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childbook.org/spc/bjh/bang2-4.htm


소파 방정환과 사회주의

염 희 경 (겨레아동문학연구회 회원)

 

1. 문제제기 

아동문학계에서 1999년은 방정환(方定煥, 1899∼1931)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다. 세기의 전환을 앞두고 우리 '근대' 아동문학을 되짚어본다는 점에서도 '방정환'은 하나의 문제적인 화두로 떠올랐다. 아동문학과 어린이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아직도 방정환의 고민틀 곧 근대적 사유체계를 제대로 극복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근대 아동문학의 기원에 자리한 방정환을 올바르게 해명하고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일은 현 시점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동문학계의 연구 부진 탓에 사실 확인과 같은 기초 조사조차 부실한 실정이다. 그러한 바탕 위에서 방정환에 대한 신화에 가까운 우상화나 부당한 비판 내지는 폄하가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왔다. 때문에 지금 우리는 방정환의 문학과 사상, 활동에 대한 객관적 실상을 확보하는 일과 그것을 오늘의 시점에서 재평가해야 하는 두 겹의 과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널리 알려졌듯이 방정환에 대한 비판은 카프(KAPF)의 영향 아래 있던 『별나라』로부터 시작되었다. 박세영(朴世永)과 송영(宋影)을 필두로 한 『별나라』는 방정환과 『어린이』를 '동심천사주의'(童心天使主義)로 비판하면서 '동심의 계급성'이라는 깃발을 높이 내걸었다. 요컨대 아동문학의 이념을 '민족'에서 '계급'으로 새롭게 조정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정기의 이러한 대립적 인식은 특수한 전략적 구도의 산물로, 거기서 비롯된 주의·주장은 실상과 많은 거리를 노정하게 마련이다.
   이 거리가 쉽사리 메워지지 못하고 굳어질 때 하나의 고정관념이 되고 만다. '민족주의자 방정환'이라는 상도 다분히 그렇다. 물론 방정환이 민족주의자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때의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선택의 수사는 너무 강력하고 지배적이어서 "방정환과 사회주의"라는 논제 자체를 무력하게 만든다. 더욱이 분단으로 말미암아 남북한에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체제가 자리잡음으로써 '민족주의 대 계급주의'라는 카프의 방정환 비판의 잣대는 양측의 제도권 문단에 의해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아동문학계에서는 이 둘을 무관한 것으로, 심지어는 적대적인 것으로까지 규정하는 시각이 널리 통용되어왔다. 이것은 방정환을 객관적으로 조명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지만 한국 근대아동문학사를 바라보는 데에도 강력한 편견으로 작용한다. 이를테면 방정환을 반동으로 규정하고 계급주의 아동문학을 주류로 삼고있는 북한의 아동문학사는 말할 것도 없고, 남한 학계 아동문학 연구의 대표적 성과라 할 이재철의 『한국 현대 아동문학사』 (일지사, 1978)나 이에 대한 비판으로 쓰여졌다고 할 이재복의 『우리 동화 바로 읽기』(한길사, 1995)도 이러한 편견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1) 특히 이재철과 이재복은 서로 다른 관점에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정환의 사상과 문학을 사회주의와 대립한 좁은 의미의 민족주의라는 틀에 가두어 놓았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구도에 문제를 제기한 원종찬의 글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2) 그는 방정환이 한국 근대아동문학의 기원을 세우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계몽주의와 낭만주의뿐만 아니라 민족과 계급 문제를 함께 고민한 현실주의에도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평가했다.
   필자는 이런 문제 의식에 공감하면서 지금껏 밝혀지지 않았거나 적대적인 것으로만 치부되어온 방정환과 사회주의의 문제를 살펴보려고 한다. 따라서 이 글은 방정환에 대한 총체적 이해보다는 그것을 가로막아온 그릇된 일반 통념을 바로잡기 위해 새로운 자료들을 검토하고 그의 사상적 기반을 해명하는 데에 초점을 두었다.

2. 번역과 창작에 담긴 사회주의 사상 

방정환은 일본 유학 시기에 사회주의 사상의 세례를 받는다. 이는 당시 유학생들이 일본 사회에 확산되어 가던 사회주의 사상으로부터 적잖게 영향을 받던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시기 방정환의 사상적 면모를 단지 일본 사회주의의 영향만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방정환이 지녔던 천도교 사상이 사회주의 사상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방정환이 최초로 번역한 동화는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다. 이 사실은 방정환과 사회주의 사상과의 친연성을 해명하는 데에도 무척 흥미롭다. 잘 알다시피 「행복한 왕자」는 한 평생을 행복하게 살다가 죽은 왕자가 동상으로 세워진 뒤, 세상에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줌으로써 하느님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줄거리의 동화다. 방정환은 이 동화를 「왕자와 제비」라는 제목으로 고쳐 목성(牧星)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다. (『천도교회월보』, 1921. 2) 이때 제목뿐 아니라 줄거리와 구성, 인물의 성격 등 많은 부분을 새롭게 고쳐썼다.3)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원작에 충실한 번역이라기보다는 창작의 성격이 덧보태진 번안인 셈이다. 이 번안동화는 방정환과 천도교, 그리고 사회주의 사상의 관련성을 밝히는 데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동화의 원작자인 오스카 와일드는 흔히 유미주의자요 예술지상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영국의 사회주의 사상에 영향을 끼친 예술가이기도 하다.4) 표면적으로 상충하는 듯한 이 두 사실은 서구 예술사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이 지닌 역사성을 이해할 때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낭만주의에서 유래된 '예술을 위한 예술'은 원래 고전적 예술 규범에 대한 하나의 반항으로 출발했지만 더 나아가 모든 외적 제약에 대한 저항, 즉 자유를 위한 투쟁의 수단을 대변했다. 특히 당시 부르조아지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예술을 선전의 도구로 삼으려는 것을 철저히 거부하는 예술적 진지성이 그 이면에 깔려있었다. 철저한 예술지상주의는 철저한 반부르조아 의식과도 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빅토리아 왕조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물질주의에 반대하는 정신 운동으로서, 오스카 와일드가 존 러스킨과 함께 기독교 사회주의 사상을 일으켰다는 것, 「행복한 왕자」는 그러한 사상에 바탕을 두고 창작된 대표적인 동화라는 사실5)은 기성 제도와 부루조아 속물주의에 대한 예술지상주의자들의 철저한 비타협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 사회주의 사상에 뿌리를 둔 「행복한 왕자」는 방정환에 의해 천도교 사상과 사회주의 사상이 어우러진 「왕자와 제비」로 새롭게 태어났다. 이러한 특징은 동화의 결말 부분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원작에서 왕자와 제비는 '하느님의 낙원'에서 축복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방정환은 세상 사람들이 왕자와 제비의 사랑과 희생 정신을 오래도록 전하는 것으로 고쳤다. 원작의 기독교적 색채가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의 변화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방정환은 「동화를 쓰기 전에 어린애 기르는 부형과 교사에게」(『천도교회월보』, 1921. 2)에 바로 이어 「왕자와 제비」를 실었다. 앞의 글에서 그는 "어린이들이 새 세상의 새 일꾼으로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새 일(동화 창작―인용자)에 임하려 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발언을 고려할 때, 결말 부분의 변화는 천도교의 '지상천국 건설'이라는 이념과 닿아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동화를 번안할 당시 방정환은 천도교 청년회의 도쿄 지회장으로서 교세 확장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동지인 천도교인 박달성(朴達成)이 도쿄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환영의 글을 쓴다. 

