려 하였다.
그가 용기 있는 직접 보도로 폭로한 전쟁 범죄는 종종 폭격 이전 미국의 대규모 전쟁 선전의 거짓말에 대항할 유일한 원천이 되었다. 미군의 새로운 군사적 모험을 자주 뒷받침하는 리버럴(민주당파)과 네오콘(공화당파) 기득권은 ‘펜타곤 속기사(速記士)단’(편집자주: 펜타곤의 입장을 받아쓰는 기자단)을 동원하여 종종 그를 조롱하는 비방 캠페인을 벌였다.
그러나 램지 클라크는 정치적 압력에 개의치 않고 언론과 정부의 비판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결코 단념하지도, 낙담하지도 않았다. 이는 1972년 그가 북베트남을 방문했을 때도 그랬다.
1972년 인도차이나의 미국 전범 조사위원회의 조사 대표단에 합류하기 위해 램지는 국제위원회의 요청을 수락했다. 그는 미군 전쟁 포로들을 찾아가서 취재했고 심각하게 폭격당하고 있던 북베트남의 둑과 수문을 둘러봤다. 미군의 B-52는 주로 시골 지역 사람들의 생존 수단을 파괴하기 위해 그들의 상수원을 타격해서 폭격했고 시민들을 살해했다.
8월 14일 그가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서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 램지 클라크는 포로들이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발언했다.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램지 클라크는 “저는 제 삶에서 많은 감옥을 봐왔습니다. 이 10명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인도적인 대우를 받았고 좋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들의 개인실은 제가 그동안 방문했던 모든 감옥의 방보다 더 좋고 더 컸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의도적으로 민간인을 대상으로 폭격한다고 생각하고 있냐고 이의를 제기 받았을 때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우리는 그 가난한 곳에서 지옥을 폭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병원을 타격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고의인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폭격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아닙니까? 3백만 명 이상의 베트남 사람들과 57,000명의 미군이 전쟁 중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치명적인 제재에 대한 반대
1975년 베트남의 통일과 완승으로 전쟁이 끝났을 때, 클라크는 그 어떤 반전운동 지도자도 하지 않았던 일을 했다. 그에게는 고의로 베트남을 응징하고 파괴로부터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제한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미국의 경제 제재가 있는 한 베트남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제재는 19년이 지난 1994년에 마침내 끝났다.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며칠 만에 미국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을 주도해서 “제재”를 시행했다. 미국 평화운동의 상당수는 불가피한 전쟁의 첫 단계를 묵인하며 “전쟁 대신 제재”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램지와 그가 이끌던 반제국주의 연합은 미국이 강제한 해상 봉쇄가 먼저 민중을 굶주리게 만들고, 굶주림이 통하지 않으면 폭격하는 방식으로 작동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전쟁 수단으로서의 제재를 비난했다.
미국의 중동 개입을 저지하기 위한 전국적 연합은 램지와 반전 단체에 의해 주도되었다. 1991년 1월 16일, 폭격이 시작된 지 몇 주 만에 램지 클라크는 번역가, 운전기사, 영화감독 존 알퍼트가 있는 팀을 이끌었다. 그는 밤낮으로 폭격 중이고 전기도 휘발유도 없는 이라크 전역 2000마일을 여행했다.
램지는 미국 국방부의 최소한의 인명 피해로 추정되는 “부수적 피해”라는 신화가 대중의 반전 감정을 완화하기 위한 명백한 거짓말이었음을 보여주기로 했다. 존 알퍼트의 “Nowhere to Hide”는 43일 동안의 폭격 장면이 검열되지 않은 유일한 영화였다.
1991년 2월 초 이라크에서의 귀환 직후 램지가 샌프란시스코에 왔을 때 그는 흑인 공동체의 중심부에 있는 제3침례교회에서 1200명의 만석 청중에게 연설했다. “Nowhere To Hide”는 램지가 폭격당한 마을과 병원을 둘러보는 장면을 담고 있는 충격적인 폭로 영상이었다. 아기 분유를 위한 유일한 분유 공장은 미국의 폭격 때문에 사라졌다. 이라크의 모든 민간 기반시설-수도 처리, 하수 처리 시설, 전력망, 가금류, 그리고 가축-전부가 융단 폭격 이후 24시간 이내에 사라졌다.
