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러정상회담과 유라시아 '체스판'의 요동
[강진욱 단상] 미국 유라시아전략의 한 축에 큰 균열

https://saramilbo.com/22323#


기사입력: 2024/06/21 [12:18]


미국의 외교책사 브레진스키는 1997년 낸 <거대한 체스판(Great Chessboard, 2000년 번역 출간)>에서 유라시아 대륙을 ‘미국이 유일 패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싸움을 계속하는 체스판’에 비유했다. 

 

러시아가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유라시아 대륙을 공략하기 위해 미국은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한반도 이남에 진주한 주한미군의 영향력을 높이면서 미-일-한 3국의 대러 적대동맹체를 굳건히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체스판론’의 요지다. 

 

놀랍게도, 1979년 미국 카터 정권이 아프가니스탄의 친소 정권을 전복시켜 소련군의 진주를 유도한 이후 지금까지 40여 년간의 미국의 대외전략은 그의 ‘체스판론’을 따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일 유라시아 중앙부가 미국이 우월한 힘을 행사하는 서쪽의 팽창 궤도 안으로 끌려들어 간다면, 만일 남부지역이 단일한 국가의 지배에 복속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만일 동쪽이 미국을 몰아내는 방향으로 단결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우세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이하 브레진스키 책 번역본 56쪽)

 

그의 바람대로, 얼마 전까지는 미국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우세를 점했었다. 브레진스키가 예언했던 미국의 동북아시아 남아시아 전략은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 

 

[유라시아의 서쪽 주변부에는 미국의 힘이 직접적으로 미치고 ... 극동지역은 점차 막강해지면서 독립적으로 되어 가는 게임 참가자가 막대한 인구를 장악하고 ... 주변 열도지역에 위치한 경쟁재와 극동의 조그만 반도 반쪽이 미국의 힘이 내려앉을 수 있는 횃대를 제공해 주고 ... 남쪽에는 정치적으로 무정부 상태지만 매우 풍부한 에너지 자원을 가지고 ... 남단에는 지역적 패권을 추구하는 인구 대국이 자리하고 ... ](55~56쪽)

 

2022년 2월말 러시아의 특별군사작전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도 브레진스키 체스판의 한 수였다. 

 

[우크라이나는 유라시아 체스판 위에 새로이 형성된 공간으로서 지정학적 주축이라 할 만하다. 우크라이나의 존재 자체가 러시아를 변화시키는 데 기여하기 때문 ...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없이 유라시아의 제국이 될 수 없다. ... 만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배력을 회복하게 되면, 5천200만명의 인구와 주요한 지하자원, 더불어 흑해로 통하는 길을 확보하게 됨으로써, 다시금 유럽에서 아시아에 이르는 제국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70쪽)

 

브레진스키의 책이 나올 때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이빨이 몽땅 빠진 늙은 사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의 러시아는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진을 막기 위해 우크라 동부지역을 선점해 버릴 정도로 강대해졌다. 미국이 유라시아 대륙을 공략할 서쪽 교두보가 무너졌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브릭스’와 아프리카 ‘저항의 축’까지 나서 미국 등 ‘집단 서방(collective west)’의 패권적 질서를 와해시키고 있다. (*브릭스는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신흥경제 5국, 아프리카 저항의 축은 기니, 말리, 부르키나파소, 니제르, 세네갈 등 자주권 회복에 나선 반제자주 국가들을 가리키는 말.) 이미 브레진스키가 염려했던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잠재적으로 가장 위험한 시나리오는 중국, 러시아 그리고 아마도 이란이 합세한 거대한 동맹이 형성되는 것 ... 이것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통합된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불만감에 의해 통합된 ‘반패권’ 동맹이다. ... (미국이) 이를 회피하기 위해서는 유라시아의 서쪽과 동쪽, 그리고 남쪽에서 동시적으로 미국이 지정전략적 기술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81쪽)

 

사실 브레진스키의 유라시아 전략의 결정적 오류는 극동정세에 대한 오판(또는 의도적 무시)에 있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이후 날로 강화돼 온 미-일-한 3국 동맹체가 러시아와 중국은 물론 조선을 주 대상으로 겨냥해 온 사실을 간과하고, 조선을 미미한 종속변수로만 취급했다. 

 

그가 “극동지역의 지정학적 주축”(72쪽)이라 했던 한반도 이남(한국)은 미국만 추종하며 새로 형성된 ‘북방 정세’를 아예 무시하고 있고, 그가 곧 붕괴해 이남에 통합될 것으로 봤던 이북(조선)은 러시아 및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여차하면 이남을 점령.평정.복속해 버리겠다고 호언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북을 계기로 조러가  굳건한 동맹관계를 재확인한 것은 미국 유라시아전략의 한 축에 큰 균열이 생긴 것과 같다. 집단 서방이 가담한 우크라전에서 승기를 굳힌 데 이어 쿠바에 핵잠수함을 보내는 등 미국의 일극 패권주의에 정면으로 맞서는 러시아가, 새로운 핵전략으로 미국이 움켜쥐고 있는 정전체제를 깨뜨리는 조선과 손을 맞잡은 것이다.

 

조선과 러시아의 제휴는 한때 미국의 대북제재에 동조했던 러시아가 조선이 추동하는 반미 전선에 편승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심장하다. 사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 치고 들어오는 집단서방의 동진을 막은 것은, 이미 핵무력 완성을 공언한 조선이 유라시아 대륙 동쪽에서 미국의 기세를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성사된 조러 동맹은 멀지 않은 시기에 한반도에서 그 효력을 발휘할 개연성이 매우 높다.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을 양대 축으로 하는 미-일-한 3국 동맹체가 서서히 해체의 수순을 밟을 수 있다. 동북아 친미동맹체의 해체가 어떤 양상으로 귀결될지는 예단하기 어렵지만, 브레진스키는 일찌감치 남북의 재통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한국이 미국과 맺고 있는 밀접한 관계는 미군이 일본에 대규모로 주둔하지 않고서도 일본을 보호(하고) ... 일본이 독립적인 군사강국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고 ... (한반도의) 통일 ... 등으로 한국의 지위가 변화하면, 극동에서 미국의 지위 역시 크게 변화 ... 일본의 지위도 크게 변화할 것 ... 한국의 증대된 경제력으로 인해 한국은 어느때보다도 중요한 ‘공간’이 되었고, 한국에 대한 통제는 더욱 값진 것이 되었다.](72쪽)

 

미국은 남북의 통일을 막기 위해 지난 80년 가까운 기간 이남의 목줄을 틀어쥐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남의 증대된 경제력을 호시탐탐하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커다란 빨대를 박아 쪽쪽 단물을 빨아댔다. 

 

미국의 유라시아전략은 이미 파탄의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저들이 순순히 물러날 리 없다. 앞으로 더 강도 높게 이남 정권을 압박하며 남북 분단체제의 고삐를 죄려 할 것이다. 또 남은 단물마저 박박 긁어 먹으려 할 것이다. 

 

출범 1년 만에 미국 무기만 약 18조원어치(문재인 정부 5년간의 미국 무기 구매액 약 2조5천억원의 7배 이상)를 구매한 윤석열 정부는 미국에는 더없이 좋은 먹잇감이다. 한반도 정세 불안정을 이유로 국내 반도체, 자동차 기업 등의 미국 이전도 가속화될 수 있다. 머잖아 이 땅을 떠나게 될 주한미군 주둔비도 양껏 부풀릴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