우주 최고의 진리인 인내천주의 하에 절대평등으로 다 같은 교인으로 아름다운 천덕송 소리 속에 즐거운 평화한 날이 끝없이 흘러갈 날을 생각할 때에 지금 또 한 일꾼을 맞는 것이 기쁘지 않고 어쩌랴. (소파, 「교우 또 한 사람을 맞고」, 『천도교회월보』, 1921. 2)6) 

여기서 방정환이 천도교 사상의 핵심인 인내천(人乃天)을 절대평등 사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천도교적 인식이 당시 일본에서 급속도로 힘을 얻어가던 사회주의의 평등 사상과 쉽게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천도교(동학)가 한국근대정치사상사에서 민족·민중운동의 성격을 지닌 종교였다는 점과도 관련된다.
   방정환은 1921년부터 『개벽』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이 담긴 글을 자주 발표했는데, 특히 「왕자와 제비」를 번안한 얼마 뒤 같은 필명으로 「깨어가는 길」(『개벽』, 1921. 4)을 번역·소개한다. 방정환은 이 글에서 "가장 취미있고 가장 유익한 이야기로 나는 이 일 편을 소개한다. 이것은 현금 일본 사상계에 유명한 계리언(堺利彦) 씨의 작인데 이제 나는 그 전반(일본 역사에 관한 것)을 약제하고 요지만을 우리말로 고쳐서 쓴다"(124쪽)고 하였다.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 1870∼1933)는 일본에서 활동하던 대표적인 사회주의자였으며, 조선에 사회주의를 중개한 최초의 외국인 사회주의자로 주목받는 인물이다.7) 그는 1921년 사회주의에 대해 강연하기 위해 국내에 초빙되기도 했다.
   어쨌든가 돈이란 이상한 것이니라. 임금은 돈을 곳간 속에다가 잔뜩 쌓아놓고 파수를 보게 하는데 그 돈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많이 일을 해야 하고도 먹을 것을 점점 없어질 뿐이고, 그러다가도 산촌과 싸운다는 소문이 나서 수수와 말린 생선을 산같이 모으고....... 그러면 우리의 먹을 것이 더 없어지고, 그래도 태평세계로 불평의 소리가 조금 일어날 듯하면 오초란 놈이 또 노래를 부르며, 산촌놈을 죽이라고 부르짖는다. (중략) 그런데 여기 빨갱이란 사람이 생겼는데 그 사람이 꽤 그럴 듯한 이야기를 하였다. (중략) 힘을 합하는 자는 강해지나니, 해촌인이 산촌인 하고 미워하지만 해촌인과 산촌인이 힘을 합치면 싸움도 없어지고 수비도 파수도 다 소용 없이 될 것이다. 그리고, 놀고 먹는 사람 없이 다 같이 일을 하면, 하루에 두 시간 이상 일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목성, 「깨어가는 길」, 『개벽』, 1921. 4, 133∼134쪽)
   인용한 부분은 "원숭이의 인류화, 인류의 생활 조직, 국가의 성립, 국력의 증대, 부자의 속출, 자본가의 융성 등, 예기치 못한 변천에 통감하는"(125쪽) '나'가 상식 많은 노인을 찾아가 인류 최고의 역사에 관한 일을 묻자 그 노인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목이다. 여기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글은 인류의 발생에서부터 조직의 형성과 국가의 성립, 자본가의 등장, 그리고 사회주의의 출현에 이르는 인류 역사를 사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깨어가는 길」이란 제목도, "빨갱이는 이리저리 피하여 다니며 거사할 일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촌민은 그저 눈이 뜨이지 않았다. 그저 이 때까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단다."(137쪽)라는 노인의 말에서 알 수 있듯, 민중들이 사회주의 사상으로 각성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한편 방정환은 창작에서도 사회주의 사상을 드러내는데, 『개벽』에 연재(1921. 1∼1921. 12)된 풍자적 소설 형식의 「은파리」에서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1921년이라면 계급적 인식을 드러낸 작품의 계보로 따져보아도 꽤 앞선 것이다.