이 영화가 미국과 전 세계에 상영되기 전까지 모든 주요 언론은 민간인 사상자는 불행한 사고로 인한 “부수적 피해”라는 펜타곤의 거짓말을 반복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워싱턴에 의해 봉쇄된 국가에서 극심한 고난과 기근에 직면하고 있음에도, 이것은 모든 미국의 전쟁과 봉쇄에 대하여 대중들이 듣게 되는 조작된 거짓말이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사람들에게 만약 램지가 신체적으로 건재했다면 그는 자신의 국제적 명성을 이용하여 예멘 사람들과 함께 미 제국주의의 전폭적 지원을 받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의한 제노사이드를 조명했을 것이라고 종종 말했다.
걸프 전쟁에 대한 램지의 저서 “The Fire This Time”은 이라크의 민간 기반시설 파괴와 폭격으로 인한 25만 명의 사망자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미군이 철수한 후에도 12년 동안 미국의 완전한 봉쇄-일부 리버럴이 박수를 보낸 완곡한 “제재”-는 지속되었다. 2003년의 침공과 점령 이전까지 이 봉쇄로 150만 명을 넘는 이라크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램지는 그런 살인적인 제재의 효과에 대한 그의 연간 조사 결과를 유엔에 제출했다. 그는 이라크로 거듭해서 여행했다. 1998년 5월 나는 그와 동행하는 영광을 누렸고, 84명의 다른 조직자, 변호사, 노동조합원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만들었다. 우리는 미국과 유엔의 제재로 아스피린조차 반입이 금지되어 약이나 의료 기기가 없는 공포의 병원을 거닐었다. 상황은 끔찍했다. -(약만 있었다면) 치료할 수 있었던 감염으로 죽어가는 아기들, 미군이 폭격한 열화우라늄탄의 방사능에 노출되어 죽어가는 노약자와 젊은이들.
1997년 램지의 여행을 기록한 나의 영화 “Genocide by Sanctions: The Case of Iraq”는 “전쟁이 아닌 제재”의 실체는 거짓말이라는 주제를 폭로했다.
램지는 팔레스타인인의 권리를 강력하게 지지했고 그는 아랍 전 지역에서 사랑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미국의 그 누구도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의 정당한 대의명분을 기꺼이 지지하려고 하지 않았을 때부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의 변호사였으며, 수많은 국제 법률 분야에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변호하였다. 램지는 램지의 이러한 행동이 반유대주의적이라는 이스라엘 정부와 우익의 터무니 없는 주장이 지금보다 훨씬 더 지배적이었던 과거 수십 년 동안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과의 연대를 수행했다. 그는 이란에 있는 미국의 서방 괴뢰 정권인 샤의 가장 두드러진 비판자 중 한 명이었다.

쿠바는 램지 클라크에게 매우 중요했고 그는 그 섬을 수차례 여행했다. 그는 쿠바의 사회적 성취를 칭찬했고 1993년 멕시코를 횡단하여 쿠바로 건너온 평화 목사단(the Pastors for Peace)의 “우정의 캐러밴(Friendshipment Caravan)”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6살인 엘리안 곤살레스의 즉각적인 귀국을 요구했다. 그는 Cuban Five(편집자주: 1998년 미국 당국으로부터 불법 투옥 당한 다섯명의 쿠바인을 이르는 명칭)의 미국에서의 불법 투옥에 대하여 만약 그가 법무장관이었으면 그들의 혐의를 기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년 동안 쿠바에 대한 지지와 미국의 대량학살적 봉쇄에 대한 반대로 그는 Cuban Five의 어머니들과 함께 2012년에 연대 훈장을 받았다.
