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너무 밝은 이야기만 한 거 같으니까, 오랜만에 '그새끼'의 또 다른 업적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이 통통한 머머리 아저씨는 이사크 바벨이다.
오늘날은 <오데사의 톨스토이>로 칭송받는다.
1894년, 지금의 우크라이나 오데사에서 태어난 그는 우크라이나 유대인 출신이었고, 그의 부모는 바벨에게 상업 교육과 유대교 교육을 시켰지만,
자라나면서 바벨은 문학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던 중 대학을 졸업하고, 페테르부르크로 온 그는, 곧 그의 스승을 만나게 된다.
막심 고리키는 사실 이 시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문호이자 많은 동료와 후배들의 스승 같은 존재였다.
바벨이란 새로운 젊은이를 본 고리키는 그와 친분을 쌓으며 글을 쓸 것을 장려한다.
그리고 곧 10월 혁명이 일어나, 볼셰비키들이 권력을 잡는다.
사실 바벨 본인이 상당수 러시아 지식인들이 그러하듯, 이러한 변화를 환영했기에, 그는 언론사 기자로 일한다.
그러던 중, 적백내전에 참여하며 특히, 기마대와 같이 움직이며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다.
바벨은 오늘날 <붉은 기병대> 연작으로 불리는 단편들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기자로서 소비에트의 영광을 알려야했을 바벨이 쓰는 작품들은 소비에트식 프로파간다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때론 야만적으로, 전쟁의 참상을 그리며 붉은 군대의 실상을 묘사하거나, 본인이 유대인이었다는 점도 감안해야겠지만, 바벨이 목격한 반유대주의적인 면모에 대한 비판 등, 여러모로 이상적인 소비에트가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장, 바벨과 함께했었던 기마대 지휘관은 당으로 하여금, 그를 처형시킬 것을 외쳤으나, 고리키의 도움으로 오히려 바벨의 작품들은 무사히 출판된다.
아니, 오히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알려주는 계기가 된다.
바벨의 <붉은 기마대>는 출판된 직후, 영어로도 번역되는 등, 곧 그를 젊은 소비에트의 눈여겨볼 작가로 만들어주었으니까.
이후 그는 자신의 고향 오데사, 특히 오데사에 사는 유대인들을 다루는 단편 연작집 <오데사 이야기>나 희곡 <일몰> 등을 발표하면서,
여러모로 위태로워보이면서도, 어쨌든 소비에트 내에서 명성을 쌓아간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류를 바벨 본인도 느낀다. 이 즈음부터 그는 소비에트에서 석연치 않게 돌아가는 참상들을 보곤, 조금씩 침묵하기 시작한다.
그 시대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완전히 침묵한 것은 아니었다.
세르게이 에이젠시타인 같은 이들과 협력하여 영화 대본을 쓰는 일을 하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1936년, 그를 비호하던 고리키가 급작스런 죽음을 맞이하면서 '스탈린'당하고, 다른 소비에트 작가들에게 그러하듯, 최후는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대숙청 - 예조프시나 -가 시작되었다.
대숙청을 주도했던 스탈린의 난쟁이 예조프와 바벨은 공교롭게도 악연이 있었다.
안 그래도 바벨 본인이 이미 <붉은 기마대> 같은 위험한 작품을 쓴 인물이었지만, 개인적으로도 바벨은 여자 문제로 원한을 사고 말았다.
이사크 바벨의 인간으로서 비판받을 점은 사실 여자 관계가 문란하다는 점이었다.
그는 결혼을 했지만, 그의 아내는 소비에트를 견딜 수 없어서, 파리로 딸과 망명을 떠났고, 공식적으로 이혼을 하진 않았으나 점점 바벨은 다른 이들과 관계를 가지기 시작한다.
나중에야 사실혼 관계로 발전하여 같이 동거하던 아내도 있었지만, 사생아도 몇몇 있었다는 점을 보면, 여러 여성들과 연애를 하고, 헤어지는 걸 반복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러한 바벨의 '외도' 대상엔 당시 대숙청을 주도했던 비밀경찰 국장 예조프의 아내도 있었다.
물론 이러한 외도로 바벨이 잡힌 것은 아니었다.
그 전에 예조프는 실각되었고, 그 뒤를 베리야가 이었다. 하지만 베리야의 시선으로도 이사크 바벨은 용납할 수 없는 반동분자였다.
1939년 5월 15일,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던 두번째 아내와 집에서 잠을 자던 이사크 바벨에게 베리야의 명을 받은 NKVD 요원들이 방문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벨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요원들은 바벨과 바벨의 자택에 있는 모든 걸 가져갔다.
바벨에겐 특별히 그 시절에도 지독하기로 유명한 고문 기술자들이 할당되었고,
처음엔 자신에게 지목된 모든 죄를 부인하고 결백을 외치던 바벨은 고문 끝에 에이젠시타인을 비롯한 이미 대숙청 명단에 오른 자신의 친구들을 향한 증언과, 자신의 모든 죄목을 인정한다.
감옥에 갇힌 바벨은 당에게 자신의 압수된 원고들을 잠시라도 이어서 작업하게 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든 요청은 당연히 묵살되었다.
또 다시 새로운 심문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자신이 했던 거짓증언을 모두 부인한다.
이러한 행위가 그의 친구들에겐 약간이나마 도움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바벨 본인에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았다.
기록이 공개되지 않았을 때엔 바벨이 굴라그에서 죽었을 거란 이야기가 있었지만, 오늘날 남아있는 기록은 그가 1940년 1월 27일에 다른 반동분자들과 함께 총살당했다고 알려주고 있다.
스탈린은 총살 명단에 서명을 했고, 그대로 총살은 집행되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무죄를 외치며, 마지막까지 당에게 부탁을 했다고 한다.
"하나만 부탁하고 싶소.....내 글을 완성하고 싶소."
그렇게 이사크 바벨은 예조프시나, 대숙청에서 목숨을 잃은 재능 많은 예술가들의 기나긴 목록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대숙청을 주도했던 스탈린의 난쟁이 예조프는 바벨이 죽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 2월 4일에 처형된다.
예조프의 시신을 비롯한 바벨의 시신은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소각되었고, 재는 함께 묘지에 묻혔다.
바벨이 첫번째 아내 사이에서 낳았던 나탈리 바벨 브라운은 오늘날 바벨 연구의 저명한 연구자가 되었고, 그녀를 비롯한 이들이 이 <오데사의 톨스토이>의 작품을 연구하고, 또 추적하고 있다.
그러나 만델스탐이나 불가코프 같은 이들과 달리, 바벨 본인은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
바벨이 마지막까지 완성하기를 간청했던 그의 압수된 15개의 묶음, 7권의 공책 등 방대한 분량의 원고들은 그 후 아마도 모조리 소각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바벨의 압수된 원고는 그 어떠한 것도 전해지지 않는다. KGB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이사크 바벨의 원고 행방에 대한 기록은 애당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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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은 20세기 러시아 문학을 논할때 빠질 수 없구나
얘는 역본이 지만지 천줄읽기 밖에 없네. 어쩔 수 없으니 지나가야겠구먼~
진짜 님 글 너무 재밌고 유익함 계속 써줘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