   부지런히 일하는 놈은 빈한해지고 박해를 당하고, 편히 노는 놈은 점점 금고가 커지는 게 사람의 세상이다. (중략) 착한 사람들이 부지런히 노동해서 모은 돈을 거짓말로 속여서 빼앗는 것이 재산이다. 유산자가 무산자의 힘을 빌고 그 상당한 보수를 주게 되기까지는 그 말이 옳은 말이다. 그렇지만 그 옳은 말을 하는 놈은 곧 잡아다가 가둔다 이게 사람의 세상이다. (목성, 「은파리」, 『개벽』, 1921. 4, 76∼77쪽)
   방정환은 "불령 파리"란 꼬리표를 달게 되었다는 입담 좋은 '은파리'의 입을 빌어 사회 이곳 저곳의 세태를 날카롭게 풍자한다. 특히 인용한 부분에서도 알 수 있듯, 자본주의의 모순과 불평등 구조를 비판하고 있다. 게다가 「은파리」 연재 가운데 1921년 3월호에서는 자신이 일경에게 감시를 받는다는 사실을, 4월호에서는 "뜻밖의 일로 수 십일이나 철창 속에 지내다가 나왔다"는 실제의 사실을 직접 밝히고 있다. 『개벽』 4월호의 발행 날짜가 4월 1일이므로, 방정환이 1921년 3월 무렵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지금까지 작성된 <방정환 연보>에는 이 시기의 검거 사실이 빠져있다.8)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건이었을까.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박달성이 쓴 「철창에서 느낀 그대로」(『개벽』, 1921. 4)란 글이다. 이 글에서 박달성은 "2월 16일 동경에서 일어난 M의 사건"으로 감옥에 갇혔다고 전한다. 그리고 글 끝에 "六二.三.一四"라고 집필일자를 분명히 밝혀두고 있다. (여기서 62는 1860년을 포덕 원년으로 삼는 천도교 연호로 1921년을 가리킨다.) 박달성은 당시 천도교 청년회 도쿄 지회에서 방정환과 함께 활동했다. 따라서 방정환 역시 같은 사건에 연루되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박달성이 이 글을 쓴 날짜로 미루어보아 방정환 역시 1921년 2월 중순 무렵부터 3월 초·중순까지 약 20여 일 남짓 구금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방정환의 장남인 방운용의 진술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 당시 (방정환이 천도교 소년회 창립 문제로 서울과 도쿄를 자주 오가던 1921년―인용자) 반(反)독립운동가인 민원식(閔元植) 살해 사건 혐의로 천도교 청년회원들이 전부 구속되는 큰 사건이 일어나서 고생을 했고..…. (방운용, 「아버님의 걸어가신 길」, 『나라사랑』, 외솔회, 1983년 겨울호, 81쪽)

따라서 박달성이 말한 "1921년 2월 16일 동경에서 일어난 M의 사건"은 민원식 암살 사건이 틀림 없다. 민원식은 신일본주의를 표방하는 국민협회(國民協會)의 대표이자 『시사신문』의 발행자인 친일파였는데, 1921년 2월 이른바 참정권 운동의 하나로 중의원 선거법 시행 청원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도쿄에 갔다가 민족주의자 양근환(梁槿煥)에 의해 살해되었다.9) 방정환을 비롯한 당시 도쿄의 천도교 청년회원 전원은 이 사건의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던 것이다.
   한편, 방정환은 도쿄로 유학을 떠나기 전인 1918년 보성전문법률상업학교의 문예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문예강연회에서 모리스 르블랑의 탐정소설 「팔일삼」을 강연하기도 했다.10) 더욱이 『청춘』과 『유심』의 독자현상문예에 소설을 투고해 당선되었으며,11) 1920년대 초에는 『개벽』을 통해 「은파리」뿐 아니라 몇 편의 다른 소설들을 발표하기도 했다.12)
   나 자신이 민중의 일인인 이상 거짓 없는 진실한 나의 요구는 그것이 많은 민중의 그것과 그다지 다르지 아니할 것이며, 그것은 의심할 것도 없는 당연한 것입니다.
   많은 민중은 모두 모든 모순, 불합리, 혼돈한 속에서, 생존경쟁이란 진흙 속에서 털벅거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존경쟁은 아무 향상도 아니고, 새로운 창조도 아닌 걸아와 같은 욕망을 채우려고 남의 눈에 들려고만 노력할 뿐입니다. 그러느라고 빈약자는 부강자에게 자꾸 그 고기를 먹히고 있습니다.

비참히 학대받는 민중의 속에서 소수 사람에게나마 피어 일어나는 절실한 필연의 요구의 발로, 그것에 의하여 창조되는 새 생은, 이윽고 오랜 지상의 속박에서 해방될 날개를 민중에게 주고, 민중은 그 날개를 펴서 참된 생활을 향하여 날개 되는 것이니, 거기에 비로소 인간 생활의 신국면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항상 쉬지 않고 새로 창조되는 신생(新生)은 민중과 함께 걸어갈 것입니다. (방정환, 「작가로서의 포부―필연의 요구와 절대의 진실로」, 『동아일보』, 1922. 1. 6)
   이 글에서도 역시 모순과 불합리, 혼돈과 생존경쟁이 지배하는 시대를 비판하면서 빈자와 부자의 계급 갈등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비참히 학대받는 민중들 속에서 피어나는 소수의 절실한 필연의 요구에 의해 창조되는 새 생"이야 말로 "민중이 속박에서 해방되는 참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인간 생활의 신국면"이라고 밝히고 있다. '절대평등' 사상 중심의 인내천 이해와 더불어 다분히 '민중문학론'적 사고를 내비치는 이러한 발언을 볼 때, 이 무렵 방정환이 사회주의 사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3. 사회주의자들과의 교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방정환은 유학 시절 초기인 1921년 무렵에 번역과 창작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피력했다. 그렇다면 방정환이 이 당시 일본에서 교류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 사상을 지녔으리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텐데, 지금껏 이러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먼저, 사회주의자 김찬(金燦, 본명 金洛俊)과의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김찬은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東京朝鮮苦學生同友會)의 창립 일원이며, 화요회(火曜會)의 중진으로 조선공산당 창건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회주의자다. 그는 1, 2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을 피해 국외로 망명하여 활동을 펴다가 국내로 잠입하지만 1931년 5월 구속되고 만다.13) 그런데 김찬이 검거된 얼마 뒤 『혜성』 (1931. 7)에서는 <김찬은 어떤 인물인가>란 특집을 마련한다. 이 특집 기사에 방정환은 「호방한 김찬」이란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을 보면, 방정환이 1921년에 김찬과 교류를 하고 있었고 유학 시절에 아주 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방정환은 김찬과 교류하며 겪은 세 편의 일화와 다른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은 그에 관한 일화 하나를 곁들여 소개한다. 또, 이 특집란에는 박달성이 쓴 「동경에서 본 김찬」도 실려있다. 박달성은 신유(辛酉)년 봄, 곧 "방정환, 이기정(李起貞) 제군과 동경소석천구대총판하정(東京小石川區大塚坂下町)에 천도교 청년회 동경지회를 창설하고 매일 여러 동지들과 교유하던 때"에 김찬을 처음 만났다고 밝히고 있다. 천도교 청년회 도쿄 지회가 1921년 2월 13일에 창설되었으니 그들이 알게 된 것은 얼마 뒤의 일일 것이다. 특히 이 글에서 박달성이 김찬에 대해 "양근환 군과 호일대(好一對)였지요. 성격과 행동이 어지간히 근사(近似)하였지요."라고 언급한 부분은 무척 흥미롭다. 양근환이 1921년 2월 16일 민원식을 암살한 민족독립운동가라는 것과, 이 사건에 연루되어 방정환을 비롯한 도쿄의 천도교 청년회원 전원이 체포되었던 사실을 앞에서 이미 밝혔다. 그런데, 박달성이 양근환과 사회주의자 김찬을 견주어 말한 것을 보면 당시 그들을 잘 알고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양근환과 김찬 사이에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는지는 정확치 않지만, 적어도 방정환·박달성 등이 이들과 밀접하게 교류했다는 사실만은 확인할 수 있다.
