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을 갖고 할 만한 사업을 알아보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도정업이었다. 벼를 사다가 껍질을 벗겨 쌀을 만드는 일이었다. 
 당시 마산의 정미소 공터 곳곳에는 도정을 기다리는 볏가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마산에선 연간 수백만석의 쌀이 도정됐다. 도정료를 선불로 내고도 오랫동안 차례를 기다릴 정도로 도정 시설이 모자랐다. 이병철은 이런 현상을 간파했다. 
 이병철은 마산 시내를 두루 돌며 정미소 현황을 살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정미소는 규모가 컸지만,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정미소는 보잘 것 없었다. 게다가 도정업은 자본이 있으면 하기에는 어렵지 않아 보였다. 일단 도정기계를 쉬지 않도록 미곡을 확보하면 그만이었다. 
 마지막으로 이병철은 사업을 혼자 할 것인지, 동업으로 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이병철은 도정업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의 자본금을 모두 쏟아 붓기에는 아무래도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동업자를 찾았다. 합천 사람인 정현용과 진주 사람인 김정수와 손을 잡는다. 
 이들은 각각 1만원씩을 투자해 3만원을 자본금으로 정미소 시설을 갖추기로 했다. 마산 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최신식 기계를 설치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그런데 마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정미소를 갖추려다 보니 아무래도 자본금이 모자랐다. 그래서 산업은행의 전신인 식산은행을 찾아다 대출을 신청했다. 
  
 은행에선 곡가의 변동과 일본시장 변동에 관해 이것저것 물었다. 이병철은 돈을 빌려주기 싫어 괜스레 쓸데없는 질문만 하다고 지레짐작했다. 하자만 그건, 사업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이병철은 그런 대내외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해 결국 첫 사업은 실패하게 된다. 
여하튼 이병철은 은행에서 설비자금을 대출받아 신식기계를 도입했다. 그리고 1936년 어느 화창한 봄날, 마산에 ‘협동정미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세 사람이 동업했기 때문에 ‘협동’이라는 상호를 썼지만, ‘조선인은 협동심이 없다’는 일본인들이 멸시를 보기 좋게 꺾겠다는 각오도 있었다고 한다. 
이병철은 동업자와 함께 사업에 전념했으나 1년 뒤 결과는 ‘꽝’이었다. 이병철은 자본금 가운데 절반 이상을 까먹었다. 
  
 당시 쌀 거래는 인천에 있는 미곡소를 중심으로 이뤄졌는데, 일반 미곡상들은 여기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양곡시세에 따라 거래를 했다. 미곡상들은 쌀값이 오를 기미가 보이면 쌀을 사들였다가 다시 쌀값이 내릴 기미가 있으면 쌀을 파는 방식으로 사업을 벌였다. 이병철도 같은 방식을 따라 사업을 했으나 결과는 엄청난 적자였다. 결국 동업자 가운데 한 사람인 김정수가 손을 떼버렸다. 
이병철은 곰곰이 원인을 분석했다. 지방에서 쌀을 사다가 도정업을 하던 이병철은 쌀값 시세에 관계없이 부지런히 기계만 돌리면 사업이 잘 될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정작 도정에서 오는 이익보다 쌀값이 오를 때 사다가 쌀값이 내릴 때 도정을 거쳐 팔았기 때문에 손해가 생긴 것이다. 
그는 쌀값이 오를 때 쌀을 사다가 도정을 해서 쌀값이 떨어졌을 때 내다팔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냈다. 마치 주식투자에서 소문을 듣고 주식을 샀다가 쪽박을 차게 된 셈이다. 
  
 분석을 마친 뒤, 이병철은 그때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사업을 벌어나갔다. 쌀값이 오를 때 다른 사람들은 더 오르리라는 기대심리로 쌀을 사들였으나 그는 쌀을 내다 팔고 쌀값이 떨어질 때 쌀을 사들였다. 
 작전은 대박이었다. 적자를 만회하고도 상당한 이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 다음 결산에서는 3만원의 출자금을 빼고도 2만원의 이익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병철은 정미소 경영을 통해 얻은 이익금으로 다른 사업을 벌이기로 했다. 그는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필요한 화물차를 제대로 구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그래서 운수업에도 손을 댄다. 화물량이 많았지만 운송수단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병철은 화물차 5대를 굴리던 마산 일출 자동차 회사를 사들였다. 또 신형 트럭 5대를 새로 구입해 본격적으로 운수업에 뛰어들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운수업도 솔솔 잘 됐다. 이병철은 제법 돈도 벌었다. 그리고 사업에 자신감도 붙었다. 
  
