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슈뢰딩거는 “생명은 네트로피를 먹고 사는 존재이다. 즉, 생명체는 자연계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존재이며
존재하는 네트로피를 감소시키는 존재이다.” 라고 말했다.
바로 이것이 ‘엔트로피 설’로, 생명현상을 설명하는 여러 가설 중에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논리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철학자
베르그송도 이에 동의한다. 베르그송은 “생명은 엔트로피의 비탈길을 거슬러 올라간다.”라고 말했다.
http://www.artnstudy.com/sub/community/minerva.asp?clip=C&idx=166
생명이란 무엇인가? - 슈뢰딩거
http://blog.ohmynews.com/heliophoto/291943
인간학을 너머 생명학으로
http://blog.ohmynews.com/heliophoto/294399
이제 이러한 상황을 에너지의 유용성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자. 일정량의 에너지를 지닌 어떤 계가 있다고 할 때, 만일 이 계가 어느
정도 정돈된 상태3), 즉 엔트로피가 작은 상태에 있다고 하면 이 계는 좀더 무질서한 상태, 즉 엔트로피가 큰 상태로 변화하려는
경향을 지니게 되며, 우리는 이 변화 과정을 이용하여 그 에너지의 일부를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이 계가 최대
한도의 무질서한 상태에 이미 도달해 있으면 더 이상의 아무런 거시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므로 그 속에 함축된 에너지를 이끌어 내어
활용할 아무런 방법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에너지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계가 지닌 엔트로피가 얼마인가 하는
점이다. / 엔트로피와 에너지의 유용성
그런데 이 엔트로피라고 하는 것은 그 양이 많을수록 소망스럽지 않은 부정적인 성격의 것이다. 마치 부채(負債)가 많으면 많을수록
소망스럽지 않은 것과 흡사한 상황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엔트로피에 마이너스(-) 부호를 붙인 새로운 개념을 정의한다면 이것은
그 양이 많을수록 소망스러운 적극적인 의미의 개념이 될 것이다. 단지 이 때에 '네거티브 엔트로피(negative
entropy)'라는 용어가 너무 길어서 불편을 주어, 사람에 따라서는 이를 단축시켜 '네겐트로피(negentropy)'라고
명명하기도 하나 역시 좀 거추장스러운 느낌이 있다. 필자의 생각에는 기왕에 단축시키는 김에 좀더 압축시켜 '네트로피'라고 부른다면
훨씬 더 간편할 듯하다. / 엔트로피라는 신개념의 도입
"이제 '네트로피'를 '엔트로피'의 반대 부호를 가진 양으로 정의한다면 고립된 계 내에서 이것은 항상 감소만 있을 뿐 증가할 수는
없는 매우 소중한 양이 된다. 특히 이 네트로피의 중요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금세기의 뛰어난 물리학자 슈레딩거의 말 한 마디로
충분하리라고 생각된다. 슈레딩거는 그의 유명한 책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생물이란 결국 네트로피를 먹고 사는
존재4)라고 규정하고 있다. / 네트로피 개념의 중요성
그러면 이 네트로피를 증가시킬 방법은 없을까? 네트로피는 엔트로피의 반대 의미를 가지므로 계가 지닌 질서의 정도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만일 어떤 귀신 같은 요물이 하나 있어서 이 계를 구성하는 분자들의 운동 하나하나를 감지할 수 있다면, 이것이 단순히
분자 세계에서 적절한 교통 정리만 해 줌으로써 그 '질서'를 향상시킬 수 있고, 따라서 계의 네트로피를 증가시킬 수 있다.
이 요물은 흔히 '맥스웰의 요물'5)이라 불리는데, 이 요물이 이러한 작업을 해내기 위해서는 오직 분자들의 운동에 대한 '정보'와 '네트로피' 사이에는 어떤 밀접한 관계가 있으리라는 예상을 할 수 있다.
1948년에 미국의 통신 공학자 새논(Claude Shannon)은 전혀 다른 목적으로 정보의 양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다가 정보라는
것이 바로 네트로피와 똑같은 수학적 표현을 지닌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이 발견은 객관적 사물 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되는
'질서'라는 개념과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속하는 '정보'라는 개념이 사실상 동일한 하나의 개념일지도 모른다고 하는 의미
심장한 내용을 지닌다.
우리는 이제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하여 내일의 문명에 대한 하나의 암시를 얻게 된다. 우리가 만일 오늘의 문명을 '에너지
문명6)'이라고 부른다면 내일의 문명은 마땅히 '네트로피 문명'7)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힘과 변화를 상징하는 '에너지 문명'이
오늘날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지혜와 조화를 상징하는 '네트로피 문명'은 분명히 좀더 밝은 내일을 우리에게
약속해 준다. / 네트로피 문명 지향이 갖는 의미"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4&docId=50759102
마니샘 읽기자료/환경/네트로피 문명
장회익(서울대 물리학과 교수)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 유행어처럼 쓰이는 '에너지'라는 말은 학술적으로뿐만 아니라 관용적으로도 최신 용어는 아니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1790년 경에 쓴 '천국과 지옥의 결혼'속에
에너지는 몸에서 발하는,
유일한 생명.