램지는 대한민국(남한)뿐만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도 여러 차례 방문했다. 2001년에 그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 전쟁 범죄에 대한 국제재판소의 기조연설자이자 주요 법조인이었다. 재판소는 전문가의 증언을 발표했고 전 세계 사람들의 참여를 끌어냈다. 램지의 마지막 방북은 1953년 한국에서의 군사적 적대행위를 종식한 휴전 협정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2013년 7월이었다. 평양에서, 그리고 이후 서울과 도쿄 방문 중에 램지는 북에 대한 제재 종식에 대한 필요성에 대해 열변하며 미국이 북과 평화 협정을 체결하여 한국전쟁을 완전히 끝낼 것을 요구했다.
램지가 지지하지 않은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이나 명분은 없었다.
그와 함께 몇 시간을 보낼 기회가 있는 그 누구나 그의 경험으로부터 기억할만한 역사 수업을 받을 것이다. 나는 캘리포니아에 있던 그를 대학 업무차 3시간 동안 차로 데려다주고 온 적이 있다. 램지는 그가 항소심에서 석방하려고 했던 루챌 매기의 일대기와 그가 “정의” 체제에 의해 당해왔던 절대적 잔인함을 들려줬다.
그는 원주민의 주권을 굳게 믿었고 50년 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던 주요 토지 주장을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이었다.
1994년 1월 1일 멕시코 치아파스주에서 사파티스타 반군이 봉기했을 때, 예상한 대로 램지는 그가 그곳에 있어야 조사를 하고 그의 지지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반란이 일어난 지 일주일 만에 브라이언 베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작은 팀에 있게 돼서 행운이었다. 원주민 마야인들의 영웅적인 행동은 빌 클린턴 대통령과 카를로스 살리나스 대통령에 의해 서명된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에 의해 촉발되었다. 사파티스타는 NAFTA로 인해 옥수수와 같은 미국산 제품이 멕시코로 쇄도함으로써 그들의 생계를 파괴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멕시코군의 탄압에 대한 두려움은 뚜렷했다. 그런데도 멕시코인과 국제 언론, 그리고 원주민의 곤경에 동조하는 진보주의자들은 무장 투쟁에 대한 지지를 주저했다. 우리의 방문이 마무리된 후, 램지는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의 호텔 기자회견에서 수백 명의 기자에게 그들의 무장 투쟁-즉 그가, 명명한 “전 세계에서 들리는 총성”-은 전적으로 정당하다고 선언했다.
램지는 FBI에 의해 강제송환된 지 45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미국 연방 교도소에 수감 중인 원주민 정치범 레너드 펠티에의 항소심 변호사였다. 1997년 11월 16일, 레너드를 위해 1,0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인 대규모 실내 집회에서 램지는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말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리고 거의 모든 검사와 FBI도, 레너드 펠티에가 유죄판결을 받은 범죄는 무죄입니다. ... 우리가 레너드 펠티에를 석방하는 것은 필수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원주민, 그리고 원주민은 첫째도, 첫째도, 첫째도 평등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레너드가 자유로워질 때까지, 우리는 모두 위험에 처해있습니다. 그는 미국인이 언론과 전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을 황폐하게 만드는 군산복합체를 통제하는 강력한 경제적 이익에 마침내 맞설 의지가 있는지를 대변합니다. 너무 늦기 전에 우리가 일어나서 미국 정부의 잘못된 발걸음을 저지할 의지를 지니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램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유고슬라비아까지 날아가서 그 포위된 국가에 대한 지지를 보여줬다. 유고슬라비아는 1988년부터 1991년까지 전 지역을 휩쓴 자본주의 반혁명에 의해 전복되지 않은 그 당시 유럽에서의 유일한 사회주의 정권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유고슬라비아 정부를 파괴하기로 했고 2년 후 그렇게 했다. 1999년 3월, 미군과 NATO의 73일 동안의 폭격이 세르비아 코소보 지역에서의 이슬람 소수 민족을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시작되었다.
