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ews.v.daum.net/v/20160607215400227
경향신문] ㆍ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인문·사회과학에서 어떤 학문이든 기본을 이루는 것은 철학적 접근과 역사적 접근이다.
철학적 접근이 연구 대상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제공한다면, 역사적 접근은 그 변화에 대한 분석을 제공한다. 근대 이후 역사학을 포함한 사회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두 분석 대상은 시장과 국가,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였다. 경제적 자본주의와 정치·사회적 민주주의는 모더니티를 이루는 양대 기둥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러한 자본주의의 역사를 설명하고 분석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역사학 저작을 꼽는다면, 그것은 프랑스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1902~1985)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원제: 물질문명, 경제, 자본주의, 15~18세기, Civilisation materielle, economie et capitalisme, XVe-XVIIIe siecle, 1979)일 것이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첫째, 브로델이 사건·국면·구조의 다층적 시각에서 시도한 역사적 분석은 산업혁명 이전 근대 초기 문명의 역사적 실체에 가깝게 다가서게 했다. 둘째, 브로델이 제시한 장기지속의 역사학은 마르크스와 베버로 대표돼온 국민국가적 접근을 지구적 접근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세계체제론은 물론 세계화 담론에 작지 않은 영감과 통찰을 안겨줬다.
브로델은 전후 역사학계에서 새로운 흐름을 주도한 프랑스 아날학파의 제2세대를 대표하는 역사학자다. 뤼시앵 페브르와 마르크 블로크가 창시한 아날학파는 정치보다 사회, 개인보다 집단, 연대보다 구조를 역사 인식의 중심으로 삼았다.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주목했다는 점에서 아래부터의 역사를, 장기지속의 시간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장구한 변동의 역사를 밝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브로델의 <필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와 지중해 세계>(1949)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아날학파의 성취를 보여주는 표준적인 저작들이다.
■장기지속의 역사학
브로델 역사학의 독창성은 시간과 공간의 새로운 해석에서 찾을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시간은 사회적 창조물이다. 그는 사회적 시간을 시간 지속의 길이와 측정 대상에 따라 단기지속(사건), 중기지속(국면), 장기지속(구조)으로 구별하고, 여기에 사건사·사회사·구조사를 대응시켰다. 이 세 차원의 시간 가운데 중심축은 장기지속이다. 장기지속은 지리 또는 문화 영역에서의 구조와 같이 매우 더디게 진행하는, 중기지속과 단기지속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시간의 역사를 함의한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 앞서 발표한 <필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와 지중해 세계>는 브로델의 존재를 널리 알린 저작이다. 그는 지리와 기후라는 거의 변화하지 않는 구조, 다시 말해 거의 움직이지 않는 역사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해 이 구조 위에 존재하는 사회집단의 다양한 생활들을 기술하고, 이 생활의 토대 위에서 진행된 사건과 정치와 인물들을 서술했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세 권으로 이뤄져 있다. 제1권 ‘일상생활의 구조’는 1967년에 출간됐고, 1979년에 제2권 ‘교환의 세계’와 제3권 ‘세계의 시간’이 동시에 나옴으로써 완간됐다. 우리말 번역본이 2800쪽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이다. 이 책의 기본 내용은 15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는 초기 근대에 대한 세계사적 분석이다. 그는 역사를 ‘3층집’으로 파악했다. 1층이 장기지속에 해당하는 ‘물질문명’이라면, 2층과 3층은 이 물질문명의 구조 위에 놓인 ‘경제’와 ‘자본주의’다. 브로델에게 근대 자본주의는 물질문명과 시장경제의 기반 위에 진행된 원거리 교역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브로델이 겨냥한 것은 근대 초기 문명에 대한 전체사였다. 산업혁명 이전에 자본주의가 이미 지구적 수준에서 성장하고 발전함으로써 세계경제를 활성화시켰다는 그의 분석과 통찰은 역사학 및 사회과학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브로델과 세계화 시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프랑스 안팎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브로델은 15~18세기 근대 문명의 전체사를 서술함으로써 세계사 기술의 새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됐다. 