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내용을 확인하시려면 스크롤 해주세요.

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만두이미지

20세기, 인간 지성의 오만이 끝에 달했고 결국 한계에 부딪혀 패배를 선언한 시기. 이성의 자식들은 화기와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그들의 주인 등에 칼을 꽂았고 인간은 그들의 역사상 첫 경험의 공포, 그들 스스로가 스스로를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새로운 공포를 알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술가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했던 과거의 유물들을 뒤로 한 채 그들의 상황에 대한 조건들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풍요와 공허를 동시에 체험한 세대가 알게 된 삶의 진실을 그들은 표현하고자 했고 그 중심에 베케트가 있었다.

베케트의 관심은 언어였다. 그리고 그는 이 언어를 해체한다. 자신의 문학적 아버지인 조이스가 모든 것을 언어로 치환할 때 그는 오히려 언어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조차도 없애 버린다. 문학에 연결이 없다는 것을 상상해 보았는가? 단순히 개연성의 상실을 넘어 《고도를 기다리며》 에는 어떤 진전도 일어나지 않는다. 누군가 질문을 해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간신히 대답이 나온다면 모두가 딴청을 피운다. 누군가의 결심은 아무런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한 채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간다. 마치 이 희곡 전부가 어린아이 장난인 것처럼 유치한 몸짓들이 반복될 뿐 무엇도 변하지 않는다.

인간이 믿던 모든 가치가 붕괴할 때, 그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에게 가장 근본적인 요소는? 문학의 시야에 따르면 이는 언어일 것이다. 베케트는 여기서 조금 더 전진한다. 언어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인간 삶의 가장 근본적인, 언어는 어떤 모습인가? 그렇게 베케트는 회의를 가득 품고 천천히 나아간다. 그의 근본조차도 장난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도록 모든 언어적 행위에 반기를 들며 삶의 관측을 계속해 나간다. 고도라는 점 하나를 찍어 둔 채 말이다(고도란 무엇일까? 난 오히려 이런 질문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베케트에게 고도라는 인물은 극을, 그의 관측을 진행하기 위한 하나의 문학적 양심이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정말 아무 것도 없다면 희곡조차도 쓸 수 없지 않은가?).

소설사 밀란 쿤데라는 베케트와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을 비교하며 둘을 각자의 예술 영역에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예술가라고 얘기한다. 베이컨은 유화로 작업하는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회화 세계의 마지막이다. 그렇다면 베케트는? 나는 그가 텍스트로 볼 수 있는 희곡의 마지막이 아닌가 생각한다. 연극이 이제 텍스트의 세계에서 벗어나 연극 자체의 특성들에 집중하게 된 시기에 마지막으로 텍스트의 희곡을 써냈다는 의미에서 베케트를 마지막이라 얘기한 것이 아닐까? 이 질문은 그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외젠 이오네스코에게로 연결된다.



황량한 베케트의 희곡과 다르게 이오네스코의 희곡은 적어도 기본적인 환경은 구성한다. 적어도 어떤 가정집을 보여주는 식으로 말이다. 거기다 대사 또한 《고도를 기다리며》 에 비하면 연결이 훨씬 더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오네스코는 다른 식으로 해체를 진행한다. 그에게 와서는 발화와 행동이 분리된다.

베케트의 인물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단지 실행은 하지 않을 뿐이다). 즉, 그들의 발화와 행동은 적어도 같은 세계에 위치한다. 이오네스코의 인물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의 행동과 발화는 서로 다른 세계에 위치한다. 예를 들어, 부부가 매우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시에 서로 쌈박질을 하는 것이 이오네스코의 희곡이다. 이오네스코에게 언어는 본질과 거리가 먼 개념이었던 것 같다. 언어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않는 세상. 베케트에게는 끔찍할 터인 세상.

이오네스코에게서 볼 수 있는 이런 특징들은 오늘날의 희곡이 가지는 또다른 특성, 즉 텍스트만으로는 더 이상 이해되지 않는 특성을 드러낸다. 물론 희곡은 관람하는 것이 최고이다. 그러나 적어도 셰익스피어나 입센의 희곡은 대사와 무대 설명들을 읽으며 이를 상상할 수 있다. 베케트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오네스코는 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무의미한 텍스트의 나열을 읽으며 무대 설명이 아무리 세세한다 한들 어떻게 그 무대를 명확히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오네스코의 작품 속에선 언어의 모습이 익숙함과 완전히 다른데 말이다.



현대 예술은 다른 모든 장식은 집어 던진 채 그들의 본질에 집중하도록 예술가들을 이끌었다. 희곡 역시 이런 변화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점점 더 무대 자체가 중요해지는, 텍스트는 부가적으로 변해버리는 모습을 우리는 베케트와 이오네스코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다만 무엇이 옳은지는 별로 중요하진 않은 듯하다. 뭐가 되었든 두 사람 모두 우리가 알지 못하던 삶의 조건들을 탐색하고 표현한 대단한 작가가 아닌가. 새삼스레 유튜브의 발달로 시각 예술을 손쉽게 접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