   이 밖에 방정환과 김찬의 관련을 생각해볼 수 있는 또다른 사실이 있다. 천도교 청년회 주최로 '현하의 동양대세(現下東洋大勢)에 관한 시국강연회'가 개최되었을 때, 김찬은 '현하의 극동'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다. (『동아일보』, 1923. 3. 31) 그리고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맞아 열린 소년문제 강연회에서 김찬은 '러시아의 소년'이라는 연제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 (정인섭, 『색동회 어린이운동사』, 학원사, 1975, 52쪽) 1923년 어린이날을 준비하기 위해 결성된 '소년운동협회'(少年運動協會)의 중심 조직이 천도교 소년회이고, 그 조직의 중심 인물이 방정환과 소춘(小春) 김기전(金起田)이라는 점, 그리고 일본에서 방정환과 김찬이 긴밀한 교류를 가졌다는 점을 종합해 볼 때, 김찬이 이 두 강연회의 연사로 초청된 데에는 누구보다도 방정환의 역할이 컸으리란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한편, 방정환은 천도교 청년회의 도쿄 지회장으로 있으면서 1921년 9월 도쿄에서 조직된 '천도교 청년극회'에도 관여했다.

   천도교 청년회 동경지회의 주최로 흥행하여 「신생(新生)의 일(日)」의 연극은 동교 지일(地日)기념일에 동교총부에서 흥행하여 많은 갈채를 받고 그후 평양 진남포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흥행을 하여 많은 갈채를 받은 바 경성에서 한번 다시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음으로 금일 오후 일곱시 반에 경운동 교당 안에서 다시 흥행하고 입장권을 발행할 터인데 보통권은 오십 전 평균이요. (『동아일보』, 1921. 9. 4)

이 기사에서 천도교 청년회 도쿄 지회 주최로 연극 「신생의 일」을 공연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민영에 의하면 '천도교 청년극회'가 대부분 학생들로 구성되어 방학을 이용해 전국을 돌며 공연했고 레파토리는 작자 미상의 「신생의 일」이라고 한다. (유민영, 『한국 근대 연극사』, 단국대 출판부, 1996, 540쪽) 그런데, 1923년 도쿄에서 조직된 '색동회'의 회원 정인섭은 방정환이 1921년 9월 4일 천도교 대강당에서 자작 사극 「신생의 일」을 연출·출연했다고 밝혔다. (정인섭, 앞의 책, 415쪽) 또 방정환이 사망한 후 『동아일보』 관련 기사(1931. 7. 28)에는 '일본유학생회'에서 연극하던 때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함께 실려있다. 이 기사에서 밝힌 '일본유학생회'가 '천도교 청년극회'는 아닌 듯하다. 어쨌든 정인섭의 발언이나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와 사진을 볼 때, 당시 도쿄에서 조직된 '천도교 청년극회'에 방정환이 관여했으리란 것은 거의 틀림없다. 방정환이 일찍이 연극과 영화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던 사실과 당시 천도교 청년회 도쿄 지회장이었던 점은 그가 도쿄에서 '천도교 청년극회'의 조직에 적극 관여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14
  방정환이 '천도교 청년극회'에 관여했다는 사실은 그의 활동이나 업적 하나를 더 추가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띠고 있다. 방정환과 사회주의 사상의 관련을 밝히는 데에 중요한 단서 즉, 당시 도쿄를 중심으로 활발히 조직되던 극예술 단체의 연극인들과 방정환이 교류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1920년 봄, 도쿄 유학생들은 '극예술협회'(劇藝術協會)를 조직하는데, 동인으로 김우진(金祐鎭), 조명희(趙明熙), 조춘광(趙春光, 본명 趙俊基), 고한승(高漢承), 최승일(崔承一), 김영팔(金永八) 등이 활동했다. 이 가운데 조명희는 1919년 도요(東洋) 대학 동양철학과에 입학해 고학 생활을 하면서 1921년 극본 「김영일(金英一)의 사(死)」15)를 썼다. 방정환 역시 도요 대학에 다녔으므로,16) 조명희와의 만남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극예술협회' 동인 가운데 고한승과 조준기는 1923년 방정환과 함께 '색동회'를 조직했다. 조준기는 니혼(日本) 대학 문학부 극문학과에서 연극을 공부하던 학생으로, '색동회'를 창립할 당시 일본에서 그가 각색한 「사인남매」(四人男妹)가 상연되기도 했다. 「사인남매」는 혁명가, 인도주의자, 사회주의자, 연애지상주의자 등 각양각색의 신사상에 물든 젊은이들이 등장하여 서로 충돌하는 것을 보임으로써 사회주의, 아나키즘, 인도주의 등 근대적 제사상이 혼류하는 1920년대 초반 정신계의 현실을 부각시키려 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유민영, 앞의 책, 523쪽) 고한승도 니혼 대학 예술과에 다녔는데,17) 그는 일본 유학을 떠나기 전부터 이미 방정환, 마해송(馬海松), 진장섭(秦長燮)과 친분이 두터웠다.18)
   조준기와 고한승이 다니던 니혼 대학에는 '극예술협회' 동인인 최승일과 김영팔도 있었다. 이들은 카프의 전신인 염군사(焰群社) 동인이며 또한 사회주의 단체 북풍회(北風會)에 가담한 인물들이다. 김영팔은 1925년 카프에 가입하고 1927년에 경성방송국에서 활동하다가 해방 후 월북한다. 특히 그는 방정환과 관련해서도 낯설지 않은데, 방정환이 사망한 후 「방송과 방 선생」(『어린이』, 1931. 8)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방송국의 연예부문 캐스터였기 때문에 그 당시 어린이 방송―동화 구연과 강연―을 진행하던 방정환을 잘 알았을 터이다. 그런데 방정환과 김영팔은 이미 일본 유학 시절부터 교류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학생들 사이에서 자주 만나 교류를 했던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 방정환이 '천도교 청년극회'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강하게 흡수하던 시기였기에 '극예술협회' 동인이자 사회주의 활동을 하던 김영팔과는 이때부터 친분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일본 유학 시절 방정환은 사회주의 사상에 친연성을 지녔던 '극예술협회' 동인들과 교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방정환은 소설 창작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런 점에서 『백조』의 후기 동인으로 참여한 사실도 그리 뜻밖의 일은 아니다.19) 방정환과 김기진(金基鎭)이 박영희(朴英熙)의 추천을 받아 『백조』 동인으로 가입한 것은 1922년 겨울이었다.