이성은 에너지의 경계선,
그 외곽의 테두리.
에너지는 영원한 기쁨.
이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에너지라는 용어는 이미 두 세기 전에 시인의 입에까지 오르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본다면 자연 과학의 용어 가운데 그 개념에 있어서 에너지만큼이나 많은 변화를 거듭해 온 용어도 드물며 또 이것만큼이나 다양한 의미로 쓰이는 용어도 찾아보기 어렵다.
위
에 인용한 구절에서 시인 블레이크는 에너지가 '유일한 생명'이며 '영원한 기쁨'이라고 격찬하고 있다. 시인의 직관과 상상을 과학적
의미로 해석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겠지만 블레이크에게 있어서 에너지란 생명, 또는 생명력을 상징하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블레이크 뿐 아니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에너지를 이러한 의미로 상용하고 있다. 사람이 원기 왕성하거나 매우 활동적일 때 우리는
'에너지가 넘친다'든가 '에너지에 차 있다'는 표현을 쓰며, 사람이 기력을 잃을 때 우리는 '에너지가 소진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산업화 시대에 들어선 오늘날에는 에너지가 단순한 생명력이라는 의미보다도 일반적인 동력의 의미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지난 70년대에 겪은 이른바 '석유 파동'은 일명 '에너지 쇼크'라고 불리고 있으며, 오늘날 식자들 간에 떠도는 '에너지
고갈'이니 '에너지 위기'니 하는 말들도 모두 이러한 의미의 에너지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에 대한 초보적인 소양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에너지 보존의 원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흔히 열역학 제1법칙이라고도 불리는 이 원리에 따르면 자연계의
에너지는 본질적으로 창조되거나 소멸될 수 없으며, 그 절대량은 항상 일정하다는 것이다. 오직 에너지는 상황에 따라 그 형태가
바뀌거나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로 이동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만일 이것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인다면 ― 이 원리는
19세기 중엽에 확립된 이래 양자이론(量子理論), 상대성 이론(相對性 理論) 등 혁명적인 격변기를 통하여도 전혀 동요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연의 기본 원리로서 그 신빙도가 점점 확고해지고 있다 ― 에너지를 '소모'한다든가 에너지가 '고갈'된다는 것은
원리적으로 성립될 수조차 없는 말이다. 또한 에너지가 곧 '생명'이라든가 에너지가 '영원한 기쁨'이라고 찬미할 이유도 전혀 없는
것이다. 에너지는 우주 도처에 깔려 있는 것이며 많은 경우에 우리는 에너지가 너무 많아서 곤욕을 치른다. 무더운 여름에 더위를
식히느라고 고생을 하는 것이 그 하나의 예이다.
그렇다면 에너지 개념에 대한 이와 같은 혼란은 어디에서 초래된 것인가? 이것을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개념이 발전해 온 역사적 단계를 잠시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처
음에 에너지란 말은 운동하는 상태가 지닌 운동 에너지와, 또 현재 운동을 하고 있지 않더라도 곧 운동 에너지로 전환시킬 잠재
능력을 지닌 잠재(potential) 에너지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일단 어떤 물체가 이러한 에너지를 가지게 되면 이것은 다른
물체와 접촉하여 힘을 미치고 변화를 일으킬 능력이 있게 되며 이러한 의미에서 에너지는 활동과 변화의 원인이라고 생각되었다.
그
런데 19세기에 들어와서 에너지의 개념은 크게 확대되었다. 종래에 에너지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여겨졌던 열량(熱量)도 에너지의
일종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오늘날 내부 에너지라고도 불리는 이 열량은 결국 물체를 구성하는 미시 입자(微視粒子)들의 운동
에너지와 잠재 에너지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거시적 물체의 운동 에너지가 소모되어 열을 발생하는 것은 그 에너지가 소멸된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미시적 입자들의 에너지, 즉 내부 에너지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말해 줄 뿐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에너지를
함께 고려한다면 에너지의 총량이 결코 창조되거나 소모될 수 없다고 하는 에너지 보존의 원리가 성립한다.
일단 에너지의
개념이 이와 같이 확대되고 나면 이 에너지의 개념 속에는 우리에게 전혀 이용 가치가 없는 종류의 에너지, 예를 들면 낮은 온도의
물체가 지니고 있는 내부 에너지조차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단순히 '에너지'라는 사실만으로 유용하다든가
귀중하다고 인정해야 할 이유가 없게 된 반면, 여러 종류의 에너지들을 그 유용성에 따라 성격 지워 줄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제 이러한 필요성에 부응하여 등장한 중요한 새로운 개념이 곧 '엔트로피(entropy)'이다. 1864년 독일의
물리학자 클로우지우스는 그의 저서 '역학적 열이론(力學的熱理論)'에 최초로 그 수학적 정의와 함께 '엔트로피'라는 용어를
도입하였다.
그런데 아마도 자연 과학 분야를 통틀어 보더라도 이 '엔트로피' 개념만큼이나 난해하고 심오한 개념이 별로 없을
것이다. 지난 한 세기 동안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온 이 개념은 날이 갈수록 그 의미가 심화되어 가고 있으며 이제는 자연
과학의 영역을 훨씬 넘어서서 정보 이론, 지식 이론의 기본 개념으로 그 의미가 확대되고 있다.
