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이니 무작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 중 상당수는 우리에게 벽으로 다가온다. A라는 문제가 일어나서 A라는 문제의 일부분인 B를 해결하면, A의 또 다른 일부분인 C나 D가 괴롭히는 식으로 꼬리의 꼬리를 문다. 이는 참으로 골치 아픈 일이지만, 그 골치 아픈 일이 있기에 인간은 행동한다.
소설 등장인물의 행동동기가 그러하며, 실제 인간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소설 주인공 상당수가 악바리같이 빠따질을 한 끝에(혹은 시작부터 +15 전설의 빠따를 얻고 시작하여) 벽을 깨부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게 차이점이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은 벽의 높이와 강도에 질려버리고, 벽 앞에서 술판이나 벌이고 앉아있다가 언젠가는 저 벽을 넘어야지 언젠가는 말이야, 혹은 저기 있는 조금 낮은 벽이라도 넘어볼까 하며 우물쭈물 하다가 그 조금 낮은 벽 역시 넘지 않은 체, 역시나 술판을 벌인다. 그렇게 상당수 인간은 벽을 넘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 체 우물쭈물 하다가 죽는다.
벽을 넘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 체. 우물쭈물하다가 죽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벽을 넘는 것이 즐거운 일이냐고? 물론이다. 다시 한번 소설로 예를 들면 인터넷에 넘쳐나는 싸구려 소설의 99%는 결국 벽을 넘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작가로부터 창조된 주인공이 벽을 넘는 것을 보며 그것이 내가 된 것마냥 감정이입을 하는 것. 벽을 넘는 것이 즐거운 일이 아니라면 그런 소설이 그토록 잘 팔리지 않을 것이다. 물론 싸구려 소설이니만큼 차츰차츰 벽을 넘거나 깨부수는 대신 시작부터 +15강 전설의 빠따를 들고 시작하거나, 점프력이 무슨 쵸파 각력강화 급이거나 하는 게 대부분이지만 벽을 깨부수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그렇기에 관음증 걸린 우리들은 실존하지도 않는 남이 벽을 부수는 모습을 보며 즐기는 것이다.
게임 역시 그러하다. 게임 제작자는 의도적으로
게임이 주는 즐거움 아니겠는가? 벽의 높이, 벽의 제질, 벽을 깨부수는 방법의 다양한 등이 게임의 완성도를 좌우한다. 벽이 너무 쉬우면 성취가 없다. 너무 어려우면 중도에 포기한다. 높은 벽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차츰차츰 벽의 크기를 키워나가는 것 역시 좋은 설계를 위한 테크닉.
그렇다면 이러한 테크닉을 게임에만 사용하란 법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하다면 스스로에게 깨부술만한 벽을 지속적으로 제공 할 수 있다면, 게임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벽을 뛰어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더 높은 벽을 도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 스스로를 코칭 할 수 있다면 설령 타고난 재능이 적다 하더라도 그 이상의 성취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나 자신을 코칭하는 것 그것이 내 새해 목표다.
탄핵 가결이 위대한 인민들의 작은 성공이었습니다
ㄴ이상한걸로 공격받기 싫으면 인민이란 단어 시민으로 고치세요. 설마 이상한 생각이 맞아도 시민으로 고치세요.
ㄴ 인민을 사전에 검색해보고 오세요
ㄴ인민이라는 단어가 잘못된 건 없음. 다만 에어로홍의 적들은 에어로홍이 그 생각을 하고 있던 안하고 있던 간에 그 단어 가지고 무의미한 소모적 논쟁을 할거임.
ㄴ괜히 약점 잡힐 필요가 없는 레후.
노통도 인민이라는 단어 북한한테 뺐겨서 안따깝다햇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