   나도 조선에 있는 선배들과 처녀지를 개척하는 일꾼이 돼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박영희로부터 자기가 추천하여 소파 방정환과 내가 동인으로 가입하는 것이 확정되었으니 빨리 승낙서를 보내달라고 편지가 왔다. (중략) 그 때 나와 함께 『백조』 동인으로 참가한 소파 방정환은 메지로(目白)에서 자취 생활을 하며 '도오요'(東洋) 대학에 다녔고 그의 집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는 윤극영(尹克榮), 정순철(鄭順哲), 최호영(崔虎永) 등 음악 전공하는 친구들이 자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몇 번 놀러갔었고 모두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중략) 소파는 그때부터 소년문학과 어린이 운동을 열심히 주장하였던 것이다. (김기진, 「편편야화」, 『동아일보』, 1974. 5. 17∼7. 5;홍정선 (편), 『김팔봉 문학 전집』 (Ⅱ), 문학과지성사, 1988, 344쪽에서 재인용)
   이 무렵 김기진은 사회주의 사상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백조』의 주요 구성원들이 『백조』 붕괴 이후 신경향파 문학 단체인 파스큘라(PASKYULA)를 결성하고, 염군사와 함께 카프를 성립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파스큘라 구성원은 박영희, 김기진, 김복진(金復鎭), 김형원(金炯元), 이익상(李益相), 연학년(延學年), 안석주(安碩株), 이상화(李相和) 등이다. 김기진의 회고에 따르면 파스큘라의 결성에 석송(石松) 김형원과 성해(星海) 이익상의 역할이 컸다고 하는데, 방정환과 관련해서도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파스큘라가 결성되기에는 석송 김형원과 성해 이익상 두 친구의 입김이 많이 작용했다. 1923년 여름 나는 토월회 제1회 공연 준비를 위해 서울에 먼저 와 있다가 개벽사에서 소파 방정환의 소개로 석송과 성해를 따로따로 인사해서 알게 되었다. (김기진, 「문단 교류기―나와 '카프' 문학 시대」, 『대한일보』, 1969. 6. 12, 17, 19, 24, 7. 3;홍정선 (편), 같은 책, 531쪽에서 재인용)
   석송 김형원은 미국의 시인 W. 휘트먼의 민주주의 시론을 수용하면서 신경향파 시론의 형성에 이바지한 시인이다. 그가 주창한 '힘의 시' 이론은 월탄을 거쳐 팔봉에 이르면서 초기 신경향파 시론의 중심 사상으로 수용된다. (한계전, 「석송 김형원의 시와 시론」, 『한국현대시론연구』, 일지사, 1983, 85쪽) 더욱 흥미로운 것은 석송 김형원이 천도교인이라는 사실이다. 석송은 『개벽』(1920. 12)에 「이향」(離鄕)이라는 시를 발표하는데, 작품 끝에 "六一. 一一. 一一, 金石松 作"이라고 천도교 연호를 사용해 창작 시기를 밝혔다. 천도교인임을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방정환과 김형원은 같은 천도교인으로서 방정환이 『개벽』에 관여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성해 이익상은 니혼 대학 사회과에 재학 중이던 1921년에 최초의 재일본 한국인 사회주의 단체―무정부주의와 맑스주의의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초기의 연합 조직―인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했다. 그는 「예술적 양심이 결여한 우리 문단」과 「빙허군의 「빈처」와 목성군의 「그날밤」을 읽은 인상」을 『개벽』(1921. 5)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필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개벽』의 도쿄 특파원이었던 방정환이 이익상과 교류했으리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게다가 방정환의 소설 「그날밤」을 평하는 글로 문단에 등단했던 것으로 보아 서로 잘 알고 지냈을 것이다. 이익상은 창작 동화 개척기에 『어린이』를 통해서 여러 편의 아동문학을 발표하는데, 도쿄 유학 시절 방정환과 맺은 인연이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천도교에서 발행한 종합잡지 『개벽』이 신경향파 문학의 주무대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파스큘라의 결성과 관련해 김기진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보면 발표 지면을 제공했던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몇 차례 그(석송 김형원―인용자)와 만났을 때 그는 성해와 함께 『백조』 동인들 중에서 뜻이 통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문학 연구를 하는 새로운 단체(파스큘라―인용자)를 하나 만들자고 주장했다. 개벽사의 김기전 주간도 소파와 함께 그런 뜻에 찬성하였다. (김기진, 「문단 교류기―나와 '카프' 문학 시대」, 『대한일보』, 1969. 6. 12, 17, 19, 24, 7. 3;홍정선 (편), 같은 책, 532쪽에서 재인용)