특히 일상생활의 역사에 대한 그의 탐구에는 아날학파의 장점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으로 고평(高評)됐다. 이러한 브로델의 연구는 아날학파 제3세대인 에마뉘엘 르루아 라뒤리, 조르주 뒤비, 자크 르고프 등에게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 나아가 브로델의 이론적 착상과 역사적 분석은 미국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의 기본틀을 제공했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20세기 프랑스 역사가들>의 ‘페르낭 브로델’ 부분을 집필한 미국의 역사학자 에릭 더스텔러에 따르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빈약한 이론, 부정확한 자본주의 개념, 유럽중심주의라는 문제점을 갖는다는 비판들이 이뤄졌다. 하지만 이런 지적들이 이 책이 이룬 성취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놀라운 저작을 통해 우리는 15~18세기 세계사회의 구조와 국면과 사건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됐다.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이중의 의미를 안겨준다. 근대 문명이 일상에서 구조까지 정치·경제·문화를 포괄하는 전체로서 존재한다는 게 그 하나라면, 일국적 차원을 넘어선 교환과 교류가 근대 문명이 갖는 주목할 특징이라는 게 다른 하나다. 이러한 브로델의 발견과 통찰은 세계화의 역사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세계화 시대 학제 간 연구의 중요성을 계몽한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21세기에도 읽어야 할 20세기 고전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한국어판 저작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전 3권은 주경철 서울대 교수에 의해 우리말로 꼼꼼하고 유려하게 옮겨졌다. 입문서로는 브로델의 강연을 번역가 김홍식이 우리말로 옮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히드라 이야기>가 유용하다. 김응종 충남대 교수의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브로델 역사학을 이해하는 데 훌륭한 안내서다.
■브로델의 후학들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생각하면 동시에 떠오르는 학자들은 세 사람이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에마뉘엘 르루아 라뒤리, 미국의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 그리고 역사학자 주경철이다. 브로델 역사학을 잇는 아날학파 제3세대인 라뒤리는 1967년부터 잡지 ‘아날’ 편집에 참여했고, 1973년 브로델의 뒤를 이어 콜레주 드 프랑스의 근대문명사 교수를 맡았다. 그의 대표작인 <랑그도크의 농민들>(1969)과 <몽타이유>(1975)는 우리말로 옮겨져 있다.
<랑그도크의 농민들>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다. 이 책은 15세기 말부터 18세기 초까지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 지방의 토지세 대장과 십일조 기록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농업의 성장 및 쇠퇴 주기를 기술한 탁월한 저작이다. 이 책의 결론으로 제시되는 랑그도크의 역사인 ‘움직이지 않는 역사’는 그의 콜레주 드 프랑스 취임 강연의 주제가 됐다.
월러스틴은 브로델의 이론과 분석에 기반을 둔 세계체제론을 발표해 브로델 역사학을 세계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자신이 가르쳤던 뉴욕주립대(빙엄턴)에 ‘경제, 역사 체제, 문명을 위한 페르낭 브로델 센터’를 세우기도 했다(월러스틴의 사회이론에 대해선 이 기획에서 <근대 세계체제 1>(1974)을 중심으로 따로 다룰 예정이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우리말로 옮긴 주경철은 국내 서양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온 역사학자다. 그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서양사학을 공부한 뒤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발표한 일련의 책들은 전문가가 가져야 할 깊이와 대중들이 가질 수 있는 흥미를 겸비한 저작들로 평가됐다. <대항해 시대>(2008)는 이러한 그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저작이다. 그는 농경사회 중심의 시각과 서구 중심의 시각을 넘어서 해상 팽창이 지구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명암의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지구적 근대 문명의 등장을 설득력 높게 분석했다. 최근 그는 <마녀>(2016)를 발표해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다. 근대 문명이 그 이면에 마녀사냥이라는 야만의 심연을 숨겨왔다는 그의 분석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는 물론 권력의 작동방식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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