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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등장인물-

 

연로한 박사 이삭, 그의 며느리 마리안, 소녀 사라, 소녀의 보호자 빅토르, 소녀의 연인 안데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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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쉬: "삶과 자연의 혈관에서 아름다움이 억제된다면 그 근원이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소녀: 안데쉬는 목사, 빅은 의사가 된대요.


빅토르: 신과 과학을 논하면 안 되는데 안데쉬가 그 약속을 깨버렸군.


소녀: 빅, 그만 둬.


빅토르: 현대인이 무슨 수로 성직자가 된다는 거지?


안데쉬: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건방진 합리주의로군.


빅토르: 내 생각에 현대인은...

안데쉬: (말끝을 자르며)내 생각엔...

빅토르: (목소리를 높이며)허무함에 의연하게 대처하고 자신의 죽음을 직시하고 있어.


안데쉬: 현대인은 하나의 발명품에 불과해.

인간은 죽음을 혐오하고 허무함을 견디지 못해.


빅토르: 종교란 통증을 없애는 진정제와 같은 거야.


소녀: 두 사람 말이 다 맞는 것 같아요.


빅토르: 어린이들은 산타를, 어른들은 신을 사랑하지.


안데쉬: 그 상상력 한번 대단히 빈곤하구만!


빅토르: (박사를 바라보며)어떻게 생각하세요?

안데쉬: 박사님?


박사: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아이러니를 만나게 돼.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겠네.


소녀: 좋은 기회인데 아깝네요.


박사: 아니지, 크게 혜택 받았어.(이어지는 소녀의 웃음)


"내가 애타게 찾던

친구는 어디 있는가


일출과 함께 동트는

내 갈망의 절정,


어둠이 내려도....." (머뭇거린다.)


마리안: "어둠이 내려도

그의 흔적은 없네."


안데쉬: "내 가슴은 불타오르고

나는 그의 자취를 보네."


빅토르: 박사님은 신을 믿나요?


박사: (침묵.)

"힘이 미치는 곳마다

그의 자취가 남아 있으니,


꽃의 향기는 부드럽고

들판의 바람은 너울거리네."


마리안: "토해내는 내 한숨에

내쉬는 공기에


한여름 미풍의 속삭임에

그의 자비로운 음성이 어리네."


빅토르: 괜찮은 연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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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련 글이지만 작품의 주제의식이 철학과 밀접해서 독서갤에 올려봅니다.

이 대화씬에서 가장 인상깊은 장면은 빅토르의 질문에 박사가 침묵하는 장면이 아니었나 싶네요.






-이하『밝은 세상』1995년 7월 8일 '산딸기'를 보고 나눈 이야기들(영화평론가 정성일, 임인덕 신부)중에서 발췌-



'산딸기'는 고전주의와 모더니즘의 과도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다소 모순된 구성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구태의연한 대목이나 너무 실험적인 부분이 일목 상충한다는 점입니다. 

60년대 이후의 유럽 영화는 크게 베르히만 감독 영향권과 장 뤽 고다르 감독 영향권의 상이한 전통을 만듭니다. 베르히만의 자식들이라 불리는 소련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베르히만의 '산딸기'를 꼽았고, 그의 영화 '희생'에서는 연출이나 구도, 카메라 앵글에서 '산딸기'와 아주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르네상스 이후 중세 그림에는 원근법이 없는 수평구도를 가지고 있는데 베르히만은 그와 같은 구도를 영화에서 많이 사용합니다. 

'산딸기'에서 앞부분의 꿈 장면을 보면 카메라가 수평으로 이동합니다. 베르히만과 같은 중세의 세계관을 가진 타르코프스키는 '희생'에서 우편 배달부의 이동 모습을 그와 유사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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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에게 철학적 논쟁을 제의하는 '산딸기'


고전주의 시대의 특징은 어떻게 하면 영화 속에서 카메라를 보여 주지 않을까 고심하였다면 모더니즘은 카메라가 세계를 보는 창 역할로 관객들에게 환기되어 진다는 점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산딸기'는 영화 언어 자체를 이해하면서 관객에게 감독의 이야기를 해석하게 하도록 철저한 객관화를 요구합니다. 

따라서 감독들은 자기 이야기를 장르가 주는 기승전결상의 기법보다 왜 그 이야기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관객 스스로 장면에서 찾도록 유도합니다. 


베르히만에 대한 극분된 찬반 양론의 말을 들어봅시다.

찬성하는 부류의 의견은 이러합니다. 영화가 관객에게 철학적 논쟁을 제의합니다. 

철학적 언어를 구사하는 대사와 관객의 대답을 요구하는 느닷없는 장면들은 오락물이던 영화를 철학서적으로 변모시킵니다. 

영화에서 형이상학적 논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영화의 격을 한 단계 높인 것입니다.

 

비평적인 시각은 다른 의견을 갖습니다. 영화에서 철학적 논쟁의 대사는 스토리 텔링 그 외에 의미가 없다는 것이죠. 

과연 스토리 텔링의 영화가 시각적으로 훌륭할까? '제 7의 봉인' 이나 '산딸기' 의 시각은 너무 구태의연하다고 유럽 비평가들은 혹평을 합니다. 


어쨌든 베르히만은 신에 관한 논쟁을 영화에서 제안합니다. '신'이란 보이지 않는 명제를 카메라 기계 복제장치로 표현하려고 하였습니다. 

즉 신의 부재(보이지 않는 것)와 영상의 존재(보이는 것)와의 싸움을 통해서 역설적인 명제를 새롭게 처음 세상에 던진 감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