   1923년 5, 6월 쯤 방정환은 도쿄에서 돌아온 김기진에게 『개벽』에 실을 글을 청탁한다. 이에 김기진은 「프로므나드 상티망탈」(Promenade Sentimental)을 『개벽』(1923. 7)에 처음 싣는다. (김기진, 「나의 회고록―초창기에 참가한 늦동이」, 『세대』, 1964. 7∼1966. 1;홍정선 (편), 같은 책, 186쪽) 이를 계기로 김기진은 『개벽』에 자주 글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방정환과 김기진이 함께 『백조』의 후기 동인으로 가입했던 것도 단순한 친분을 넘어서 문학·사상적으로 공유하는 바가 컸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방정환과 김기진이 박영희의 추천으로 『백조』의 후기 동인으로 가입했던 것을 보면 방정환과 박영희의 친분 관계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박영희는 1924년 4월 당시 『개벽』의 편집자였던 방정환의 주선으로 개벽사에 입사하였다. (손해익, 『박영희의 문학 연구』, 시문학사, 1994, 58쪽) 개벽사에 입사할 무렵의 박영희는 이미 『백조』의 붕괴와 파스큘라 결성을 계기로 사회주의 사상으로 급속히 기울어진 뒤였다. 그는 현철의 후임으로 개벽사에 입사해서 학예부장으로 문예란을 책임지면서 신경향파 문학을 자주 실었다. 그리고 계급문학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계급문학 시비론」(『개벽』, 1925. 2)을 기획하기도 했다. 이처럼 방정환은 신경향파 문학의 두 기수인 김기진과 박영희를 『개벽』에 끌어들이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방정환은 신경향파 문학의 흐름을 『어린이』에도 자연스럽게 수용했다. 실제로 박영희, 김기진을 비롯해 성해 이익상은 물론이고 이후 『별나라』 동인이 되어 방정환을 비판하기에 이른 송영과 박세영, 신고송 등도 『어린이』를 무대로 활동했다. 급기야 방정환은 송영의 「쫓겨가신 선생님」(『어린이』, 1928. 1)을 실은 것이 문제가 되어 필화 사건을 겪고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도 송영의 「가난의 싸움」(1928. 9)을 실으려다가 아예 전문 삭제를 당하고 만다. 이처럼 방정환은 일제의 거듭되는 검열에도 불구하고 계급주의 아동문학을 끊임없이 수용하려 했다.
   1925년에 이르면 정홍교(丁洪敎) 중심의 무산계급 소년운동단체 '오월회'(五月會)가 방정환 중심의 '소년운동협회'에서 독립하여 또다른 전국 규모의 소년운동단체로 발족된다. 이로 인해 소년운동계는 양분되었고 급기야 1926, 27년에는 어린이날 행사가 따로 치뤄지기까지 했다.20) 대체로 이를 민족주의 소년운동단체와 계급주의 소년운동단체의 갈등·분열이라고 한다. 또 '사회주의에 대립한 민족주의자 방정환'이라는 지금까지의 일반 통념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방정환은 계급주의 아동문학가들의 작품을 『어린이』에 계속해서 수용했다. 더욱이 그 자신은 '길동무'라는 필명으로 당시 사회주의 국가인 러시아의 소년단 활동을 소개하는 글을 『어린이』에 연재하다가 아예 삭제를 당하기도 했다.21) 방정환이 사회주의와 대립한 편협한 민족주의자였다면 이런 일에 결코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1920년대 중반 이후 노골화된 소년운동단체의 갈등·분열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여기엔 몇 가지 사정이 얽혀있다고 본다. 방정환은 사회주의 사상에 충분히 공감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1920년대 중·후반에 대두한 계급주의 소년운동과 아동문학운동이 실제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드러난 심각한 관념성 및 운동의 주체인 어린이를 소외·분열시키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던 것 같다. 특히 무산계급 소년운동을 주창하는 좌파의 견해에 대해서는 소년운동이 특정 계급을 위한 운동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22) 무엇보다도 방정환이 이 당시 계급주의 소년운동과 아동문학을 명시적으로 비판한 자료가 전혀 없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와 함께 방정환이 천도교란 종교에 바탕을 둔 사회운동가였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1920년대 초반의 천도교는 정치·사상적으로 좌파적 경향을 강하게 드러냈지만, 좌파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세력을 확산해가는 중반 이후에는 오히려 종교적 성격이 강화되었던 저간의 사정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천도교 구파와 신파의 갈등―이른바 제2차 분열― 과 그 과정에서 세력 확장을 위해 좌파와 합작을 시도했던 구파의 활동 강화들도 '천도교청년회'로 대표되는 신파에 속했던 방정환이 사회주의 계열과 일정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던 또다른 이유로 보인다. 물론 이 부분은 좀더 정밀하게 검토되어야 하겠지만, 적어도 당시 소년운동계의 갈등과 대립을 곧바로 '사회주의자와 대립한 민족주의자 방정환'이라는 식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4. 맺음말 

