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만든 '과학' 다큐멘터리가 굳이 필요한가? 에 대한 꽤나 유력한 대답. 가장 한국적인 것은 가장 세계적일 수 있지만, 가장 세계적인 것을 굳이 한국적으로 변용할 필요는 없다.  



- 만듦새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한국어를 사용한) 한국 문학이나 한국 영화, 한국 음악은 꼭 필요하다. 타 언어, 타 민족, 타 인종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의 중요성과 별도로, '지금 여기'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도 <관촌수필>의 소중함은 또 다른 차원에 있고, 비슷한 주제를 다뤘다곤 하지만 <어스>와 <기생충>을 대하는 한 관객의 태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더하자면, 우리 언어로 만든 만큼 언어의 장벽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이나, 가장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인 것이라는 유명한 문구도 그 이유로 꼽을 수 있겠다. 



- 다큐멘터리도 큰 틀에서는 그리 다르지 않다. 바라보는 시선의 위치나 성격, 이야기 방식이 조금 다를 뿐, 결국은 이야기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다루는 대상이 과학, 특히나 현대 물리학이라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현대 물리학의 많은 문제들이 영어로 다루어져 왔고 다른 자연 언어들이 배제되어 가는 속도에 점차 가속이 붙긴 하지만, 결국 과학의 언어는 수학이기 때문이다.  


- '빛의 물리학'은 나쁘지 않은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4, 5, 6부에선 특기할 만한 장면들이 적지 않다. CERN 내부의 풍경을 담은 4부 초반부는 현대 물리학의 정수를 그대로 보여주면서 후반 3부작의 문을 열어젖히는, 굉장히 인상적인 시작이었다. 또, 끈 이론의 창시자들을 만나 꽤나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는 6부 후반부도 보는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책에서 활자로만 만나던 레너드 서스킨드나 에드워드 위튼을 직접 영상으로 만날 때 그러했고, 파인만이 "오늘은 어떤 차원에서 살고 계신가?" 라고 자주 놀려 먹었다던 존 슈워츠가 등장할 때는 이유 모를 이상한 감동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빛의 물리학'은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 범주에는 결코 들지 못한다.


- 때때로 우리는 '내용에 앞서는 방식'을 만나곤 한다. 더할 나위 없는 찬사로도, 중요한 게 뭔지도 모른다는 혹평으로도 쓰일 수 있는 표현. '빛의 물리학'의 경우는 슬프게도 후자였다.


- '맛있는 녀석들' 의 그것보다 못한 초반의 엉성한 CG와 '서프라이즈' 외국 재연 배우들을 오스카 위너로 만들어 버리는 연기는 보고 있자면, 이런 식으로 내가 빛의 속도에 가까워진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대충 재미없어서 시간 너무 안 갔다는 의미)  칼 세이건이 다큐멘터리 <코스모스>에 배우들의 연기가 아닌 애니메이션을 삽입한 건 정말 천재적인 발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 넓은 아량, 혹은 뒤틀린 유머 감각으로 CG와 연기의 허들을 통과한다고 해도 더욱 크고 결정적인 결격 사유가 남아 있다. 훨씬 더 나은 대체재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대체재보단 상위호환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 칼 세이건이 시작했고 그의 유지를 이어 앤 드루얀과 닐 타이슨이 참여한 2014년 작 <코스모스>과 브라이언 그린의 <우주의 구조>가 바로 그것이다. 



- 물론 두 다큐멘터리의 분량(13화 + 3화)이 부담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또, '빛의 물리학' 입장에서는 체급이 다른데 왜 싸움을 붙이냐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코스모스>는 과학과 인간에 대한 폭 넓은 이해와 감동을 다뤄 <빛의 물리학>에선 느낄 수 없는, 과학 전반에 걸친 호기심과 감동을 선사한다. 또 <우주의 구조> 시청이 그대로 브라이언 그린의 책 <엘러건트 유니버스> 독서로 이어질 경우, <빛의 물리학> 시청으론 결코 이루어 낼 수 없는 차원의 쉽고 상세한 이해로 이끌어 준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 <코스모스>는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하는데 판권이 디즈니로 넘어가면서 목록에서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 고화질의 자막판을 쉽게 구할 수 있다. 더빙판도 꽤나 호평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우주의 구조> 고화질판은 쉽게 찾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360p로도 만족할 수 있다면, 유튜브에서 지금 바로 만날 수 있다. 길지 않은 분량인 만큼 저화질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수학적으로 가능하긴 하나 아무 것도 예측하지 못하는 끈이론과 내용은 나쁘지 않지만 시청 후 별 다른 감흥을 불러 일으키지 못한 <빛의 물리학>이 슬프게도 서로 닮아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망상도 해 본다.)



- 혹여 1-3부와 4-6부의 제작진이 다르다면,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 아마츄어 티 팍팍 나는 외국 배우들과는 전혀 다르게, 미시 세계에서의 '원자' 역할과 '광자' 연기에 이어 '슈뢰딩거의 고양이'까지 완벽하게 소화해낸 남명렬 배우의 노력은 꼭 한 번 언급할 필요가 있다. 



- 진행자로 대체 왜 안무가를 택했을까? (나의 대학 시절 현대 물리학을 다룬 수업의 교수님과 놀랄 정도로 닮긴 했지만) 현대 물리학 아니 과학과도 큰 접점이 없어 보이는 인물이다. 영상에서는 이름 정도만 알려주고, 어떤 내용에서도 현대 물리학 가이드로 안무가를 기용한 이유를 찾기 힘들다. 학계에 큰 업적을 남긴 유명 과학자와 함께 떠나는 과학 여행을 선택해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SETI 프로그램을 주도하고 골든 레코드를 만든 인물 & 에드워드 위튼과 함께 '초끈이론의 선두주자'로 불렸던 과학자 VS 안무가. 밸붕.



- 미국 소설가 앤드루 포터의 표제작이자 작품집 이름이기도 한 도 꼭 추천하고 싶다. 



-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의 새 시즌 가 현지 시간으로 오는 3월 9일 방영된다고 한다. 닐 타이슨이 그대로 호스트를 맡고, 칼 세이건의 가장 가까운 동료이자 아내인 앤 드루얀이 제작, 각본에 감독까지 맡았다고 한다. 세스 맥팔레인, 저드 허슈, 패트릭 스튜어트, 비고 모텐슨 등 유명 배우들이 실제 인물들을 맡아 연기한다고 하니 발연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 칼과 앤의 딸인 사샤 세이건도 등장한다고 한다. 



- 이전 시즌에 그랬던 것처럼, 다큐멘터리 방영에 맞춰 동명의 책도 발매한다. 아마존에서는 이미 예약 판매를 하고 있다. 



- 코스모스 새 시즌에 관한 정보는 모두 <빛의 물리학> 덕분이다. 일상의 무게에 매몰될 만큼 멀지도 않고, 개봉을 함께 하지 못해 아쉬울 만큼 늦지도 않게, 꼭 알맞은 시간에 <코스모스> 새 시즌의 카운트 다운을 시작할 수 있게 해준 <빛의 물리학>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다큐 보고 감상만 짧게 쓰려고 하다 살짝 길어져 버렸다. 다큐 보고 쓴 글은 맞지만, 언급한 세 작품 모두 책과 다큐 동시 출간해서 책 얘기가 많다고 생각해서 독갤에 올립니당.


다들 즐독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