미 제국주의가 상업 언론에서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 밀로셰비치를 악마화한 것은 미국의 수많은 전통적인 평화 운동조직을 효과적으로 무력화시켰다. 그러나 미국 반전운동의 반제국주의 진영으로부터 수천 명의 사람이 거리로 나왔다. 곧 유고슬라비아의 모든 사람이 NATO의 표적이 되었다. 미국 국방부와 클린턴 행정부의 주도하에 NATO는 중부 유럽에 있는 이 작은 나라에 28000발의 폭탄과 미사일을 투하했다. 많은 자유주의자, 심지어 저명한 진보주의 활동가들조차 램지의 적극적인 유고슬라비아 옹호에 대하여 실망하여 한탄했다. 그들은 CNN, NBC, 그리고 뉴욕 타임스가 그들이 보기를 원하는 것-유고슬라비아 점령자로서의 밀로셰비치-을 볼 뿐이었다.
그러나 양심의 나침반을 따르는 램지는 국방부의 선전 기계를 간파했다. 1999년 3월 24일 폭격이 투하되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한 번 더 그와 함께, 이번에는 헝가리로 날아가는 특권을 누렸다. 우리는 주민들에게 끼친 파괴적인 영향력을 기록하고자 전쟁 5일째인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로 갔다.
그것은 나의 다큐멘터리 “NATO Targets Yugoslavia”가 되었다. 문자 그대로 전쟁 중 날마다 CNN은 그 전날의 폭격은 “NATO군의 가장 강력한 폭격”이라고 보도했다. 램지는 전쟁 55일째 되는 날 그곳으로 날아갔다. 나는 그와 다시 동행했다.

특별히 램지와의 극적인 사건은 2001년 6월 말 유고슬라비아에서 반혁명이 일어났을 때 발생했다. 밀로셰비치는 CIA에 의해 조작된 “색깔 혁명”으로 밀려났다. 새로운 쿠데타 정부는 유고슬라비아의 사회주의자들과 1999년 NATO의 폭격에 대한 저항을 주도한 다른 애국자들을 재빠르게 체포하기 시작했다.
램지는 그가 당장 그곳으로 날아가고 싶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당시 워싱턴 D.C.에 있는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은 우익으로 바뀌었고 그에게 비자 발급을 거절했다. 그건 램지를 막지 못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내게 전화해서 말했다. “다음 비행기를 타고 JFK 공항으로 가세요. 나는 당신을 공항에서 만날 수 있어요.” 내가 그곳에 갔을 때 우리는 터미널을 최대한 빨리 통과했다. 비행기 탑승구가 닫히면서 이륙 준비가 되었다.
우리가 마침내 베오그라드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출입국 관리소에 서 있었고 창구로 다가가자 직원은 창구를 쾅 하면서 닫아버렸다. 관리들이 우리에게 와서 “당신들은 출국해야 합니다. 입국할 수 없습니다. 지금 즉시 비행기에 타세요.”라고 말했다. 램지가 “저는 램지 클라크고...”라고 말하자 그들은 “우리는 당신이 누군지 압니다. 비행기에 타세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안 됩니다. 우리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우리의 초청자들에게 전화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세르비아) 사회당에 있는 우리 친구들이 우리를 데리러 오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비행기는 이륙했다. 다른 비행기가 파리로 돌아가는 활주로에 착륙했다. 관리들은 다시 “이 비행기를 타세요, 당장!”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거절했다. 그러고 나서 그 비행기 또한 이륙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할 수 있을지 우리는 알지 못했다.
그때 2명의 경찰과 한 여자와 남자가 우리에게 왔다. 젊은 여자가 “당신들 여권을 주세요.”라고 말했다. 남자는 내게 “따라오세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나를 공항 터미널로 데려간 후 공중전화 부스로 데려가서 “전화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내가 램지에게 돌아왔을 때, 여성 경찰이 우리에게 완료된 비자와 함께 여권을 건네줬다. 그녀는 램지에게 열정적으로 말했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위해 한 일과 전쟁 중에 우리를 지지한 것을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오빠가 군대에 있었는데 전쟁 중에 다쳤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밝게 말했다. “오늘 밤 집회에서 봅시다!”