지금까지 한국 근대아동문학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어느 경우든 방정환의 한쪽 측면만을 과장하거나 왜곡해왔다고 할 수 있다. 역사의 무대 위로 어린이를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방정환이 강조했던 '동심'은 우파에 의해서 '현실을 떠난 순수한 어린이'란 의미로 변질되었다. 식민 지배와 봉건적 질곡이란 이중의 억압 속에서 방정환이 새롭게 발견해낸 어린이, 그 어린이에 대한 찬미나 '동심'의 옹호가 지닌 역사적 본질은 외면한 채, 방정환을 자기 변호를 위한 방패막이로 삼아온 것이다. 좌파 역시 우파와의 대립 속에서 방정환을 서둘러 반대파로 규정·격하하면서 거꾸로 자기 입지를 좁히는 모순을 낳았다. 비판적으로 계승해야 할 점들까지도 섣불리 청산하려는 과격한 조급성을 보임으로써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더 많았던 셈이다. 이처럼 어떤 정치적 견해를 막론하고 방정환의 전체상을 객관적으로 조명하는 데에는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했을 뿐이다. 이제 좀더 진지하고 깊이 있는 성찰을 통해 한국 근대아동문학사의 핵심이라 할 방정환과 그의 사상 및 문학을 꿰뚫는 명쾌한 시선을 확보해야 할 때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객관적인 접근과 작품에 대한 정밀한 해석 및 비판에 힘을 쏟을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방정환을 사회주의와 대립한 좁은 범위의 민족주의자로 바라보는 편협하고 경직된 기존의 논리를 비판적으로 재고해보았다. 이는 방정환이 남긴 다양한 형태의 글과 어린이 문화운동의 실천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거니와, 사회주의자들까지 아우르는 그의 교우관계로도 알 수 있었다. 또한 방정환이 천도교(동학)의 근대 민족·민중사상에 튼실한 뿌리를 두고 활동했다는 점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앞서 밝혔듯이 방정환의 전모 가운데 은폐되었거나 왜곡된 부분을 새롭게 조명하고, 그 은폐와 왜곡의 원인을 밝히는 일은 현 시점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방정환 연구는 곧 한국 근대아동문학의 기본 성격을 규명하는 일과도 통하기 때문이다. 근대에 대한 맹목적 추종도, 근대에 대한 낭만적 부정도 온당치 못함이 자명해진 현실에서 우리는 일면으로는 근대를 성취하면서 일면으로는 근대의 부정성을 극복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런 점에서 방정환은 근대 아동문학이 당면했던 이중의 과제 속에서 어느 한 쪽에 편향되기보다는 그 양자의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아동문학과 어린이 문화운동을 전개하려 했던 인물이었다. 물론 이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앞으로 좀더 비판적으로 검토·보완되어야 할 연구 과제이기도 하다. 21세기의 한국 아동문학은 북한의 아동문학사는 물론이고, 이재철의 『한국 현대 아동문학사』나 이재복의 『우리 동화 바로 읽기』 같은 기존의 시각들을 새롭게 재평가해야 한다. 새롭게 쓰여져야 할 한국근현대아동문학사가 새롭게 다시 쓰는 방정환론으로부터 출발해야 함은 너무도 분명하다. 방정환 연구는 그 자체로서 뿐만 아니라 남북한의 분단 구조 속에서 한국 근대아동문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그 성격과 문제점을 규명하여 새로운 세기의 아동문학이 나아갈 길을 모색하기 위한 하나의 밑그림으로써 그 의미를 지닐 것이다.- 이 글은 1999년 5월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주최로 열린 "방정환 탄생 10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의 발표문을 고친 것이다.▣(이 글은 《아침햇살》2000년 봄 호에 실린 글입니다.글쓴이 염희경 님은 우리회 자료 회원이며 겨레아동문학연구회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1) 이재철은 '『어린이』지와 그 민족주의적 경향', '『별나라』의 투쟁적 계급주의적 경향'이라는 설명 방식으로 방정환을 사회주의에 대립한 민족주의자로, 또한 방정환 문학의 특성을 '동심천사주의'로 파악하고 있다. 이재철, 『한국 현대 아동문학사』 (일지사, 1978) 한편, 이재복은 카프의 방정환 비판―현실을 떠난 어린이―을 그대로 수용하여 방정환의 문학을 '눈물주의', '영웅주의', '동심천사주의'라고 비판한다. 이재복, 『우리 동화 바로 읽기』 (한길사, 1995) 이처럼 두 논자는 카프 계열의 방정환 비판(동심천사주의)을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방정환=민족주의 ↔ 카프=사회주의(계급주의)"라는 대립의 도식을 문학사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2) 원종찬, 「한국 아동문학이 창조한 주인공―근대 아동문학사 연구의 반성」 (『창작과 비평』 103, 1999년 봄호)
  3) 졸고, 「방정환 번안 동화의 아동문학사적인 의미」 (『아침햇살』 17, 1999년 봄호)
  4) 오스카 와일드와 영국의 사회주의 사상과의 관련은, J. F. C. 해리슨, 『영국 민중사』 (이영석 (역), 소나무, 1987)와 K. O. 모건, 『옥스포드 영국사』 (영국사연구회 (역), 한울아카데미)를 볼 것. 『영국 민중사』(331쪽)에서는 당시 영국의 사회주의 당파들로 사회민주연맹, 사회주의자동맹, 페비언 협회, 기독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프리덤 클럽, 독립노동당, 클래리온 협회와 그밖의 지방 단체들을 들고 있다. 『옥스포드 영국사』(548쪽)에서는 영국의 사회주의적 경향에 영향을 준 주요 인물로 존 러스킨, 윌리암 모리스, 라파엘 전파 동인과 함께 1880∼90년대의 유미주의자들 가운데 특히 오스카 와일드를 거론하고 있다.
  5) 박화목, 「오스카 와일드 동화 연구」 (한국아동문학연구소, 『아동문학연구』 1집, 1984)
  6) 본고에서 원문을 인용하는 경우 현재의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맞게 고쳤으며,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굵은 글꼴은 인용자의 강조이다.
  7) 서대숙,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연구』 (현대사연구회 (역), 이론과실천사, 1985) 72쪽
  8) 참고할 만한 대표적인 방정환 연보는 다음과 같다.   
