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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 당신은 어째서 로미오인건가요? 아버지를 부인하고 그 이름을 거절하세요. 그러면 나도 캐퓰렛이란 이름을 버리겠어요!"

셰익스피어의 명확함은 <피에르, 혹은 모호함>에서 그 위력을 완전히 상실한다.

간단히 도입부 먼저 설명하자면,
유복한 생활을 누리는 피에르는 그가 사랑하는 루시와 약혼하며 더욱 큰 행복에 젖어든다. 그러던 중에 날라온 편지 한 장, 자신에게는 숨겨진 누나가 하나 있다는 것인데...

이 작품의 어떤 인물관계도 단순히 '이름'으로 환원되지 못한다.

피에르와 글렌디닝 부인은 모자지간이지만, 서로를 누님, 동생이라 부른다.

피에르와 루시는 피가 섞여있는 친척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릴적, 피에르와 글렌의 관계는 우정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다.

피에르와 이사벨은 남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피에르의 결단은, 아버지의 결함을 숨기고 불쌍한 여자를 도와주려는 도덕적인 행위일 수도 있고, 근친상간의 욕망에 빠진 남자의 타락일 수도 있다.

멜빌은 어느 것 하나 분명히 해두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애매모호함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심지어는 제목조차 모호하지 않은가. 그 점이 사뭇 신비스럽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다시 한번 외쳐보자.

신비! 신비! 이사벨의 신비!
신비! 신비! 이사벨과 신비!


+) 여러모로 심리학적 접근이 눈에 띄었다.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설리반의 대인관계 이론 등등. 19세기치고는 제법 선구안적인 구석이 있다. 하지만 20세기의 혁신적인 소설들에 익숙한 우리의 눈에는 다소 미적지근하게 느껴질 수 있다...

번역이 조금 이상하긴 하다. 영어 번역체 특유의 딱딱함이 있다. "오,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정말 그 사실을 몰랐을 거야!", "너의 친절에 감사해" 같은 느낌? 웃기긴 하지만, 읽는 데 큰 불편함은 없다. 생각보다 잘 읽혀서 놀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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