 젊은 나이에 사업에 성공을 거두고 돈도 벌자, 이병철은 다시 옛 버릇이 되살아났다. 그는 남아도는 시간과 돈을 주체하지 못해 요정나들이를 다시 시작했다. 이병철은 요정에 가면 방 하나를 차지하고 사람 수에 맞춰 기생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요정 전체를 차지한 다음,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기생들과 어울려 놀았다. 
 당시 마산에는 8~9개의 요정이 있었는데, 모두가 이병철의 단골이었다. 거기에 근무하는 80~90명이나 되는 기생과 모두 낯을 익힐 만큼 그의 요정 출입은 빈번했다. 한번은 마산에 있는 기생 7~80명을 몽땅 예약한 적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날 경남의 일본인 경찰부장이 마산에 왔다. 마산에 있는 일본인 관리들은 접대를 위해 일류요정으로 안내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이병철이 마산의 모든 기생을 예약한 뒤여서 기생이 있을 턱이 없었다. 
  
 도정업에서 운수사업까지 재미를 본 이병철은 또 다른 사업에 손을 댔다. 토지를 구입하기로 생각한 것이다. 
 그는 땅을 사들이려 한 것이다. 이병철이 동업자인 정현용에게 자신의 계획을 넌지시 말했다. 
 “사업을 한 가지 더 해보는 게 어떻겠나?” 
 “어떤 사업을 하자는 거야?” 
 “토지를 구입하는 거야.” 
 “그건 돈이 많이 필요한 사업이 아닌가. 갖고 있는 자본금만으로는 어려울 거네.” 
 “염려 말게, 은행을 이용하면 도니까.” 
 은행에서 돈을 빌려 땅을 사들인 뒤 소작을 맡겨 농사를 짓게 한 뒤, 쌀을 팔면 은행이자를 갚고도 이익이 된다는 계산이었다. 
  
 이병철이 땅을 사들이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쌀값은 계속 오르고 있었지만, 땅값은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지원병 제도를 만들어 젊은이들을 강제로 전쟁터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농촌에서는 농사를 지을 일손이 모자라게 되어, 저마다 농토를 팔려고 내놓았다. 
 이렇게 되니 쌀값은 자꾸 치솟는 반면에 땅값은 떨어졌던 것이다. 이병철의 땅 투기는 일제치하에 농민의 희생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업 확장과 성공에만 몰두한 그는 미처 우리 농민이 희생될 수 있다는 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첫 번째로 매입한 토지는 일본인 아마노가 내놓은 40만평의 땅이었다. 이병철은 계약금으로 그에게 만원을 건네주었고, 은행은 아마노에게 잔금을 지불해주고 담보등기를 끝냈다. 이런 식으로 이병철은 땅 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땅을 사들였다. 
 사업은 기대이상으로 잘 되어 사업을 시작한지 불과 1년 만에 이병철은 가을걷이 때 1만석을 거둬들이는 200만평의 대지주가 됐다. 약관 20대에 경남 일대에서는 최대의 지주가 된 것이다. 토지매입도 김해평야에서만 그치지 않고 부산, 대구 등지까지 뻗혀 나갔다. 
  
 거침없을 것 같은 그는 한순간에 무너진다. 느닷없이 중일전쟁이 터진 것이다. 1937년 3월 터진 중일전쟁으로 일본정부는 은행의 대출을 중단하는 비상조치를 취했다. 
 중국본토를 침략하기 위해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고 장기화되자 엄청난 전쟁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자금 동결령을 내린 것이었다. 
 이병철은 그때의 일을 청천벽력, 즉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표현했다. 전국의 쌀가게 문을 닫도록 해 정주영이 파산한 것과 같은 상황이 이병철에게도 벌어진 것이다. 
 결국 이병철은 그동안 일으켜 놓았던 정미소와 운수회사마저 날려 버리게 되었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동업자인 정현용은 모든 사업을 청산하고 서울로 이사를 가버린다. 이병철도 마산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사업이 잘 되어 돈을 많이 벌고 있을 때에는 귀찮을 정도로 몰려들었던 친구들마저도 그가 사업에 실패하자 한사람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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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는 실력도 있어야 하고 운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력이 좋다고 운이 따라주지는 않는다. 

다만 실력이 있다면 운이 찾아와 주는 기회를 늘릴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