우리가 밀로셰비치의 불법 체포와 제국주의 재판소에 의해 날조된 고소로 인해 헤이그로 납치된 것에 항의하는 대규모 집회에 도착했을 때 군중은 램지를 환호했다. 그들은 그를 진정한 친구로 봤다. 그것은 마치 영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상당한 모험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인도주의자
2004년 1월, 램지 클라크와 나는 인도 뭄바이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WSF)에 참석했다. 나는 Cuban Five의 석방 투쟁을 위해 그곳에 있었다. 물론, 램지는 우리 시대의 다른 주제들뿐만 아니라 Cuban Five를 대신해서도 발언했다. 그의 발표가 끝날 즈음 위니 만델라가 걸어갔다. 나는 이 혁명적인 여성 지도자가 이곳에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램지를 포옹하기 위해 걸어갈 때 큰 소리로 말했다. “램지 클라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들었을 때, 저는 그를 보러 가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따뜻하고 행복한 교류를 했다.
그날 늦게, 그는 내게 말했다. “당신이 생각해보면 그녀도 넬슨 만델라만큼 고통받았습니다. 그녀는 투옥, 경찰의 학대, 추방, 남편과 자녀로부터의 고립이라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는 내게 그녀를 한 번 보러 남아프리카에 간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추방당한 그녀는 그를 들어오게 하려고 문을 열 수도 없었고 집을 떠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램지가 그녀의 손을 스크린을 통해 만지기 위해 “악수”로서 그의 손을 스크린도어에 올렸기 때문에, 그녀는 더 고립된 추방에 처해졌다.
램지는 그가 변호한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 의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사랑받았다.
내가 목격한 램지의 국제주의자 임무에 대한 이러한 감탄과 사랑의 표현들은 너무도 많아서 여기에서 다 언급할 수는 없다. 램지 클라크의 법적, 정치적 삶은 책과 도서관 기록보관소를 가득 채웠다. 사실 그보다 더 말할 수 있는 것이 훨씬 많다.
유명한 영화감독 조 스틸먼에 의해 제작된 수상작 다큐멘터리 “Citizen Clark: A Life of Principle”에는 그의 삶에 대한 특별한 역사가 들어있다. 조는 “제가 그의 삶에 대하여 자세히 알았을 때, 나는 그의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게는 저 자신을 위해 집을 사던지, 램지에 대한 영화를 위해 돈을 투자하던지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의 삶을 기록해서 기쁩니다.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저는 기꺼이 같은 선택을 할 것입니다.”
1993년 3월 램지의 유고슬라비아 첫 전시 방문에서 나는 그가 학자, 법학자, 그리고 법조인들로 꽉 찬 청중들에게 말하는 것을 촬영하고 있었다. 그는 그날이 자신의 아내 조지아와의 결혼 50주년 기념일이라고 언급하면서 그녀에 대한 커다란 사랑과 애정을 지닌 채 말했다. 그는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을 지키는 데 필요한 만큼 그녀가 그들의 기념일에 그가 부재하는 것을 지지했다고 말했다. 조지아는 사회 정의에 대한 그의 신념을 공유했고 그들이 톰과 론다라는 두 아이를 키우는 동안 그녀는 그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수년 동안 일하였다. 그들은 가족으로서도 자주 여행했다.
안타깝게도 조지아는 2010년에 세상을 떠났다. 법무부의 환경 변호사였던 톰은 2013년 59세의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론다는 청각 장애인이자 발달 장애인이고 평생을 집에서 살았다. 그녀는 램지의 죽음을 예상하고 뉴욕에 있는 특수학교로 전학을 왔다. 램지 클라크는 조지아가 죽은 후 그녀를 혼자 키웠다. 그는 론다를 아꼈고 “그녀가 이 집의 주인이에요.”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가까운 유족으로는 여동생 미미 클라크 그론룬드, 제수 셰릴 케슬러 클라크, 세 손녀 휘트니, 테일러, 그리고 페기 클라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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