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는 유산소 운동을 즐겨해서 꽤 균형잡힌 몸매였다.
그러나 20대 초반에 화교 출신 한국인들 3명에게 집단 폭행을 당했다.
그 후 뇌출혈, 안면마비, 언어 소실, 반신 마비, 시력 손실 등 매우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나는 대학에서 과탑을 하고 있었고, 미래가 어느정도 보장된 학생이었다.
내가 이렇게 폭행으로 많은 능력을 잃자.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사회적 약자를 괴롭히고, 조롱거리로 삼는지 알게되었다.
나는 그런 대우를 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하기 보다는
사회적 약자들이 힘을 가질 수 있도록 공교육을 효율적으로 제공하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폭행 이후 나는 간단한 산수를 할 때마다
트럭에 치인 것 같은 두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버티면서 했다. 아프다고 회피한다면 나는 거기서 끝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공계였던 나에게 이러한 고통은 큰 장애였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고, 두통이 심한 좌뇌대신
그림을 그리는 듯한 우뇌를 주로 사용하여 계산작업을 형상화하였고,
그 형상화 된 대상들을 사용해서 직접 시뮬레이션을 돌리듯 계산을 했다.
그리고 나는 고기, 단백질, 지방 등 두뇌 발달에 도움이 되는 음식들을 먹었다.
또 MRI 를 찍고나면 머리의 두통이 완전히 사라진 적이 많았다.
MRI는 비싸지만 두통을 해결하기 위해 주기적을 촬영했다.
신기하게도 두통은 MRI 를 찍고나면 당분간 없어졌다.
폭행 후 한가지 치명적인 것은
온몸의 체온이 2도 이상 낮아졌단 것이다.
원래는 36 - 37도의 체온을 유지하던 나의 몸은 34도에 멈춰있었고.
온몸이 춥고, 살이 쉽게 찌는 체질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도 나는 운동을 계속하면서
두뇌 발달에 좋은 음식들을 계속 찾아 먹었다.
지금은 회복했지만,
이 회복하는 과정에서 당했던 모든 고통들은 아직 잊지 못한다.
육체적인 고통도 상당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인간관계의 사회적 약자 입장에서 겪은 고통이었다.
몸이 완전히 회복된 지금도 나는 여전히
상류층의 단어를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단어들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차별적인지 알기 때문이다.
나의 단어는 항상 직진이다.
누구나 바로 알아들을 수 있게 표현한다.
항상 여러번 설명한다.
이것이 내가 말할 때 원칙이다.
내가 평소에 쉽게 사용하는 말들도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어려울 수 있으며, 차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엘리트 집안에서
모든 것을 갖고 태어났지만.
폭행으로 인해 수년간 장애를 경험했다.
그 장애를 경험하는 동안 남았던 사람은.
평소에 내가 약간은 무시한 사회적 약자의 사람들이었다.
사회적 약자들은 약자의 고통을 알기 때문에 서로를 어느정도 배려했다.
이것이 내가 그냥 공부만 한 사람들한테 느껴지는 괴리감이다.
그들은 고통을 모른다.
그렇다고 고통에 대해 알려줄 이유는 없지만.
나는 나 자신대로 내가 느낀 경험에 의한 신념을 수행한다.
그 과정에서 내가 하층민 같다는 편견은 없애기 어렵다.
하지만 그것은 하층민이 아니라, 바로 인간이 가진 본질적인 순수함이라고 생각한다.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글이 정리된 글이 아니어서 이해가 어려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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