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이 계도한 정홍원 검사' <조선> 미담, 소름 끼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oid=002&aid=0001990196


좋아요 평가하기 공감 1

[기자의 눈] 음악인 울린 시대의 폭력에 관한 성찰이 없다

 [프레시안 박세열 기자]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은 건전한 가수들을 원했다. '신중현과 엽전들' 1집의 <미인> 같은 히트곡의 후속작은 <뭉치자> 같은 '건전 애국 가요'여야 했다. 사회에 대한 불만 표출은 용납되지 않던 때였다.

1975년 한국 대중음악을 강타한 '1차 대마초 파동'도 이런 시대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다. 오늘날 '가왕'으로 불리는 조용필도 이 시기를 전후해 남산 지하 취조실에 끌려가 '주전자 고문'을 당했다. 이런 식으로 자생적인 한국 대중문화가 초토화됐을 때 당대의 많은 '꼰대'들이 손뼉을 쳤을지는 모르겠지만, 후대의 음악팬들은 그 시절을 '암흑기'로 기억한다. 박정희 정권이 전두환 정권으로 바뀐 후에도 '관제' 가요들은 '국풍'의 이름으로 판을 쳤고, 이남이 같은 음악인은 "울고 싶어라"를 외치며 피를 토해야 했다.

"울고 싶어라, 울고 싶어라, 이 마음. 사랑은 가고, 친구도 가고, 모두 다. 떠나보면 알 거야, 아마 알 거야. 왜 가야만 하니, 왜 가니. 수많은 시절, 아름다운 시절, 잊었니."

1980년 8월 이른바 '2차 대마초 파동'으로 구속됐다가 결국 서울에서 음악을 접고 춘천으로 낙향해야 했던 가수 이남이와 정홍원 국무총리 후보자의 '인연'이 12일자 <조선일보>에 '미담 기사'로 났다.

두 사람은 1980년 '2차 대마초 파동' 때 인연을 맺었다. 정권 차원에서 수많은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한 '가요계 정화 운동'에 이어 터진 '1차 대마초 파동'에 비할 바는 아니나, '2차 대마초 파동' 역시 당대 최고의 전위적 그룹 사운드이던 '사랑과 평화'가 해체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 회자되는 사건이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1980년 서울지검 검사로 이남이를 구속했던 정 후보자가 2010년 1월 투병 중이던 이남이의 병문안을 하고 싶다며 찾아갔다. 정 후보자는 "이렇게 편찮으셔서 어떻게 하느냐. 그때(대마초 사건)는 본의 아니게 불편하게 해 드려 죄송하다"고 했고, 이남이는 "(서울에서) 춘천까지 먼 길을 나 같은 사람 보러 오셨느냐"고 했다. 정 후보자는 5분 정도 이남이를 만난 후 100만 원이 든 봉투를 놓고 갔다. 이 신문은 1980년대에 이남이가 출소 후 정 후보자를 찾아가 "그간 많은 것을 깨달았다"며 대마초를 피우지 않는 가수가 되겠다고 말한 일이 있다고 전했다.


표적은 대마초만이 아니었다

이남이는 경희중학교 밴드부에서 호른을 불면서 음악의 길에 들어섰다. 1966년 가수 최헌과 '차밍가이드'를 결성해 미8군 무대에 섰고, 그 후에는 무명이던 조용필과 '김트리오'를 만들었다. 이남이는 그 후 '신중현과 엽전들'에서 <미인>으로 소울풍의 펑키한 베이스 리프를 선보였다. "한국 대중음악사에 '충격적인 사건'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미인>"이라는 평가도 들었다.

이남이와 음악을 한때 같이했던 조용필과 신중현은 박정희 정권이 내건 '가요 정화 운동'의 표적이 됐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유신을 선포한 후 긴급조치를 발표한 박정희 정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