그러면 엔트로피란 어떠한
의미를 가진 개념인가? 우선 물리학에서 이해되는 개략적인 의미를 소개하면, 엔트로피란 대체로 어떤 대상 계(系)가 가지는
'무질서의 정도'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자연계에서 발견하는 가장 보편적인 현상의 하나는 자연계의 모든 변화가 항상 무질서의
정도가 적은 상태에서 무질서의 정도가 큰 상태 쪽으로만 발생하며 그 반대 방향으로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흔히 열역학
제2법칙이라 불리는 이 기본 원리는 이제 엔트로피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간단히 표현할 수 있다. 즉, 고립된 계 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변화는 오직 그 계의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만 발생한다.
이제 이러한 상황의 유용성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자. 일정량의 에너지를 지닌 어떤 계가 있다고 할 때, 만일 이 계가 어느 정도 정돈된 상태, 즉 엔트로피가 적은 상태에 있다고
하면 이 계는 좀더 무질서한 상태로 변화 과정을 겪으며 그 에너지의 일부를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이 계가 최대
한도의 무질서한 상태에 이미 도달해 있으면 더 이상의 아무런 거시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므로 그 속에 함축된 에너지를 이끌어
활용할 아무런 방법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에너지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계가 지닌 엔트로피가 얼마인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이 엔트로피라고 하는 것은 그 양이 많을수록 소망스럽지 않은 부정적인 성격의 것이다. 마치 부채(負債)가
많으면 많을수록 소망스럽지 않은 것과 흡사한 상황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엔트로피에 마이너스(-) 부호를 붙인 새로운 개념을
정의한다면 이것은 그 양이 많을수록 소망스러운 적극적인 의미의 개념이 될 것이다. 단지 이 때에 '네거티브
엔트로피(negative entropy)'라고 명명하기도 하나 역시 좀 거추장스러운 느낌이 있다. 필자의 생각에는 기왕에
단축시키는 김에 좀더 압축시켜 '네트로피'라고 부른다면 훨씬 더 간편할 듯하다.
이제 '네트로피'를 '엔트로피'의 반대
부호를 가진 양으로 정의한다면 고립된 계 내에서 이것은 항상 감소만 할 수 있을 뿐 증가할 수는 없는 매우 소중한 양이 된다.
특히 이 네트로피의 중요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금세기의 뚜어난 물리학자 슈레딩거(Erwin Schrodinger)의 말 한 마디로
충분하리라고 생각된다. 슈레딩거는 그의 유명한 책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생물이란 결국 네트로피를 먹고 사는 존재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면 이 네트로피를 증가시킬 방법은 없을까? 네트로피는 엔트로피의 반대 의미를 가지므로 계가 지닌 질서의 정도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만일 어떤 귀신같은 요물이 하나 있어서 이 계를 구성하는 분자들의 운동 하나하나를 감지할 수 있다면,
이것이 단순히 분자 세계에서 적절한 교통 정리만 해 줌으로써 그 '질서'를 향상시킬 수 있고, 따라서 계의 네트로피를 증가시킬 수
있다. 흔히 '맥스웰의 요물'이라 불리는 이 요물이 이러한 작업을 해 내기 위해서는 오직 분자들의 운동에 대한 '정보'만이
요구되므로 사물에 대한 '정보'와 '네트로피' 사이에는 어떤 밀접한 관계가 있으리라는 예상을 할 수 있다.
지난 1948년에
미국의 통신 공학자 새논(Claude Shannon)은 전혀 다른 목적으로 '정보의 양'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다가 정보라는 것이
바로 네트로피와 똑같은 수학적 표현을 지닌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이 발견은 객관적 사물 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되는
'질서'라는 개념과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속하는 '정보'라는 개념이 사실상 동일한 하나의 개념일지도 모른다고 하는 의미
심장한 내용을 지닌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객관적 사물에 대한 학문이라고 생각되던 물리학이 우리의 지식 자체를 연구하는 정보
이론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는 점에서 학문의 새로운 차원을 암시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네트로피의 개념은 한층 심오한 새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하여 내일의 문명에 대한 하나의 암시를 얻게 된다. 우리가 만일 오늘의
문명을 '에너지 문명'이라고 부른다면 내일의 문명은 마땅히 '네트로피 문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힘과 변화를 상징하는 '에너지
문명'이 오늘날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지혜와 조화를 상징하는 '네트로피 문명'은 분명히 좀더 밝은 내일을
우리에게 약속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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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정치적으로 진보적이라고 하는 것은 식물이 위로 자라듯이 연어떼가 물을 거슬러 오르듯이 사람이 힘들게 공부를 하듯이, 사람이 힘들게 청소를 하듯이, 사람이 힘들게 운동을 하듯이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란 것은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노무현이 떨어지는 것처럼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겁니다. 자유(Freedom)의 끝은 죽음(Free from everything)입니다.
갤러리를 잘못 들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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