이재철, 「소파 선생 이야기:연보편」, (『방정환 문학 전집』 (10), 문음사, 1981)   
신인간 편집실, 「소파 방정환 선생 연보」 (『신인간』 389, 신인간사, 1986.4)    
안경식, 「소파 방정환 선생 연보」 (『소파 방정환의 아동교육 운동과 사상』, 학지사, 1994)
그런데, 필자가 이 글을 발표할 무렵 일본의 한 연구자에 의해 이 사실이 확인되었다. 나까무라 오사무(仲村 修), 「方定煥 硏究 序論―東京 時代を 中心に」 (『靑丘學術論集 14, 1999년 4월) 이 논문의 일부가 최근 국내에도 소개되었다. (양미화 (역), 『어린이문학』 18, 2000년 4월호)
   9) 양근환의 민원식 암살 사건은 『동아일보』 (1921. 3. 2)를 볼 것. 또 양근환과 민원식에 대해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을 볼 것.
  10) 1920년 6월 7일과 6월 13일 『동아일보』에 방정환이 「팔일삼」을 강연했다는 기사가 있다. 또한 6월 26일 『동아일보』에는 '보성회 문예부장 방정환'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11) ㅅㅎ생, 「우유배달부」 (『청춘』 13, 1918. 4):ㅈㅎ생, 「고학생」 (『유심』 3, 1918.   12) 'ㅅㅎ생'과 'ㅈㅎ생'은 모두 방정환의 필명이다. 둘 다 주소가 '시내 견지동 118'로 되어 있는데, 같은 잡지에 '방정환' 또는 '소파생'이란 필명으로 보내어 뽑힌 글들도 이 주소로 되어 있다.또 일본의 도요(東洋) 대학 학적부에도 방정환의 본적이 '조선 경성 견지동 118'로 기입되어 있다. 학적부의 본적 확인은 나까무라 오사무, 「방정환 연구 서론」 (양미화 (역), 『어린이문학』 18, 2000년 4월호) 92쪽을 볼 것.
  12) 목성, 「유범」(流帆) (『개벽』 1, 1920. 6):목성, 「그날밤」 (『개벽』 6∼8, 1920. 12∼1921. 2)
  13) 강만길·성대경, 『한국 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 (창작과비평사, 1996) 127쪽
  14) 연보에 따르면 방정환은 1918년 마해송(馬海松), 이일범(李一範), 류광열(柳光烈)과 최초의 영화 잡지 『녹성』(綠星)을 발간했고, 1918년 12월 비밀 결사 조직 '청년구락부'(靑年俱樂部)의 망년회에서 자작 각본의 소인극 "동원령"(動員令)을 연출·주연했다고 한다. 신인간 편집실, 「소파 방정환 선생 연보」 (『신인간』 389, 신인간사, 1986. 4) 그러나 영화 잡지 『녹성』은 대정 8년(1919년) 12월에 창간호를 발행했다. 또 편집 겸 발행인은 이일해(李一海)이고 발행소는 녹성사(일본 동경)로 되어 있다. 그런데 사고(社告)를 보면, 문의 사항과 잡지 주문 등은 동경이 아닌 경성 녹성사로 하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방정환은 일본 유학을 떠나기 전인 1919년 경성에 있으면서 『녹성』 발간에 관여한 듯하다.
  15) 서연호, 『한국 근대 희곡사』 (고려대 출판부, 1994) 110∼112쪽을 볼 것. 『동아일보』 (1921. 7. 30)는 당시 상연된 「김영일의 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김영일의 죽음」은 동경에 가서 공부하는 고학생의 생활을 공개하여 크게 환영을 받고 제2장의 빈부 학생 충돌은 현금 사회를 통하여 공명되는 기분이므로 그 순간은 배우나 관객이나 같은 기분에 부지중에 손에서 울려나오는 박수 소리는 갈채를 의미하는 것보다 행동이 일치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한편, 유민영은 「김영일의 사」가 포석의 자전적 수필 「느껴본 일 몇 가지」(『개벽』, 1926. 6)에서 보이는 것처럼 새로운 사회주의에 대한 흥분과 막연한 빅토르 위고적인 인도주의라는 사상적 발상에서 씌어진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유민영, 『한국근대연극사』 (단국대 출판부, 1996) 523쪽
  16) 1920년 9월 중순부터 1921년 3월까지 철학과 '특별청강생' (학급에 구애되지 않고 임의로 학과를 청강할 수 있는 학생)이었으며, 1921년 4월 9일부터 이듬해 3월 30일까지는 전문학부 문화학과 '청강생'(학급을 정하고 청강하는 보통 청강생)이었다. 나까무라 오사무, 앞의 글 참고할 것.
  17) 고한승은 방정환이 도요 대학에 정식 입학했던 때와 같은 학기인 1921년 4월 12일부터 같은 해 9월 30일까지 한 학기 동안 도요 대학 문화학과 청강생으로 다녔다. (나까무라 오사무의 도요 대학 학적부 조사 참고함.)    
『색동회 어린이 운동사』(정인섭, 앞의 책, 427쪽)의 부록에는 진장섭이 대필한 고한승 이력서가 있는데, 여기엔 고한승이 "1921년∼1923년 일본대학 예술과 수업"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을 보아 고한승은 한 학기 동안 도요대학 문화학과 청강생으로 있다가 그만 두고 니혼 대학에 다닌 것으로 보인다.
  18) 진장섭, 「산구(山口)서 송도(松都)까지」 (『여광』(麗光) 2, 1919);정인섭, 앞의 책 35쪽을 볼 것.
  19) 「육호잡기」(六號雜記) (『백조』 3, 1923. 9), 홍사용, 「백조 시대에 남긴 여화」 (『한국문단측면사』, 깊은샘, 1983) 김기진, 『김팔봉 문학 전집』 (Ⅱ) (홍정선 (편), 문학과지성사, 1988)
  20) 소년운동사에 대해서는 김정의, 『한국 소년 운동사』 (민족문화사, 1992)를 볼 것.
  21) 길동무, 「봄철을 맞는 "어린이 공화국"」 (『어린이』, 1926. 4):「소년 탐험군 이야기」 (『어린이』, 1926. 6∼7) 방정환은 「소년 탐험군 이야기」에 이어 '일기자'란 필명으로 「로서아 삐오네르」 (『어린이』, 1927. 1)를 썼는데, 이 기사는 아예 삭제되었다.
  22) 안경식, 『소파 방정환의 아동교육 운동과 사상』 (학지사, 1994) 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