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통령 나타나서 사진걸어놓게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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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리던 변혁의 도시 대구는 언제부터 반공과 지역주의의 첨병이 되었는가. 이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 역시 박정희라는 이름에 가닿는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반공주의에 기반한 조작 간첩 사건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대구에서 진보의 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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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는 ‘항쟁의 도시’였다. 1907년 차관 1300만원을 강제로 제공해 대한제국을 경제 속국으로 삼으려던 일제에 맞선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의 중앙로에서 시작됐다. 1946년 미군정의 수탈에 맞선 10월 항쟁도 대구에서 비롯했다. 9월 노동자 파업에 이은 10월1일 시위에 대구 시민 1만여명이 모이자 경찰은 시위대를 상대로 총구를 겨눴다. 경찰에 의해 목숨을 잃은 희생자가 늘어가면서, 이들은 ‘산사람’이 되어 좌익 활동에 나섰다. 대구 팔공산의 ‘야산대’는 한국전쟁 전 좌익 빨치산 활동의 시초 가운데 하나였다. 10월 항쟁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좌·우익 대립과 보도연맹 민간인 학살로 연결된다. ‘골로 간다’는 속어는 ‘산골에 들어간 자는 죽임을 당한다’는 처절한 이 지역 항쟁의 역사에서 연유한다.
일제강점기부터 대구에 좌파들이 많았던 이유는 크게 세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먼저 협소한 농경지 탓에 대지주 계층이 형성되지 않아 일찌감치 자영농 등 자립적 경제주체들이 형성됐다는 점이다. 일제는 대지주·양반 계층을 식민지배의 하위 파트너로 삼았는데, 대구 지역은 이런 흐름에서 한발 비켜 있었던 셈이다. 윤해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는 “안동 김씨 등 서울로 올라가서 정치의 주류가 된 양반과 안동에 남아 있던 안동 김씨는 많이 다르다. 그들은 이미 중앙 정치 무대에서 제외돼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일제에 비타협적인 특성을 가졌다. 초기 사회주의자 가운데 이런 양반 출신이 굉장히 많다”고 말했다.
아 골로간다는말이 얼마안된 말이였네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되고
세상은 꾸준히 변하나봐 200년뒤 지구가 궁금하구나
@피치피(183.101) 난 사후세계를 믿으므로 우리도 무지개다리 건넌 담에 볼 수 있을거라 생각함
정작 부마항쟁은 역사에 이름만 덩그러니 남아서 사진까지 도용당하고 있고 안동은 매번 뜰때마다 국운이 기울고 있지. ㅇㅅㅇㅋ
이번 대통령도 안동인가
그러고 보니 철종 때 안동 김씨 세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