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그 노점상은 왜 거리에서 싸늘하게 죽어갔는가

고 박단순씨 살인단속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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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그 노점상은 왜 거리에서 싸늘하게 죽어갔는가고 박단순씨 살인단속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며
  • 김성은 대책위 공동상황실장
  • 승인 2017.06.29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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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점상 고(故) 박단순씨 빈소 [사진제공 : 민주노련]

“얼음도 비싼데 뚜껑을 잘 덮어야지, 왜 제대로 안 덮고 그러냐….”

노점상 고(故) 박단순씨가 이승에서 한 마지막 말입니다. 단속반이 어질러놓은 얼음상자 뚜껑을 보고 한 이 말을 마지막으로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습니다. 폭염특보가 발효되었던 지난 19일 오후 2시, 강북구청의 노점단속 중에 쓰러진 그는 다시 눈을 뜨지 못 하고 25일 오후 3시30분경 만 6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지 5일째가 되는 오늘(29일)까지 이 황망한 죽음에 대해서 강북구청은 단 한 마디 사과조차 없습니다. 도의적 책임을 운운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강북구청장도 아닌 구청 관계자들의 익명 인터뷰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박겸수 강북구청장은 박씨가 입원해있던 중환자실로 찾아와서 고인의 아들에게 “자네 나이가 몇 살인가?”, “어머니는?” 딱 두 마디를 하고 5분 정도 앉아 있다가 자리를 떴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강북구청 관계자들이 찾아와서 가족들에게 병원비와 장례비, 위로금을 포함해서 475만원을 내밀었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것에 대해서 위로와 사과의 말을 하는 것이 먼저인데, 법적 책임이 없다면서 사과조차 하지 않고서는 기초생활수급자면 받을 수 있는 긴급의료급여와 장제급여가 포함된 보상금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하는 그 태도에 기가 찼습니다. 두 아들과 유가족들은 구청 관계자들을 그 자리에서 쫓아냈고 이대로는 장례를 치를 수 없다며 도봉구 한일병원 장례식장 2호실에서 노점상 동료들과 함께 빈소를 지키고 있습니다.

고인의 고단했던 삶

노점상 고(故) 박단순씨는 1956년생으로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의 삶이 특별히 가난했던 것은 아닙니다. 부자와 성공한 사람만 주목하는 한국 사회가 눈길도 주지 않는 우리네 가난한 이웃들의 평범한 삶이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삶의 곁에서 가난을 떨쳐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나쁜 짓을 해서 부자가 되겠다는 독한 마음도 없었을 뿐입니다.

7남매 중 맏이였던 남편과 22살이 되던 해에 결혼을 했고 그 다음해에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전라도 시골에서 소작농을 하는 것으로는 가족을 부양하기 어려워 1981년 서울로 올라왔지만 서울에서의 삶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고인의 시아버지는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을 당한 트라우마로 정상적인 경제활동이나 사회생활이 불가능했습니다. 서울로 이주하고 난 뒤에도 시아버지는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다가 1991년에 돌아가셨습니다. 농사만 짓고 살던 남편도 술에만 의존하다가 결국 알코올중독으로 15년 전에 정신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몇 년 전부터는 친정어머니도 병환으로 몸져눕게 되어 그 간병과 부양도 감당해야 했습니다. 결국 친정어머니도 1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고(故) 박단순씨와 그 가족들처럼 1980년대에 노점상을 선택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소작농으로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상경해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여 도시빈민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식들과 어린 시동생들까지 돌봐야 하는 고인과 그의 남편도 선택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생계를 위해서 둘은 양말이나 과일 등을 파는 노점상이 되었습니다.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다가 1990년대에 강북구 삼양사거리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주변에 동북시장과 솔샘시장 등이 있어서 장사도 곧잘 되었다. 같은 처지의 노점상들과 전국노점상연합에 가입을 했고 단속은 있었지만 동료들과 함께 했기에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2006년부터 삼양사거리 주변에 개발의 바람이 불고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강북구청은 보도환경을 개선한다면서 대대적으로 주변 노점들을 강제 철거했습니다. 결국 삼양사거리에서 장사하던 60여 개의 노점이 거리에서 사라졌고 같은 숫자의 생계도 사라졌습니다. 남편의 알코올중독이 심해져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난 이후 삼양사거리에서 같이 장사를 하던 여동생의 남편도 강제철거 이후 사망했습니다.

자리가 없어진 노점상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보따리 장사뿐이었습니다. 단속을 피해서 오랫동안 여기저기서 장사를 하는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자식들을 키웠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사는 곳 근처인 삼양사거리로 돌아왔습니다. 그곳에 있는 환경미화원 후생관에 양해를 구하고 그 계단에 앉아서 장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기쁨과 슬픔, 아픔이 그대로 서려 있는 삼양사거리에서 자신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엄마는 도둑질을 하지도, 강도짓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고인이 사놓고 끝내 신지 못한 운동화 [사진제공 : 민주노련]
고인이 돌아가신 이후 26일(월), 강북구청 앞의 집회에 참가한 큰 아들은 마이크를 붙잡고 이렇게 절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